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란이vs씹선비 >
규율이가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란이는 진짜 탕수육 위에 소스를 다이렉트로 부을 기세였다.
음식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이건 부먹찍먹이나 식성을 떠나서 상호간의 예의 문제 아닌가.
그래도 규율이가 욱하면서 정색하자 란이는 바로 움츠러들면서 합장을 하며 사과했다.
“아··· 죄송함다, 죄송함다.”
“그걸 왜 상의도 안 하고 부으려고 해?”
란이가 한 발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규율이는 이유를 들어야겠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자 란이도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톡 쏘는 어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아이컨택 때는 다들 부먹이라서 버릇이 돼서 그랬어요.”
“그리고 같이 먹는 탕수육은 상식적으로 찍먹이지. 부먹하려면 개인 접시에다가 따로 덜어서 하면 되는 거고.”
사과 했으면 그냥 넘어가면 될 걸, 규율이 얘도 참 친구 없을 스타일이다.
규율이가 계속 정색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거지 같아졌다.
다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지유만이 부단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탕수육을 집어 먹고 있었다. 마치 부먹찍먹으로 싸우는 시간에 하나라도 더 집어 먹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는 듯 말이다.
애송이들아, 이게 바로 아이 가진 엄마의 생활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표정이 확 싸늘해진 란이가 다시 언쟁의 불씨를 살렸다.
“왜 찍먹이 상식이에요? 그건 언니 상식이고요. 아이컨택 숙소에서는 부어 먹는 게 상식이었거든요.”
“그럼 상식의 뜻을 다시 배워야겠네.”
규율이가 깐깐한 과외 선생처럼 설명을 시작한다.
“니가 말하는 아이컨택 숙소에서의 부먹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특성에 따른 특별 케이스고, 내가 말하는 상식이라는 건 일반적인 지식과 견문을 가진 사람들이 보편적인 사리분별로 판단하거나 알아야 하는 통념과 지식을 말하는 거란다.”
“네네, 뭐 그렇다고 치고요. 그래서 제가 사과했잖아요.”
“그래. 나는 그냥 이유를 물었을 뿐이야.”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 시작된 건가.
이런 분위기 참 오랜만이다.
업키걸 숙소에서 서원이와 홍이의 대립 구도가 떠오른 나는 비실비실 새어나가려는 실소를 꾹 참으며 짜장면을 비볐다.
업키걸 합숙 초기에는 애들끼리 소소하게 신경전을 벌일 때마다 내가 다 조마조마하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는데, 그것도 몇 년 겪다보니까 팝콘을 먹으면서 관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였다.
그 결과, 애들은 싸우면서 크고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년 가까이 저마다의 생활 방식으로 떨어져 살던 애들이 한 집에 붙어사는데 어찌 갈등이 안 일어날 수가 있을까.
제희와 플랜엘 멤버들이 해체를 한 지금까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숙소생활을 할 때 치열하게 싸우고 그 싸움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컨택과 업키걸로 두 번의 숙소생활을 경험했던 요나 역시 아이컨택 때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로 서로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터뜨리지 못한 것을 꼽았고, 그래서 업키걸 때는 언니들과의 신경전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보이그룹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돌 명가 KU엔터의 두 팀을 들 수 있다.
명실상부 1세대 아이돌의 원탑이라 불리는 ‘H5’가 서로를 너무 배려한 나머지 대화를 하지 못하고 오해가 쌓여서 팀이 해체된 반면, ‘레전드림’은 장수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데뷔 초부터 치고 박고 쌍욕하고 싸웠지만 그 덕에 갈등이 바로바로 해소돼서 지금까지도 함
께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몇 년 전 이벤트성으로 재결합 공연을 했던 H5 역시 아이돌그룹은 자신들보다 차라리 레전드림처럼 지내야 한다고 인정해주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란이와 규율이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이건 단순히 두 사람만의 싸움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머지 세 명이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에 따라서 팀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단 지유는 먹기 바쁘다. 일단 1인1식으로 확보된 짜장면은 비벼두기만 한 상태에서, 공공재인 탕수육부터 야무지게 집어넣고 있다. “으음, 좆맛탱부랄털털···.”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라희는 부모님의 부부싸움 사이에 낀 아이처럼 누구 편도 들지 못하고 잔뜩 위축돼 있다.
막내라인인 지유와 라희는 오히려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둘째인 미오다.
미오 녀석이 세대 간의 중간다리이자 중재자 역할을 해줘야 한다.
리더는 원래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위치인 반면, 멤버들은 리더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둘째인 미오가 외로운 리더를 위로하고 동생들을 다독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다.
미오가 사회경험도 풍부하고 눈치도 있는 녀석이기 때문에 잘 하리라고 믿는다.
“와, 다 큰 어른들이 고작 탕수육 하나 가지고 너무 유치하네···.”
란이의 혼잣말에 규율이가 고개를 흔들면서 반박한다. “으응, 고작 탕수육이 아니지.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로서의 배려이자 규칙의 문제야. 나는 리더로서 당연히 그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위치고.”
“그래요 알았어요. 앞으로 탕수육 소스 안 부을게요. 됐죠? 어우, 유치해.”
“유치한 게 아니라니까?”
“에잇, 첫날부터 분위기 왜 이래요.”
마침내 미오가 나섰다.
녀석은 내가 굳이 나서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미오는 아직 포장지도 벗기지 않은 규율이의 짬뽕 랩을 직접 벗겨주고 젓가락까지 짝 갈라서 손에 쥐어주었다.
“언니, 면 불기 전에 일단 드세요.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란이 너도 그만 기어오르고.”
“어휴, 가방끈 짧은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네.”
오오, 란이가 결국 파국을 택했다.
선을 완전히 넘은 란이의 발언에 미오가 진지하게 화를 내며 표정을 구긴다.
“야, 너 미쳤어?!”
그러자 규율이가 오히려 미오를 만류하며 란이를 풀어줬다.
“아냐, 그냥 놔둬.”
엄마가 마트에서 때를 쓰는 아이를 교육하듯이 팔짱을 끼고 무심한 시선으로 란이를 쳐다보며 말한다.
“어디 계속 해봐.”
“뭘 해요. 고등학교 중퇴 나부랭이가 위대하신 서울대느님을 말빨로 어떻게 이기겠어요.”
“으응, 학력의 문제가 아니지. 상식과 통념, 사람간의 기본적인 예의 문제라니까 왜 자꾸 포인트를 놓치니.”
“누가 보면 학교 선생님인 줄.”
“감정적으로 빈정거리지 말고 논리적으로 반박해야지. 어른답게.”
“하하핳, 참나···. 살다살다 탕수육 소스 하나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그래서 내보고 뭐 어쩌라고요?”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규율이의 태도에 헛웃음 섞인 한탄으로 응수한 란이는 사투리 억양으로 받아쳤다. 진짜 흥분했다는 소리다.
“사과해도 싫다,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하는데도 싫다, 언니가 원하는 게 대체 뭔데요?”
옳지. 이번에는 규율이가 한 방 먹었다. 란이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지금의 규율이는 마치 군대에서 마음에 안 드는 후임을 갈구는 선임과도 같았다.
죄송합니다. -> 죄송하면 군 생활 끝이냐?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 변명하지 마.
란이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인데 절대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언니, 제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안 든다고 하세요. 괜히 이상한 걸로 트집 잡아서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마시고요. 고삐리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는 그게 아니라 앞으로 같이 살면서···.”
“됐고요. 제가 그냥 방에 가서 먹을 테니까 탕수육을 찍어서 드시든 볶아서 드시든 알아서 마이 드세요.”
“야, 너 말버릇이 그게 뭐야?”
“저는 논리고 뭐고 잘 모르니까요, 제가 싫으면 차라리 욕을 하시라고요.”
크으 치열하다, 치열해.
중재를 하려고 했던 미오도 결국 포기한 눈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고 있는 두 동생을 챙긴다.
“라희야 빨리 먹어, 먹어. 어휴, 지유는 알아서 잘 먹네. 배 많이 고팠구나?”
“예, 먹는 게 남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밥상머리 앞에서 그만 싸워 오라 질 년들아! 아, 어떡해. 죄송합니다···.”
란이에게 명치 카운터를 맞은 규율이의 시선이 애꿎은 지유에게 향한다.
“너 방금 그거 틱 아니지.”
“예···?”
“틱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상황에 딱딱 맞춰서 나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그게··· 그럴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는데······.”
지유는 잔뜩 쫄아서 말꼬리를 흐렸다.
의심은 가지만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한 정곡을 규율이가 확 찔러버린 것이다.
틱 판별사인 내가 보기에도 방금 그거는 93.7%의 확률로 틱이 아니긴 했다.
기가 팍 꺾인 지유는 입 안에 있는 탕수육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송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진짜 틱이 터졌다.
“섹스! 씹! 떡! 교미 더 머니!”
그래, 바로 이 느낌이지.
위화감 없이 쩍쩍 달라붙잖아? “자위 도시락 김윤호! 매일 밤마다 대표님 이름 부르면서 클리토리스 박박 문질러! 얍얍얍!”
“큽···!”
란이가 터졌다.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둘째 언니 같은 표독스런 눈빛으로 규율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꼭 누구 얘기 같네. 우리 중에 대표님 이름 부르면서 딸딸이 치는 사람이 누굴까아···.”
그 말을 들은 규율이의 하얀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란이를 향해 눈을 흘기며 “야.”하며 부른다.
“예?”
“그만해.”
“뭘 그만해요?”
“그만 하라고.”
“왜 그러세요, 저는 제 얘기 한 건데요.”
“뭐?”
“저 매일 밤마다 대표님 이름 부르면서 딸딸이 치거든요. 근데 왜 언니가 정색하시냐고요.”
“정색하긴 누가 정색해. 밥 먹는데 그런 얘기하는 거 더러우니까 하지 말라고 한 거지.”
“언니는 성이 더러워요?”
“밥 먹을 때 할 만한 얘기는 아닌 거 같은데.”
“섹스가 더럽다고요?”
“어, 나는 더러워.”
“하, 어이가 없어서···.”
망란이놈, 마치 가족 욕이라도 들은 것 마냥 불타기 시작한다.
“그럼 섹스로 태어난 언니도 더러운 존재겠네요?”
“그거랑 그거랑 같아?”
“언니 앞으로 섹스 안 하고 사시겠네요? 더러운 거는 피해야 되니까요, 맞죠?”
“응, 평생 안 할 건데?”
논리적이던 규율이가 결국 초딩이 됐다.
란이는 마침내 자기가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는 듯 비소를 띄며 되물었다.
“태어나서 자위 한 번도 안 해보셨죠? 성은 더러운 거니까요.”
“됐다, 그만하자. 유치하다.”
“4번 연습실에서 대표님 이름 부르면서 딸딸이 치던 게 누구였···.”
“야아앜! 너 미쳤엌!?”
어잇, 깜짝이야.
규율이는 소리를 꽥 지른 것도 모자라서 손에 쥐고 있던 나무젓가락 한 쌍을 란이에게 던지기까지 했다.
란이는 눈만 살짝 감았을 뿐 결코 피하지 않았고, 그 중 하나가 이마에 맞았다.
가소롭다는 듯, 한 쪽 입 꼬리를 삐죽 올리며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러고는 탕수육을 한 움큼 집어서 규율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자존심 강한 규율이는 눈도 감지 않고 그대로 맞아주었다. 녀석의 반격은 짜장면이었다. 옆에 있던 미오의 짜장 그릇을 잡고 란이에게 그대로 던졌다.
이것만큼은 안 되겠던지 란이는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가드했다.
“꺅!”
란이 옆에 있던 지유는 옆으로 피하면서 1틱을 외쳤고.
“엄마야, 노숙자들한테 동전 대신 보지를 적선해주세요!”
라희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으며.
“히잉, 왜들 그래요오···.”
미오는 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하아, 이 사람들이 진짜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대표님, 제가 알아서 해도 돼요?”
“응. 미오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 때리지는 말고.”
“예, 폭력은 안 쓰겠습니다. 죄송한데 라희랑 지유 좀 방에 데리고 가주세요.”
그렇게 말한 미오는 짜장을 뒤집어 쓴 란이의 뒤에서 목을 조르며 초크를 걸었다.
“이게 어디서 리더한테 개겨.”
“아읔, 언니 숨 막혀요···.”
양쪽 다리로는 허벅지를 휘감으며 함께 바닥에 눕는다.
왼손으로는 목을 계속 조르면서, 오른손을 란이의 반바지 속으로 집어넣는다.
“하윽!” 질 안에 손가락을 넣은 모양이다.
란이는 곧바로 몸을 비틀어대면서 행복에 겨운 소리를 질렀다.
“꺄하하하핰, 어니, 보지, 보지 간지러워요!”
실로 퍽커다운 진압 방법이구나.
미오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란이를 혼냈다.
“규율이 언니한테 대들 거야, 안 대들 거야.”
“아! 아! 아! 아! 언니, 아윽···!”
······혼내는 거야, 보내는 거야···.
< 망란이vs씹선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