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격의 리더 >
―김소영 기자님, 2017년 4월 7일에 소온 홈페이지 엔터테인먼트 카테고리에 이런 제목의 기사를 쓰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아이돌도 사람이다.’ 에이텐션 마약 사건과 관련해서 쓰신 기사인데 기억하시죠?
진짜 청문회 분위기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검증을 받아야 할 대상자가 오히려 질문자를 조지고 있다는 것.
규율이에게 집중돼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김소영 기자에게 향한다.
규율이가 말한 기사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 제목과 김소영 기자의 얼굴에 오만잡상이 깃든 걸로 미뤄 쓰리에스 쪽에 왕창 편향된 기사였던 것 같다.
말을 잇지 못하는 김 기자를 대신해서 규율이가 판결문을 읽듯 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사람은 실수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대학에 다니고 사회화 과정을 좀 더 거쳐야 할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연예계라는 정글에 내던져져서 밤낮 없이 일만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욱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에이텐션의 스캔들 같은 경우, 잘못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면 한 번 정도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자세가 아닐까? 라고 끝맺으셨고요. 그 밖에도 같은 해인 5월 14일, 7월 1
일, 9월 5일, 이듬해 2018년 1월 21일······.
미쳤네.
규율이는 마치 조선시대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시대별로 암기하듯이, 김소영 기자와 SONE이 작성한 에이텐션 옹호 기사를 모두 외워왔다.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혹시 쇼케이스에 참석하는 기자님들 명단 같은 거 있어요? 멤버들이랑 예상 질문 리스트 뽑고 있는데 기자님들 성향 좀 알려고요.’
이틀 전 내게 했던 부탁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제작간담회가 무슨 정치 청문회도 아니고, 기자의 성향 같은 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의도가 있었을 줄이야.
“저 친구는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하고 준비한 거 같은데. 혹시 회사에서 시킨 건 아니죠?”
강 기자가 의심쩍다는 투로 내게 물었다.
기사의 내용은 그렇다 쳐도 작성 날짜까지 줄줄이 외우고 있으니 누구라도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 만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도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처음부터 한 방 먹이려고 작정하고 나온 사람 같네. 작은 거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성격인 거 같은데 대표님 골치 좀 아프시겠어요.”
“이 정도 돌발 행동은 업나니 애들한테 워낙 단련이 돼서 뭐···.”
“아아. 대표님이 업키걸 매니저 출신이었다는 걸 잠깐 까먹었네요.”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돌발 행위가 단련이 될 턱이 없었다.
강 기자야 구경꾼의 입장이니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무대 위 설전을 지켜보고 있지만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규율이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연출되기를 작정을 하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김소영 기자와 SONE에서 작성했던 에이텐션의 마약 스캔들과 관련된 옹호성 기사를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그녀를 자승자박의 구렁텅이로 완전히 내몰았다.
기사의 주어를 에이텐션에서 란이로 바꾼다면 방금 김 기자가 란이에게 했던 사생활 관련 질문은 모순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뭐 이쯤 되면 모순이니 논리니 하는 것들을 언급할 가치도 없겠지만.
―기사를 통해, 잘못에 응당 하는 죗값을 받았으니 이제는 용서를 하고 가수로서의 탤런트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수차례 말씀하셨던 분이 바로 김소영 기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처럼,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 이소란 연습생은 가수로서 대중들께 평가 받기 위해 다
시 시험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뿐입니다.
김소영 기자는 규율이가 아닌 과거의 자신에게 반박당하며 완전히 찢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 자신만의 굴욕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다른 기자들의 얼굴까지 먹칠을 해버린 꼴이었다.
반면 숙소에서는 젊은 꼰대 같은 면을 보이며 융통성 없는 모습을 보였던 규율이는 자기가 그렇게 부정하고자 했던 란이의 과거를 오히려 감싸주면서 팀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란이는 ‘저 언니 어울리지 않게 왜 저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꼽다기보다는, 자기 대신 싸워준 규율이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김소영 기자가 맞든 틀리든 간에, 연예인이 기자와 척을 지는 것 자체가 무조건 손해라는 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란이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밖에.
―예, 마치 장관 후보 청문회장을 방불케 하는 두 분의 질의응답 잘 들었고요. 이거 무서워서 끼어들지를 못하겠네요.
규율이와 김소영 기자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달궈진 장내의 분위기는 전성모 MC가 매듭을 잘 지으며 끊어주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김소영 기자를 최대한 배려해주는 멘트를 통해 그녀가 명예로운 퇴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김소영은 오늘은 자기가 참는다는 표정으로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자리에 앉았다. 자기합리화와 정신승리를 하는 마음의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에휴, 이러니 연예부 기자들이 무시를 받지.”
강도형 기자는 자기는 마치 저널리즘으로 무장된 고고한 기자라는 듯 혀를 찼다.
겉으로 보면 규율이의 압승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강 기자처럼 일반적인 직업윤리를 가진 기자라면 김소영 기자의 인지부조화를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데뷔도 하기 전인 햇병아리 연습생이 나름 경력이 있는 기자를 가둬놓고 패버린 것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는 부류 또한 분명히 있다.
기사의 노출을 위해서라면 자극적인 어그로와 날조까지 불사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규율이처럼 튀는 캐릭터는 떡밥으로 쓰기 딱 좋은 케이스였다. 그들이 맘먹고 단합한다면 신인 하나 골로 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벌써 떴네.”
강도형 기자가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간담회 현장의 기사가 하나 둘씩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고 있었는데, 그가 예상했던 타이틀 그대로의 기사가 떡 하니 올라와 있었다.
―――――――
<‘프라우들리24: 소녀날다’ 12번 연습생, “인성보단 재능이죠.”>
[엔터NS=정용민 기자]
13일 오후 강남구 윈저 팰리스에서 ‘프라우들리24: 소녀날다’ 쇼케이스 간담회가 진행됐다.
[사진]
이번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12번 연습생이 당당한 눈빛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12번 연습생은 “연예인에게 재능과 인성 중 뭐가 중요하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인성이 나쁘다고 해도 실력이 좋으면 가려진다.”라고 답하면서 연습생답지 않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현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
돌려 까고 앉아 있네.
사진도 안 예쁘게 나온 걸 올렸다.
OSEN이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 올린 기사라는 점이 더 열 받는다.
“에이, 진짜 너무들 하네···.”
내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리자 강도형 기자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위로를 해준다.
“기자라는 인간들이 100명이나 모였는데 어떻게 다 좋은 기사만 나오겠어요. 아시잖아요.”
“그래도 꼭 잔칫날에까지 와서 이래야 되냐고요.”
강 기자는 기사 작성자가 누구인지 아는지, 프레스석 한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양반이 원래 좀 까칠해요.”
“친해요?”
“그냥 오다가다 얼굴 아는 정도죠. 원래 사회부 쪽에 쭉 있다가 문화부로 미끄러진 지 얼마 안 된 양반인데, 삐딱하고 꼬아서 보는 게 저널리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에이, 정치인이나 힘 있는 양반들한테나 좀 그렇게 삐딱하게 하시지, 맨날 만만한 게 연예인이야.”
“안 그래도 삐딱하게 예민한 문제 건드렸다가 쫓겨났다는 게 정설이에요.”
“어이고, 참 기자님이셨네···.”
“큭큭큭.”
―안녕하세요, 엔터NS 정용민 기자입니다.
갸앗. 삐딱한 양반이 이번에는 질문자로 나섰다.
뒷모습만 봐도 엄청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20번 이지유 연습생에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아니, 하지 마.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요즘 뉴스에 많이 오르내리는 모 남자 아이돌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미혼모라는 말인데요, 걸그룹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그 치명적인 리스크를 뛰어넘을 만한 본인만의 무기가 있습니까?
올 게 왔다.
나는 행사 진행 팀과 MC를 향해 팔로 X를 그리며 질문을 막아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다행히 전성모가 나를 발견했다.
―잠시만요. 이제부터 프로그램과 관련 없는 사적인 질문은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제가 대신 답변해드려도 될까요?
이번에도 규율이가 손을 들며 대신 나섰다. 그러자 녀석을 향해 카메라 셔터음이 무차별적으로 터졌고, 그 압도적인 집중도가 베테랑인 전성모의 진행 능력까지 흐리게 만들면서 결국 규율이와 정용민 기자의 질의응답을 허용해버렸다.
―정용민 기자님은 미혼모를 사회악으로 보십니까?
규율이는 이번에도 대전제를 공략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정용민 기자는 과거의 자신에게 당해버린 김소영과는 레벨이 달랐다.
그 역시 규율이와의 설전을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질문을 받아들였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가 보호해줘야 할 취약계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미혼모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은 아직 부정적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 중에서도 특히, 아이돌을 향한 대중과 팬덤의 잣대는 더 깐깐하죠. 제가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입니다.
―대중과 팬덤의 잣대라고 하셨는데요. 죄송하지만 그 잣대의 근거가 되는 자료가 있을까요?
―예? 무슨 자료요?
―대중이나 아이돌 팬덤이 미혼모 아이돌을 안 좋게 바라본다는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나 통계 같은 것들이요.
―사회 통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죠.
―예, 물론 미혼모를 안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이혼을 한 사람이나 결혼적령기가 지났음에도 혼인을 하지 못한 노총각, 노처녀 등을 들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부정적인 시각이라는 게 사회통념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합
니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요즘 시대에서는요.
진짜 설득력 쩐다.
조별과제에서 같은 팀이 된다면 팀원들이 마음 놓고 뻘짓할 수 있을 것 같은 타입이다.
내가 놀란 점은,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했던 정용민 기자조차도 말을 하는 중간 중간 버벅거리거나 생각을 정리하려는 틈이 보였는데, 규율이는 사전에 발표 연습이라도 해온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술술 풀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기승전결을 갖춰서 말이
다.
김소영 기자 때와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 규율이는 자신의 의견을 보강하기 위한 추가 발언을 덧붙였다.
―만약 이지유 연습생이 엄마로서 아이를 방치했다거나 양육을 포기했다면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유는 아이 아버지가 외면하고 부모님들조차 반대했던 아이를 혼자 낳아서 미혼모 시설에서 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돌이 되려던 자신
의 꿈을 포기했고, 스무 살 여자로서의 삶도 포기했습니다. 같은 꿈을 꾸던 아버지라는 사람은 데뷔를 해서 승승장구했고요. 지유는 그 사람의 앞길에 혹시라도 피해가 될까봐 아기 아빠가 누구인지 비밀로 하는 건 물론이고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기 위해서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던 아이입니다.
빨려든다.
마치 규율이에게 핀 포인트 조명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현장의 모든 이목이 녀석에게 집중됐다.
지유 본인을 포함해서, 지유의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몇 몇 연습생들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들거나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렇다고 지유가 시설에만 의지한 것도 아닙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독립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던 시기에 저희 대표님을 만났고, 지유의 재능을 알아봐주신 회사의 지원을 통해 안정적으로 아기
를 케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연락이 끊겼었던 부모님과 화해를 해서 본가에서 아기를 돌봐주고 계시지만, 그 전까지는 하루에 세네 시간 밖에 못자면서 육아와 연습을 병행했던 아이입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지유는 누구보다 좋은 엄마였고 누구보다 열
심히 했던 연습생입니다.
여기서 결국 지유는 참지 못하고 눈물 즙을 터뜨렸다.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떨군 녀석을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다독여준다.
―이런 사정을 알고도 이지유 연습생에 대해서, 미혼모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낳아놓고 방치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문제지 미혼모 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저는 시청자와 팬 분들께서 이제라도 되찾은 지유의 꿈을 응원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규율이의 최종 발언이 끝났다.
그리고 일반 관객석에 앉은 한 여자가 “저도 응원할게요.”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박수의 물결이 번져나갔다.
***
<덕기자의 십덕쿵덕 : ‘프라우들리24: 소녀날다’, 대박? 쪽박? 우선 기대는 된다>
CDS―강도형 기자
운이 좋았다.
어제 하루 종일 검색어 상위권에 올라있던 ‘프라우들리24: 소녀날다’의 역사적인 제작간담회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1인이다.
연예부 기자로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서 이제는 신인그룹 쇼케이스에도 가지 않는 내가 데뷔조차 않은 연습생들을 보러 간 것은 순전히 김윤호 대표에 대한 의리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한낱 샐러리맨에 불과했던 김윤호 대표와 업키걸의 사연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나는 그런 김 대표가 업키걸 후속으로 제작하기 위해 모은 24개의 원석들이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24명 모두가 빛나지는 않았다.
오디션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그저 그런 범인(凡人)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디션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그 수많은 자갈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미래의 보석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걸그룹 덕질 12년차 기자의 촉을 예리하게 자극한 예비 보석들을 몇 명 꼽아 보았다.
<진격의 예비 센터, 12번 연습생 정규율>
지성, 미모, 실력 3박자를 고루 갖춘 서울대 출신의 10년차 연습생이다.
내로라하는 대형기획사에서 유망주라 불리면서도 좀처럼 데뷔의 기회를 잡지 못했던 소녀가 이번에는 제대로 물을 만났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여유로운 나머지 기성으로 오해를 사기도 할 만큼 보컬과 댄스, 무대매너의 밸런스가 너무 좋았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더 날카로운 현답으로 베어버리며 기자들의 기를 죽이던 포스가 당분간 기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진격의 리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