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리야 비서 캐시(2)-공주님이랑 잤어요? >
팬 미팅을 앞두고 바뀐 리야의 헤어스타일 컬러는 애쉬 브라운과 베이지색 투톤 조합.
중단발 길이의 머리카락은 정수리 부위에서 사과 머리로 반 묶음. 모질 좋은 육구셔테리어를 연상시킨다.
옷은 오프화이트 검정색 후드 티에 짧은 체크무늬 스커트, 흰색 워커.
소매가 길어서 손끝만 살짝 나와 있는 모습이 퍽 귀엽다.
리야는 이런 발랄한 패션을 하고 무시무시한 말을 속삭였다.
“알리야 오늘 캐시한테 혼나고 싶은 거예요. 엉덩이 찰싹찰싹 맞으면서.”
“그게··· 어··· 단순히 혼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지? 침대에서 홀딱 벗고 섹슈얼하게···?”
“응. 캐시 무릎 위에 엎드려서 엉덩이 맞을 생각하니까 넘모 짜릿하자너···.”
굉장하네.
이 놈은 낮이밤져의 화신인가.
이제는 하다하다 자기 비서한테도 조교를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리야는 내 어깨에 턱을 기댄 채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걸 나도 같이 하자고?”
“오브 코오스. 설마 알리야가 으리 없이 혼자 할까봐? 엠퍼러 킹갓뮨댕쓰가 같이 있어야 알리야도 힘내서 혼나지.”
“일단 얼굴 좀 치워봐. 승모근 눌려서 아프잖아.”
“예압.”
리야가 내 어깨에서 턱을 떼던 그때였다.
“What the? are you 진리야? seriously?”
(뭐야? 진짜 진리야 맞아? 이거 실화임?)
클라우디오의 친구 루카스가 알리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친한 척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리야 녀석이 동급으로 대접해주는 남자는 나와 회사사람들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해도 어깨를 끌어안는 스킨십을 허용할리가 없다.
리야의 눈빛에서 살기가 감돌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루카스가 오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리야, Do you know me? 신통방통 루카스! 나도 방송 많이 해서 유명해! 개 반가워!”
“헤이, 알리야 건들지 마.”
나는 리야가 폭발하기 전에 먼저 루카스의 손을 치워내고 리야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녀석은 합장을 하며 어눌한 한국어로 대꾸했다.
“아, 둘이 사귀는 거야? 미안해.”
“뮨댕쓰··· 나 지금 너무 황당해서 눈물이 덜덜 떨리고 손이 나려고 그래···.”
“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흥분하지 마. 일단 일어나자.”
나는 리야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된 루카스가 다시 능글맞은 표정으로 리야의 손목을 붙잡는다.
“헤이, 내가 미안해. 암 쏘리. 오늘 내가 술 살 테니까 가지 말고 놀자. 파리 투나잇!”
이 미친 놈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서 언성이 높아져버렸다. 영어로 다시 한 번만 알리야 몸에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면서 양키의 손목을 세게 쥐어 비틀었다.
“에이씨, 애 몸에 손대지 말라니까! 돈 터치!”
“헤이, 컴다운. 알았어···.”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도 사태를 파악했다.
테이블 끝에서 내 동기와 대화를 하고 있던 장우가 황급히 이쪽으로 온다.
그리고···.
―짝!
루카스의 뒤에서 나타난 캐시가 놈의 뺨을 냅다 후려치며 소리쳤다.
“Are you crazy? What the hell are you doing?”
(정신 출타했어? 이게 뭐하는 개짓거리야!)
그녀는 클라우디오에게 루카스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나도 동기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리야, 장우, 캐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으로 내려왔다.
내가 에스코트하고 있는 리야의 어깨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것이 고장난 압력밥솥처럼 부들부들 요동치고 있었다.
“리야, 괜찮아?”
“캐시가 안 때렸으면 내가 때렸을 거야. 후우우···.”
“그래, 잘 참았···.”
“그러게 왜 이런데 와서 그런 꼴을 당해요!”
캐시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문자 그대로 공주님 모시듯이 금이야 옥이야 보필하던 캐시가 리야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고, 서열관계가 확실한 둘의 관계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캐시도 앞선 상황에 너무 화가 나서 평정심이 무너졌다는 뜻이겠지.
“캐시 지금 알리야한테 화내는 거야?”
“예, 화내는 거예요.”
“헐.”
리야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캐시는 기세를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공주님, 제가 진짜 공주님이 불편해서 오시지 말라고 한 거 같아요? 물론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런 일이 생길까봐 걱정돼서 그랬던 거예요. 대표님이랑 장우 팀장님이 옆에 계시다고 해도,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좋아지면 선을 넘는 사람이 분명히 나오니
까요. 공주님도 서양 남자들 이러는 거 잘 아시잖아요. 쟤들 눈에 비친 공주님은 그냥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꼬실 수 있는 귀엽고 유명한 동양 여자일 뿐이에요. 우리나라 남자들이랑은 사고방식의 디폴트 값이 다르다고요.”
“알았어. 이해했으니까 화내지마. 그리고 장우 팀장님은 이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숙소로 안 가시고요?”
장우는 내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고, 리야는 캐시에게 당한 화풀이를 장우에게 하듯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알리야 오늘은 호텔에 가서 캐시랑 얘기 좀 해야겠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호텔로 픽업하러 와.”
리야의 예민한 태도에 캐시도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한다.
리야는 깐깐한 사장이 매출이 떨어진 이유를 묻듯, 내게도 명령조로 말했다.
“뮤노 대표님도 남아.”
“나?”
“응. 할 얘기 있는 거예요.”
영악한 너구리 같으니라고.
결국 캐시랑 그거를 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뭐, 장우 입장에서는 일찍 들어가면 좋기는 하겠지만.
나 역시 은근한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과연 캐시가 리야의 엉덩이를 때려줄까······?
“장우야 먼저 들어가.”
“형 차 가져오셨어요?”
“안 가져왔어. 너네는 뭐타고 왔어?”
“롤스요. 저기 밑에 유료주차장에 댔어요.”
“그래, 그거 니가 타고 가.”
“예,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장우는 혹시라도 리야가 말을 번복할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벗어났다.
캐시가 그제야 리야에게 묻는다.
“호텔로 들어가시게요?”
“응. 오랜만에 캐시랑 얘기 좀 하려고. 뮨댕쓰랑 셋이서 와인 한 잔 하자.”
“저 위에 친구들 있는데···.”
“응. 뮨댕쓰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인사하고 내려와.”
캐시는 친구들을 두고 어떻게 가냐는 뜻이었지만, 리야의 자기 멋대로 갑질 화법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
“나도 동기들 있는데.”
“뮨댕쓰는 전화로 해도 되자너. 분위기 보니까 다들 여자한테 정신 팔려서 뮨댕쓰 따위는 없어도 될 것 같던데 뭐.”
“아니아니, 그래도 캐시랑 나랑 동시에 빠지면···.”
“쓰읍, 어디서 말대꾸야. 혼나고 싶어?”
“아니···.”
캐시는 결국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도 챙기러 갈 겸 루프탑으로 다시 올라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리야에게 물었다. “진짜 하려고?”
그러자 녀석은 산책 나가는 개처럼 한껏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뮨댕쓰, 나 아까 캐시한테 혼나는데 보자이너가 붐붐 거렸어.”
“아··· 그래서 표정이 그랬던 거야?”
“응,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역시 캐시는 S쪽에 자질이 있다니까.”
“근데 난 솔직히 자신 없어. 캐시가 싫다고 하면 어쩌게?”
“돈 워리. 알리야만 믿어. 알댕쓰가 밥상 차려놓고 착착 떠먹여줄 테니까 주인님은 냠냠 하고 받아먹기만 하는 되는 거예요.”
***
결국 나와 캐시는 리야의 호텔 스위트룸으로 입텔했다.
캐시는 순진하게도 할 말이 있다는 리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룸서비스로 와인을 주문했고, 우리는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서 빨간색으로 잔을 채웠다.
억지로 끌려온 캐시의 표정은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리야가 기죽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는다.
“캐시는 내가 불편하구나. 나는 캐시랑 언니 동생처럼 지내고 싶은데···.”
“제가 일을 그만두면 당연히 그렇게 지낼 수 있죠. 공과 사는 구분해야 되잖아요. 공주님은 제 고용주예요.”
“그럼 캐시는 알리야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당연하죠.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 하루는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 캐시가 나를 불편해한다는 말 듣고 조금 충격 받았자너. 나는 이제 캐시랑 편하게 술도 한 잔하고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공주님이랑 저 사이에 지켜온 룰이 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 정도의 불편함은 제가 공사를 구분 지을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바리케이트고요.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공주님 아까 제가 화냈
을 때 기분 안 좋으셨죠?”
“어 리틀빗···.”
“거봐요. 아까는 제가 순간적으로 화나서 그런 거지만, 제가 공주님을 편하게 대하면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래, 알리야도 아까는 조금 당황스러워서 표정 관리가 안 됐던 거야. 그런데 나쁘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오늘을 계기로 캐시와 나의 관계가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
“제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공주님은 제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시는 거예요?”
“말했자너. 언니 동생처럼 지내고 싶다고.”
캐시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나쁜 표정 같지는 않았다.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대표님 만난 이후로 우리 공주님이 진짜 많이 변하셨네요.”
“좋은 뜻이죠?”
“좋은 뜻이죠. 아까 사카코로나에서 있었던 일만 봐도, 예전 같으셨으면 거기 사장님까지 불러서 무릎 꿇리셨을 걸요. 루카스 걔는 자기 나라로 추방됐을 거고요.”
“그랬겠죠.”
캐시는 리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공주님을 동생처럼 편하게 대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건 공주님과 저의···.”
“그러니까 오늘부터 조금씩 변하면 된다고!”
캐시의 말을 끊은 리야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러고는 남아있는 와인을 비어있는 잔에 한 방울도 남긴 없이 따라버리고는 빈병으로 만들었다.
“캐시와 알리야가 좀 더 친해지길 바라는 뜻으로 게임하자, 게임!”
드디어 쓰리썸 중개사 리야의 설계가 시작됐다.
녀석은 테이블의 가운데를 치우고 거기에 빈병을 눕히고 돌릴 준비를 했다.
“주둥이가 가리키는 사람이 진실게임 하는 거야. 노코멘트면 마시는 거.”
그러고는 캐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병을 돌렸다.
주둥이는 나를 가리켰고, 리야가 거침없이 질문을 한다.
“뮨댕쓰 욘나 언니 좋아하지? 대표랑 아티스트의 관계 말고, 남자 대 여자로.”
이놈 이거 노빠꾸 리얼인데?
캐시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오늘 진짜 갈 데까지 가보자는 뜻이었다.
여기서 내가 답변 거부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리야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캐시의 미간이 희열로 들썩인다. “어머, 진짜요?”
“캐시 타임. 답변에 대한 질문을 하려면 한 잔 마시고 해.”
“저도 질문권 하나 있는 거 아니에요?”
“아, 그렇구나. 그럼 해.”
그러자 캐시는 망설임 없이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뭐··· 좋아하기는 숙소생활 할 때부터 좋아했죠.”
“와, 저는 진짜 몰랐어요.”
“자, 자, 궁금한 게 있으면 다음 번 질문에서 하세요. 아니면 한 잔 마시고 계속 물어보든가. 뮨댕쓰가 걸렸으니까 이번에는 뮨댕쓰가 돌려.”
리야의 막힘없는 빠른 진행에 분위기는 금세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병을 돌렸고, 이번에도 주둥이는 내 쪽을 향했다.
“아놔, 나한테 무슨 꿀을 발라놨나···.”
캐시와 리야가 박수를 치며 웃었고, 이번에도 리야가 먼저 질문을 했다.
“뮨댕쓰, 빛빛 언니 좋아하지? 당연히 남자 대 여자로.”
이 새끼 봐라?
캐시 앞에서 나를 국가대표 허벌남으로 만들 셈인가.
하지만 노코멘트를 해봤자 긍정의 뜻이니, 나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어···.”
그러자 질문의 요점을 파악한 캐시의 노련한 질문이 이어졌다.
“대표님 업키걸 멤버들 다 여자로 좋아하죠?”
“네···.”
“어머, 대박이다!”
그때 리야가 자기 앞에 있는 잔 하나를 비워내고는 내게 곧바로 다음 질문을 날렸다.
“뮨댕쓰 욘나 언니랑 잤지?”
이제야 리야의 큰 그림이 보인다.
녀석은 캐시를 오늘 하루 일회성으로 활용할 생각이 아니었다. 캐시에게 우리의 비밀스런 사생활을 모두 오픈한 뒤, 그것을 계기로 캐시 역시 자신의 하렘 아일랜드 안에 담을 생각인 것 같다.
캐시가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앞에 있는 와인 잔을 비웠다.
어차피 노코멘트는 암묵적 긍정의 표시.
캐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자신의 잔을 원샷으로 비워낸 뒤, 오늘 모임의 주제를 관통하는 필살기 질문을 날렸다.
“공주님이랑도 잤어요···?”
나는 리야에게 말했다.
“리야야, 술 하나 더 따야겠다.”
“대박···.”
두 잔 연속 풀샷으로 마신 나는 다시 병을 돌렸다.
보즈르르 돌아가던 병의 주둥이가 멈춘 곳은 캐시 앞이었다.
왔다.
나는 처음부터 빠꾸 없는 필살기 질문을 날렸다.
“캐시는 성 판타지가 뭐예요?”
캐시의 판타지는 여자 한 명과 다수의 남자가 주고 박는 갱뱅.
오늘 자리와는 관계없는 플레이지만, 이 질문의 출제 의도는 그녀의 솔직함을 끌어내고 분위기를 19금 쪽으로 돌리는 데에 있다.
물론 그녀가 갱뱅 또는 n썸이라는 자신의 판타지를 그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판타지라는 게 여러 개일 수 있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 30대 중반의 커리어우먼은 자신의 판타지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듯 정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자기도 이런 대화가 썩 재미있다는 듯 정확한 인원수까지 말해주면서 말이다.
“저는 남자 여럿이랑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한··· 다섯 명 정도?”
리야의 질문이 이어진다. “캐시는 뮨댕쓰랑 섹스할 마음 있어?”
“오 마이 갓.”
“당연히 뮨댕쓰는 할 마음이 있고, 하고 나서는 서로 아무런 뒤끝도 없어. 뮨댕쓰가 섹스하자고 하면 할 거야?”
“아뇨, 안 해요.”
어라, 이 여자 봐라?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진실게임에서 감히 거짓말을 해?
분홍색 아우라와 나에 대한 호감도 B라는 절대적인 증거가 있는데?
< 알리야 비서 캐시(2)-공주님이랑 잤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