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시랑 그거 하자, 그거 >
영문 풀네임은 캐서린.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카락.
무채색의 핏감이 딱 들어맞는 명품 정장.
특색 없는 검정색 힐.
똑똑하고 세련된 커리어 우먼.
남들 앞에서는 딱 부러지는 비서, 리야에게는 다정한 보모.
지금은 리야를 대신해서 호텔의 경영을 배워나가고 있는 전무이사.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캐시의 이미지였다.
라운지 바 스테이지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능숙하게 춤을 춘다는 건 캐시에게서 좀처럼 생각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어깨와 허리가 훤히 드러난 오프숄더 크롭티와 스키니진, 형형색색의 나이키 스니커즈도 캐시와는 거리가 먼 아이템이었고.
나를 알아본 뒤 눈웃음을 지으며 밝게 인사하는 표정도 사뭇 낯설어서 나는 잠시 ‘캐시의 쌍둥이 자매인가?’하고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를 단번에 알아본 걸 보면 캐시가 확실했다.
“대표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저는 캐시가 더 의외인데요. 와···.”
내가 의상을 쳐다보며 감탄하자 그녀 역시 자신의 모습이 내 앞에서 보이던 평소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아, 하며 민망한 눈웃음을 지었다.
“친구들이랑 스트레스 풀러 왔어요. 평범한 직장 여성의 소소한 일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캐시가 평범한 직장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좀.”
34세 오스칼 호텔 전무이사가 평범한 직장 여성은 아니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쉿, 너스레를 떤다.
억양과 제스처의 기본 텐션 자체가 상당히 높았다. 테이블 위에 보드카 세트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걸보니 기분 좋게 술이 오른 것 같다.
캐시는 뒤에 있는 일행들에게도 영어를 섞어가며 나를 소개했고, 그들 역시 서양식의 풍부한 표정과 리액션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남자는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백인이었다.
얼굴이 왠지 익숙해서 자세히 보니···.
“어, 혹시 클라우디오 아니에요?”
“오, 맞아요! 나 알아요?”
“그럼요, 알죠.”
요리 프로그램이 한창 유행하던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이탈리아 쉐프 클라우디오였다.
그가 유창한 한국어로 대꾸한다.
“나도 그쪽 알아요. 프로그램 많이 봤어요. 케이팝 걸그룹 매니저.”
“예, 맞아요.”
캐시가 이제는 CEO라고 정정해주자 축하한다면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부딪치는 힙합식 인사를 건넨다.
가까이서 보니 배우 포스가 물씬 풍긴다.
이게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태리 미남의 클라스.
라틴계 특유의 선 굵은 이목구비, 뺨을 수북이 덮은 수염, 떡 벌어진 어깨는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더 멋들어졌다.
다른 일행은 다 한국인이었는데 이름은 영어식으로 불렀다.
남자는 캐빈, 여자들은 제시, 린다, 그리고 은빛이의 음부 이름과 똑같은 제니.
여자들의 외향과 말투에서는 교포느낌이 났다. 교포가 아니라면 캐시처럼 영어권 나라에서 생활을 오래한 것 같다.
튀지는 않지만 세련된 옷차림과 여유와 풍요가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미뤄 다들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올라있는 친구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캐시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나를 연예인처럼 대접해줬고,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인사가 끝나자 캐시가 내게 묻는다.
“대표님은 누구랑 오셨어요?”
나는 내 일행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도 친구들이랑 왔어요. 예전에 같이 일하던 회사 동기들이요.”
동기들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캐시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인사를 했고, 다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그러자 아래턱이 상당히 발달하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린다가 그쪽을 향해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우리랑 같이 놀아요! 컴온, 컴온!”
그렇게 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두 명의 유부남과 한 명의 상폐남으로 구성된 놈들로서는 낯선 여자들과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유부남 두 명은 우선 클라우디오와 인증샷을 찍어서 와이프들에게 보내며 알리바이부터 만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시 일행들의 친화력이 너무 좋아서 술이 몇 잔 돌면서 대화가 이어지자 어느새 처음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저 세상 텐션으로 다 같이 어우러졌다.
나는 무엇보다 캐시의 이면에 놀랐다.
남자들한테 카톡 답장 잘 안 해줄 것 같은 도도한 이미지의 그녀가 그 누구보다 말을 많이 하고 깨 방정을 떠는 것이었다.
나도 덩달아 흥이 올라서 캐시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캐시 원래 이렇게 잘 놀아요? 저는 캐시 안 지 4년 정도 됐는데, 이런 모습 처음 봤거든요.”
그러자 다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입 모아 대답한다.
그들은 오히려 일을 할 때의 캐시 모습을 궁금하다며 내게 되물었다.
“캐시는 자기 관리 잘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표본이죠.”
그렇게 말한 뒤, 남자한테 카톡 답장 잘 안 해줄 것 같다는 농담까지 덧붙여주자 다들 발까지 다닥다닥 구르면서 자지러졌다.
내 옆에는 은빛이 음부의 이름을 한 제니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 역시 내 어깨를 탁탁 때리면서 까르르륵 웃었다.
“카톡 답장 잘 안 해줄 것 같대, 대표님 너무 위트 있어요!”
얘 봐라.
여자가 웃을 때 남자의 어깨를 터치하는 것이 끼를 부리는 스킬이자 여우 짓이라고 했던가.
맨 정신으로 봤을 때는 ‘그냥 여자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술이 조금 들어가서 그런지 꽤 귀여운 구석도 있는 것 같다.
분홍색 아우라이니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원나잇도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캐시의 친구라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교미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이 모임을 통틀어도 마찬가지다. 다들 성격 좋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내가 굳이 섹스를 감행할 정도로 끌리는 여자는 없었다.
외모로 따지면 단연 캐시가 원탑이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비서에서 벗어난 일상의 그녀는, 물 만난 인어공주처럼 생명력과 여성미가 넘쳐흘렀다.
그 이중적인 반전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리야의 비서라는 배덕감은 화룡점젖.
물론 나만의 상상이다, 상상.
나는 캐시에게 넌지시 물었다.
“리야도 캐시 이런 모습 알아요?”
미간을 귀엽게 찡그리며 대답한다.
“음, 모르시죠.”
“그럼 만났다는 말 하면 안 되겠다.”
“아녜요, 상관 없어요. 그리고 제가 벌써 말 했는데요? 친구들이랑 놀러왔는데 대표님 만났다고요.”
“아, 그래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그새 리야에게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잠시 뒤 내게도 리야의 톡이 왔다.
알댕쓰 [캐시 만났다며]
나 [ㅇㅇ 친구들이랑 이태원 왔는데 웬 여자가 미친 듯이 춤추고 있어서 봤더니 캐시야ㅋㅋㅋㅋ]
알댕쓰 [ㅋㅋㅋㅋㅋㅋㅋ]
알댕쓰 [알리야도 가도 돼?]
나 [으응? 여기 온다고?]
알댕쓰 [왜? 알리야가 가면 안 되는 으슬으슬한 장소인 거야?]
나 [아냐. 그냥 평범한 루프탑 바야. 와도 상관은 없는데 진짜 온다고?]
알댕쓰 [ㅇㅇ 연습 끝나고 가면 1시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나 [캐시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친구들이랑 편하게 노는 자리에 회사 사장님이 합석하는 거잖아]
알댕쓰 [캐시랑 알리야는 그런 사이 아니야. 캐시도 좋아할 거야!]
나 [너랑 캐시 사이를 모르는 건 아닌데, 아무리 친해도 업무 시간 외에 직장 상사를 만나는 건 아무래도 좀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불편할 거 같은데]
알댕쓰 [그런가. 캐시한테 전화해서 직접 물어봐야겠다]
“당연히 불편하죠. 오지 마세요.”
코쓱, 씨익, 이래야 캐시답지.
리야는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
캐시 일행과 합석을 한지 1시간 정도 지났을까.
5명 이상의 무리가 모이면 으레 그렇듯, 시간이 흐르자 하나로 뭉쳤었던 분위기가 다소 산만해지면서 삼삼오오 분산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동기들은 겉돌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잘 어울렸다. 캐시 일행과 몇 명씩 짝을 지어서 흡연을 하러 가는가 하면, 각자의 직업에 대한 어른의 대화를 하거나 클라우디오에게 방송 뒷얘기 썰을 물어보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또 다른 테이블에 있던 클라우디오의 외국인 친구들이 우리 테이블을 왔다 갔다 하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클라우디오처럼 예능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얼굴도 있었는데, TV에 나오는 외국인들끼리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 있어서 한 다리 건너 다 친하다고 한다.
리포터로 유명한 미국인 루카스는 한국여자가 너무 좋다고 대놓고 말하면서 라운지에 있는 여자들 모두에게 말을 걸 기세로 껄떡거리고 다녔다. 나 알죠? 나 신통방통 루카스예요, 라고 자기가 먼저 말하고 다니면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캐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클라우디오에게 영어로 말했다.
“I really hate him.”
클라는 미투라고 대답하면서도, 오래 알고 지낸 뿌렌드라서 어쩔 수 없다고 그녀를 다독였다.
캐시는 친분은 존중하나, 적어도 우리 테이블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딱 잘라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루카스가 있는 곳을 쳐다보며 말을 한다.
“저는 저 사람 진짜 싫어요.”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흐흐흫,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클라우디오가 분위기를 띄우려는지 “에이, 뮤노 형! 마셔!”라며 잔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뿌렌드라고 불렀는데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알고부터는 형이라고 부른다. 나도 말을 놓기로 했다.
“뮤노 형, 원샷, 원샷. 다 마시고 머리에 털어.”
“푸흡,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너 완전 한국남자 같아.”
“그럼 나도 한남이야?”
“아니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캐시도 그제야 웃으며 잔을 들었다.
“같이 한 잔 해요 대표님.”
가운데로 모이는 세 개의 잔.
챙, 챙, 기분 좋은 건배소리.
캐시와 나의 손이 살짝 부딪쳤고, 그녀의 S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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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윤희
―나이 : 35
―키 : 165cm
―몸무게 : 52kg
―나에 대한 호감도 : B
―성욕 : B
―성 개방지수 : A
―성 판타지 : 갱뱅
―핀 포인트 : 옆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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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뱅. 그래. 누구나 이 정도의 판타지는 있지. 성벽 존중.
나는 애써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술잔을 입에 댔다. 그리고 바로 뿜었다.
“큽!”
우리는 옥상에 위치한 테이블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리야와 장우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입에 댔던 술잔을 내려놓자 캐시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오 마이 가앗. 내가 진짜 미치겠다···.”
비현실적인 리야의 등장에 아래층과 계단 입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집중되며 웅성웅성 난리가 났다. 그리고 계단 중간쯤 오른 장우가 나와 캐시를 발견하고 손가락질 했다.
“저기 계시네요.”
“뮨댕쓰! 캐시!”
주저 없이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척을 하는 리야.
당황한 나는 캐시에게 복화술로 물었다.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아··· 공주님 성격 아시잖아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거···.”
“뮨댕쓰! 캐시이!”
음악 소리를 뚫고 루프탑 허공으로 치솟는 리야의 생목소리.
방송을 통해 리야와 나의 케미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각자 대화를 하고 있던 동기들도 리야를 알아보고는 미리부터 일어서서 영접할 준비를 한다. 사람 눈이 진짜 하트로 변하는 구나. 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내가 아직 샐러리맨이던 시절에는 회사 회식자리에 제희가 등장해서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제희의 인기를 뛰어넘는 현역 탑 걸그룹의 멤버가 나타났으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크으, 플랜엘에 이어서 업키걸까지 소환하는 김윤호 씨 클라스 죽이네.”
“형, 고마워요.”
난리가 난 건 캐시 친구들도 마찬가지.
“어머, 진짜야? 진짜 알리야 맞아?”
“와아, 너무 이쁘다.”
“얘들아, 우리가 잠깐 잊고 있는 게 있는데, 저 사람은 걸그룹이기 전에 캐시 보스야···.”
계단 중간쯤에 오르던 리야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장우에게 귓속말을 한다.
장우는 다시 계단 밑으로 내려갔고, 리야 혼자 루프탑으로 올라왔다.
그래도 나는 내심 반가웠다. 동기들 앞에서 체면이 서기도 했고.
하지만 캐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야를 쳐다봤는데, 리야도 캐시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변명부터 날렸다.
“아 왜! 알리야는 뮨댕스 보러 온 거야!”
“하아···.”
캐시의 냉랭한 반응 때문에 테이블 분위기가 조금 삭막해지던 그때.
라운지 바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소리가 페이드아웃으로 줄어들더니 이내 DJ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사카코로나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저희 가게에 YH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업키걸의 아버지 김윤호 대표님이 와 계시는데요. 김윤호 대표님께서 여러분들의 불금을 위해 골든 벨을 울리셨으니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켜진 음악과 함께 페스티벌 현장처럼 터지는 손님들의 환호성 소리.
당연히 리야의 작품이었다.
캐시는 망나니 공주님을 누가 이기냐는 투로 고개를 흔들면서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그렇게 물에 불린 미역처럼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여자 손님들이 우리 테이블을 자유롭게 오가며 리야, 클라우디오와 사진을 찍었다. 물론 나도 클라우디오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고.
그렇게 팬 미팅 같던 분위기가 웬만큼 정리되고 난 뒤, 리야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내게 소곤거렸다.
“뮨댕쓰, 이따가 캐시랑 그거 하자, 그거.”
“그거? 그게 뭔데······.”
< 캐시랑 그거 하자, 그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