< 최애가 어떻게 바뀌니 >
‘소녀날다’ 우등반은 쇼케이스 간담회에서 선보였던 단체곡 두 곡을 연이어 불렀다.
노래가 끝난 뒤에는 12명 아이들의 30초 개인 PR이 이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큰 함성이 나왔던 건 역시 뜨거운 감자 란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30초라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개인기와 노래, 춤 등을 빡빡하게 준비해왔는데 녀석은 담담하고 솔직한 멘트만으로 PR을 대신했다.
나한테는 춤을 추다가 실수인 척 유두를 노출할 거라고 겁을 줘놓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연습생 이소란입니다. 사실 연습생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민망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이렇게 무대에 다시 오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를 믿어주신 회사 식구들과 앞으로 생길 팬 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데뷔를 해봤던 짬밥이 다르긴 다르구나.
란이는 아이컨택 시절에 제법 큰 무대도 서봐서 그런지 관중의 열띤 반응에도 흥분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지유는 그 긍정적인 호응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감정이 터져버렸는데 말이다.
―이. 이지유입니다. 지. 지금부터 지유의 매력에 빠지실 준비 됐나요? 유. 유후, 유후, 유후♡
―구와아아아아아앜!
이름 삼행시와 세 종류의 애교 표정으로 시작한 지유의 얼굴이 전광판에 크게 나오자 남자들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터져 나왔다.
녀석은 예상외의 큰 반응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 다음 멘트를 하다가 입술이 삐죽삐죽거리더니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저한테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해잉··· 아, 어떡해.
―울지 마! 울지 마!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저한테 이런 기회가···.
―예에, 30초 끝났고요. 다음 연습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MC가 다소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재치 있게 넘겼다.
한창 즙을 짜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다음 연습생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지유의 표정이 대형 전광판에 꽤나 귀엽게 포착됐는데, 관객석도 남녀 할 것 없이 귀엽다는 반응으로 술렁였다.
이것이 덕후몰이에 특화된 십덕십덕 열매(모델 토끼)를 먹은 자의 패시브 스킬이지.
업키걸에 씹대장 꼬북씨바가 있었다면 어글리 더클링에서는 꼬북토끼상 지유가 십덕 포지션이다.
물론 지유를 향한 환호성과 호응에는 어느 정도의 미혼모 동정표가 적용된 걸로 예상이 됐지만, 동정표도 긍정적인 신호이니 뭐···.
또 하나 마음이 놓인 점은 질싸를 안 한지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멘트 중간에 틱이 터지면 어쩌나 걱정을 안 해도 될 만큼 틱 증상이 호전됐다는 것이다.
이어서 라희는 통기타 연주와 함께 ‘분수’의 한 소절을 불렀고, 미오는 테니스 치마를 입은 다리를 쫙쫙 벌리는 고난이도 아크로바틱 댄스를, 규율이는 의외의 성대모사 개인기로 끼를 발휘하며 30초 PR을 마쳤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업키걸이 등장하기에 앞서.
무대가 잠시 정리되는 동안 ‘소녀날다’ TF팀은 연습생들의 무대 녹화 영상을 돌려보며 어덕 멤버들의 평가를 덧붙였다.
TF팀에는 오디션 결과와 관계없이 어글리 더클링은 기존 다섯 명의 멤버로 갈 거라고 결정을 내려주었다. 그 때문에 잠깐 중단됐었던 5인의 조화와 컨셉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큰 화면으로 보니까 지유가 화면 빨이 상당히 잘 받는데요? 눈매 교정만 좀 하면 될 것 같아요.”
“라희는 자작곡 때는 괜찮은데 커버곡 부를 때는 감정이 안 사는 느낌이에요. 댄스곡 부를 때 텐션도 좀 떨어지는 것 같고···. 메인보컬은 란이나 규율이로 가야겠어요.”
“와, 망란이가 메인보컬 후보까지 오르다니.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 뮤노 대표님은 결국 고쳐서 쓰시네요.”
무대와 앨범 컨셉을 담당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칭찬이 민망했던 나는 그저 허허허 하고 웃었다.
“우리 김 대표님 고쳐 쓰기 실력은 거의 네크로맨서 수준이지. 리야도 예토전생 수준으로 고쳐 썼는데 망란이 정도야 뭐.”
나를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해준 현동이는 자기가 다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음, 규율이는 확실히 센터에 섰을 때 확 살아난다. 근데 밸런스랑 비율이 너무 좋아 버리니까 사이드로 빠질 때가 문제네. 다른 애들이 상대적으로 죽는 느낌 안 드나?”
댄스 트레이너 루주가 대답한다.
“피부가 하얘서 더 그런 거 같아요. 규율이가 사이드에 설 때는 미오랑 매치 시키는 게 그림이 제일 예쁘게 빠지겠네요. 미오도 하얀 편이고 일단 키가 되니까요.”
“라희랑 매치 시키는 것도 괜찮을 거 같고.”
“근데 라희는 키가 몇이에요?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보다 좀 큰 거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말을 해줬다.
“회사 들어오고 나서 3센치 컸어요. 지금 165.”
“와, 그럼 165 이상이 세 명이네요? 피지컬은 업키걸한테 크게 밀리지 않네요.”
“트리플 타워 구도는 비슷하죠.”
디렉터가 메모를 하며 의견을 낸다.
“멤버까지 다섯 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비교될 수밖에 없겠는데요. 요즘 제2의 누구누구라는 수식어는 독이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보도자료 쓸 때 그런 표현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 공연 시작한다.”
―팟!
관객들의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던 그때 전광판에 불이 켜졌다.
브라운관 TV 시절에나 볼 법한 노이즈 낀 화면과 함께 5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숫자를 따라 부르며 업키걸의 등장을 기대했다.
―···삼, 이, 일!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큰 재앙이었으나···.
“저거 옛날에 비디오 앞에 나오던 거잖아.”
80년대 이전 생에게는 익숙한 공익광고를 패러디한 영상으로 본격적인 팬클럽 창단식의 막이 열렸다.
아이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VCR만 나온다.
병맛 패러디 영상이 끝난 뒤, 이번에도 8090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대물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어느 날 한국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지구방위대 업키걸!
후레쉬맨 오프닝 주제가와 함께 무대 양 옆에서 한 명씩 등장하는 업나니들.
노래는 후레쉬맨인데 의상은 왜 세일러문인지···.
각자 덤블링과 이단 옆차기 등으로 요란하게 무대 중앙에 모인 녀석들은 5명으로 합쳐져서 기뉴특전대 같은 파이팅 포즈를 취한 뒤 군무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네. 이젠 모두 용사되어 우! (업키방위대) 돌아왔네···.
“이거 은발이 아재 갬성 같은데요.”
은발이 아재는 팬들이 지어준 은빛이의 또 다른 별명이다.
“근데 요즘 10대 20대는 이거 모르지 않나. 진아 씨 이거 알아요?”
20대 초반인 직원에게 묻자 노래는 알고 있단다.
“저희 학교 다닐 때 댄스동아리에서 장기자랑으로 많이 했어요. 쫄쫄이 입고 헬멧 같은 거 쓰고요.”
“큭큭큭, 의상은 세일러문으로 한 거 보니까 지들도 쫄쫄이는 진짜 아니었나 보다.”
업키걸의 팬들은 이미 알고 있다.
병맛도 실력이 받쳐주면 훌륭한 퍼포먼스가 된다는 것을.
업나니들은 후레쉬맨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고퀄 안무를 통해 첫 인사 때부터 어부바 2기의 혼을 쏙 빼놨다.
이후에도 오로지 오늘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와 퍼포먼스로 혜자돌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
―지난 주 우등반에 오른 열두 명의 연습생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왔는데요, 소속사 선배인 업키걸의 팬클럽 창단식 오프닝 무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영상을 통해 보시죠.
두 번째 탈락자가 발생하는 ‘소녀날다’ 세 번째 촬영.
데뷔조 12명과 언더독 11명으로 나뉜 연습생들이 VCR 화면에 집중한다.
영상 속 최고의 1분은 지유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었다.
지유의 마음에 공감한 몇 몇 연습생들도 눈물을 훌쩍였고,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안쓰러워졌다.
하지만 정작 미션 무대에서는 혹평을 들으며 언더독으로 강등됐다.
지유와 함께 라희도 강등이 됐는데, 적당한 긴장감 유발을 위해서인지 심사위원들이 상위권 팀에게는 더 혹독하고 박하게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차피 녀석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긴장감이 들지 않았지만.
―브으으으
촬영이 중반쯤 진행될 무렵 전화가 왔다.
립밤 담당인 김상인 팀장이었다.
나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대표님, 우리 애들 B뮤직에서 프로그램 하나 잡았는데요.
“어떤 거요?”
―‘체인지’요.
“잘 됐네요. 그거 요즘 이슈 좀 되잖아요.”
아이돌 팀끼리 며칠 정도 소속사를 바꿔서 다른 회사의 시스템을 체험하는 관찰 예능이다.
주로 대형기획사와 신생, 중소 회사의 아이돌이 바뀌게 되고, 그 극과 극의 비교 체험에서 오는 괴리감이 재미의 포인트였다.
프로그램 런칭을 할 때 업키걸에게 섭외가 들어왔었는데 일본 투어와 팬클럽 창단식 등의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거절을 했었다.
“저희는 어느 회사랑 바꿔요?”
―로그인레코드요.
B뮤직의 모회사인 JS E&M 산하 레이블 중 한 곳이다.
주로 B뮤직이 주관하는 오디션의 인큐베이터 시스템을 담당하는데, 해당 오디션 출신 가수들이 단기적으로 소속되는 곳이기도 하다.
“로그인에 요즘 누가 있죠?”
―프라미슈 트웰브랑 브이라벨이요.
“아아, 걔네가 거기였지, 참.”
―그런데 제작진에서 섭외 조건을 좀 걸었어요.
“예.”
―하루 정도는 대표님이 현장을 맡아주셔야 할 거 같아요.
“아, 제가요? 매니저로?”
―예. 괜찮으시겠어요?
“잠깐만. 제작진에서 말한 게 아니라 팀장님이 그걸로 먼저 딜을 거신 느낌인데요?”
―하하하하,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에이, 맞네!”
김상인 팀장은 그제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니이, 우리 애들이 요즘 이 프로 재밌다고 잡아달라고 하는데 섭외 대기가 너무 밀려 있다고 하잖아요.
“아아··· 그렇다고 대표를 팝니까.”
―저는 대표님 생각해서 한 거죠. 프라미슈 애들이랑 바꾸거든요.
앗, 아앗···.
걸그룹을 영상이나 음악으로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쫓아다니면서 덕질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로 하여금 ‘이래서 나이 먹고 삼촌 팬이 되는 거구나’라고 느끼게 해준 최초의 아이돌 하늘이가 소속된 팀이 바로 프라미슈12다.
티라미슈 같은 달콤함을 약속하는 열두 명의 소녀’라는 의미의 프라미슈12.
팬들이 부르는 애칭은 프라미.
B뮤직에서 방송된 걸그룹 오디션 ‘걸그룹 베이커리’에서 상위 12위에 오른 열두 명의 소녀들로 이뤄졌다.
그러나 B뮤직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걸그룹 오디션이라는 명성에 비해 실속은 없었다.
기대감 속에서 시작된 ‘걸그룹 베이커리’는 여러 구설수와 미흡한 준비로 인해 혹평이 이어졌고, 데뷔 이후에도 소속사의 버프는커녕 다른 오디션 출신 멤버들로 구성된 브이라벨에게 인기와 화제성이 밀리면서 데뷔 4년차인 지금까지 이렇다 할 히트곡도 없고 그 흔한 케이블 음방에서조차 1위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비주얼은 여전히 경쟁력이 있고 멤버 개개인의 실력도 출중해서 노래 하나만 잘 뽑히면 언제든지 상위 티어로 오를 수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타 팬들도 프라미들의 비주얼만큼은 탑급으로 인정을 하는 편이다.
업키걸, 림밤과 함께 ‘리플레이걸’ 시즌1 출연 동기이고, 그것을 계기로 리야는 지금까지도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물론 리야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에게는 여전히 ‘타도 프라미슈’일 뿐이다.
내가 하늘이 빠라는 것을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걸그룹 베이커리’ 방송 때부터 하늘이에게 줄곧 투표를 했었는데, 그것이 리야에게 걸리는 것도 모자라 방송을 통해 언급되면서 공개 능욕까지 당해버렸다.
내 딴에는 고백해서 혼내주기가 아닌지 걱정이 됐었는데, 다행히 하늘이가 좋게 받아줘서 그 이후로 대국민 공식 하늘덕후가 되어버렸지.
나 때문에 하늘이와 프라미의 인지도가 조금 올랐던 건 팩트.
프라미들이 ‘리플레이걸’에서 탈락을 하던 당시, 나의 허망한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고 그것이 짤방으로 재생산 되면서 여러 커뮤니티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블로그 리뷰에는 거의 필수 짤로 사용됐었고 요즘도 간간히 보인다.
―대표님 최애 아직도 하늘이에요?
김상인 팀장이 피식피식 웃으며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설레긴 하지.
최근 활동 모습을 보니 양갈래 머리때의 사기적인 십덕력은 사라졌지만 살균 눈웃음과 복숭아 같은 과즙미는 여전하더라.
하지만 나는 일부러 삐딱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올뉴데이즈 리브가 좋더라고요.”
―아아, 최애가 어떻게 바뀝니까. 한 번 최애는 영원한 최애 아닙니까?
“됐고요··· 촬영은 언제예요?”
―아직 널널해요. 보자··· 늦어도 다음 주쯤에 들어갈 것 같은데요.
“그게 뭐가 널널해요···.”
―예, 허락하신 걸로 알고 스케줄 잡겠습니다. 제작진한테 컨셉 메일 온 거 보내드릴게요.
내 역할은 급한 일이 생길 예정인 김상인 실장을 대신해서 24시간동안 프라미들의 매니저가 되는 것이었다. 촬영 당일에 한정해서 프라미슈12가 YH소속 가수가 되는 것이다.
< 최애가 어떻게 바뀌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