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란이 처녀막 터지는 소리 >
규율이가 서류봉투를 가지고 내가 있던 호텔로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에서 녀석의 하얀 피부와 바비 인형 같은 비율은 단연 눈에 띄었다.
오늘 스노쿨링을 한다더니, 이제 막 마치고 숙소에 들어갔었던 건지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고 모자를 썼다.
옷은 형광색 민소매 티에 숏팬츠, 쪼리 차림이다. 발톱에는 바다색과 비슷한 페디큐어를 칠했다.
꾸벅 인사를 하며 서류봉투를 건넨다.
“어, 고마워. 지민이는 어떻게 된 거야?”
“수영장 바닥에 넘어져서 기절했었나 봐요.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병원 가봐야 될 것 같아요. 구토 증상이랑 어지럼증 있대요.”
“아···.”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지금 미팅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자료만 주고 얼른 나와야겠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나 5분 안에 나올 거니까 잠깐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
“아니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딱 부러지게 거절한 녀석은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단순히 5분을 기다리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우리 관계는 딱 여기까지라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평소였다면 나 역시 안 붙잡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떻게든 녀석과 함께 우리 숙소로 들어가서 미오와 이정아의 스킨십 장면을 목격시켜야만 했다. 혹시 같이 못 가더라도 미오가 이정아를 공략할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끌어줘야 한다.
나는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이모님은 어디 계셔?”
녀석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대표님 숙소요.”
“넌 어디로 갈 거야?”
“일단 이모한테 전화해보려고요.”
내게 도망치기라도 하듯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이거 생각보다 더 꽉 막힌 놈이네.
녀석이 하도 철벽을 치니까 나까지 어려워지려고 한다.
나는 애써 실소를 흘리며 우리 회사 연습생들을 놀리듯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원래 걸음이 이렇게 빠른 편이야?”
“예.”
“너 나한테 뭐 죄지은 거 있지?”
“예? 아니요.”
“근데 왜 자꾸 도망가?”
“도망가는 거 아닌데요. 원래 걸음이 빨라요.”
“에이, 아닌데. 어제 식당에서부터 계속 내 시선 피하던데 뭐.”
“······.”
“혹시 내가 불편해? 우리 회사에 계속 들어오라고 해서?”
로비 입구 회전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녀석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불편합니다.”
“아, 진짜 그런 거야···?”
“대표님이 저 도와주신 건 진짜 감사드리고요, 평생 감사하면서 살 거예요. 그런데 그걸 저희 관계의 고리로 삼아서 회사 들어오라고 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서 머리 식히려고 온 여행인데, 여기에서까지 일 얘기 듣는
거 솔직히 많이 지쳐요.”
“아··· 내가 그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미안하다.”
“저희 이모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저도 대표님 진짜 좋은 분이신 거 아는데 공적인 관계로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적인 관계로 만날 수는 없잖아? 나는 니가 꼭 우리 회사 아니더라도 앞으로 활동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아, 일 얘기 듣기 싫다고 했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미팅 잘 하시고요.”
“규율아, 근데 너 우산 가져왔냐?”
나는 핸드폰만 덜렁 들고 있는 녀석의 손을 보며 바로 말을 이었다.
“안 가져왔네. 밖에 비 오는데.”
“어···.”
하늘이 돕는구나.
현재 우기인 발리에는 스콜이라 불리는 열대성 소나기가 하루에 한 두 차례 불어 닥치는데 마침 그 분이 찾아오셨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않은 채 호텔 앞에 지나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호텔 처마로 들어온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우산과 우비를 파는 삐끼들이 렉카처럼 몰려왔다.
“잠깐 기다려봐, 내가 우산 사올게.” “아니에요, 조금 기다리면 그칠 거예요.”
“그래도 몇 십분 기다려야 되잖아.”
나는 규율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비 밖으로 나갔다.
고작해야 15살 정도 돼 보이는 현지 남자애가 우산과 우비를 흔들며 제일 먼저 달려왔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봤는지 바로 한국어로 말한다.
“형 멋있어. 우산, 우비 내가 제일 싸.”
나도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물었다.
“우산 두 개 얼마예요?”
“10만 루피아. 내가 제일 싸.”
“두 개 줘요.”
“오케이, 형 멋있어. 내가 제일 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계산하려는데 뒤에서 규율이가 “노노노!”하며 다가온다.
그러고는 내 손에서 소년의 손으로 넘어가려는 지폐를 확 낚아채며 내게 묻는다.
“얼마래요?”
“두 개에 10만 루피아라는데.”
가격을 들은 규율이가 한 대 때릴 듯한 기세로 소년을 노려본다.
“뭐어? 겁나 바가지네! 대표님, 하나만 사요.”
“어?”
“이쁜 누나, 두 개 사, 두 개. 내가 제일 싸. 아이 러브 케이팝. UTB 좋아해.”
“UTB는 나도 좋아하는데 아닌 건 아니지. 젖스 깁미 원, 1만 루피아 오케이?”
“이쁜 누나, 나 하나도 안 남아요. 한 개 3만 루피아.”
“그럼 안 사.”
“왜 안 사. 비싸?”
“어, 비싸도 너무 비싸잖아. 나 호구 아니다.”
“오케이, 이쁜 누나 호구 아니다. 2만 루피아.”
“노노, 1만. 에눌 없어.”
에눌 없다는 말은 파는 사람이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고, 이 우산 팔이 꼬맹이 놈이 1개에 2만까지 줄 수 있는 걸 나한테는 5만으로 부른 거잖아.
내가 여기 여행을 온 게 아니고 티케팅도 급하게 하는 바람에 현지 물가를 잘 모르고 왔는데 제대로 호구 잡힐 뻔 했다.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생 정도 되는 애가 비 쫄딱 맞으면서 우산 하나 팔려고 하는 게 안쓰러워서 나는 4만 루피아를 건네며 두 개를 달라고 했다. 그래봤자 우리나라 환율로 하면 1개에 2,000원도 안 된다.
하지만 규율이는 얄짤 없었다.
내가 건네려는 돈을 다시 가로채더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1만 루피아를 건네고 결국 한 개만 샀다.
규율이가 아니면 10만에 2개를 팔 수 있었던 소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같은 표정으로 다른 관광객을 향해 뛰어갔다.
내가 그 뒷모습을 씁쓸하게 쳐다보자 규율이가 어린애 가르치듯 말한다.
“이런 건 원래 75%정도는 깎아야 돼요.”
“그래도 이런데 오면 어느 정도 알면서도 당해주는 맛도 있어야지···.”
“대표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계속 피해를 보잖아요.”
“미안하다···. 근데 왜 하나만 샀어.”
“저 여기 있을 테니까 일 보고 오세요.”
“아, 같이 쓰고 간다고?”
“두 개 사는 건 아깝잖아요. 숙소가면 널린 게 우산인데···.”
“어, 알았어. 쫌만 기다려.”
나는 로비 안으로 들어가 규율이가 안 보이는 곳에서 3분 정도 시간을 끌었다.
미오에게 따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잘 되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다시 나왔을 때 규율이는 핸드폰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고,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대로였다.
길 건너에 있는 꾸따 비치는 바다가 아니라 검은 장막처럼 물들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얼쏴아아아아!
“와, 엄청나게 오네. 우산 줘, 내가 들게.”
“예.”
우산을 펴고 보니 나 혼자 쓰기에도 작은 사이즈다.
나는 귀빈 에스코트를 하듯이 오른손에 쥔 우산을 최대한 규율이 쪽에 붙이며 한 발을 내디뎠다.
“가자.”
“이쪽이에요.”
“아, 그쪽인가? 가자.”
―귀두두두두둑! 호텔 현관에서 벗어나자마자 빗줄기가 굉음을 내며 우산을 때린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몸의 왼쪽 면이 홀딱 젖었다.
그런데 규율이도 딱히 우산의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작은 크기도 크기지만 녀석이 나와 몸이 부딪치는 것을 의식하는지 계속 바깥쪽으로 벗어났기 때문이다.
“야, 이쪽으로 들어와. 다 젖는다.”
“아니에요, 대표님 쓰세요. 저 어차피 안에 수영복 입어서 괜찮아요.”
“에헤이, 옷이 문제가 아니라 감기 걸릴까봐 그러지. 이런 날씨에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이 상태로 가면 우산을 산 의미가 없는데?”
“머리만 안 젖으면 돼요.”
“너 지금 머리도 젖으려고 그러니까 안쪽으로 오라고. 아니다, 지금이라도 하나 더 사자. 그냥 각자 쓰고 가.”
“아니에요, 사지 마세요.”
그깟 우산 얼마나 한다고 악착같다 진짜.
정규율은 그제야 내 쪽으로 조금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팔과 팔의 맨살끼리 살짝 부딪치자 흠칫 놀라며 다시 멀어진다. 아예 튕겨져 나가듯 우산 밖으로 삐져 나갔다.
그 순간 내 눈에는 우리가 있는 인도 쪽으로 물살을 뿌리며 달려오는 택시가 보였다. 왕복 2차로였는데 배수시설이 안 좋아서 거의 얼굴 높이의 흙탕물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 규율아, 이쪽으로 와.”
“꺅!”
나는 규율이를 끌어안으며 반대로 등을 돌렸다. 그 바람에 우산도 떨어뜨렸다.
하지만 물은 튀지 않았다.
택시가 우리가 나왔던 호텔 로비 앞에 멈춰선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던 규율이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깜짝 놀라서인지 추워서인지, 이내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다.
“아··· 차가 이쪽으로 오면서 물 튀길 줄 알았는데 저기 앞에서 멈췄다.”
내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고 차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설마 내가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해서 불쾌해진 건가?
나는 끌어안았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저만큼 날아간 우산을 주워 와서 다시 녀석에게 씌워주며 사과했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그 사이 규율이의 낯빛은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몸의 떨림도 심해졌고 호흡도 불규칙해졌다.
혹시 내가 모르는 지병이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심장이 약하다거나 호흡기 또는 혈압, 혈당 같은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보라색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규율아, 어디가 안 좋아···? 혹시 병 같은 거 있어?”
대답이 없다.
작전이고 뭐고, 이 순간만큼은 녀석의 몸 상태가 제일 걱정이 됐다.
C컵 후타가 돼도 상관없으니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빨리 가자.”
내 재촉에도 녀석의 발은 땅에 뿌리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 살짝 내리깐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중인 듯 보였다.
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뚝 끊긴 대화 속에서, 제희가 터뜨린 시오후키와도 같은 청량한 빗소리만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분수와아아아아!
잠시 뒤, 뭔가 마음 속에서 결정이 났는지 규율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고는 따지듯이 묻는다.
“대표님 저한테 무슨 짓 하셨죠?”
“어?”
“혹시 제가 먹은 음식에 약 같은 거 타셨어요?”
움찔!
뭐, 뭐지?
혹시 미약 커피가 걸린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게 무슨 수로 걸려.
나는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제가 이럴 리가 없거든요. 지금까지 이런 적도 없었고요.”
“무슨 말이냐고.”
“하아···.”
뭔가를 포기하거나 내려놓은 사람의 한숨이었다.
모자를 벗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 미쳤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비소를 지으며 아랫입술을 한 차례 잘근 깨문다. 섹시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 하고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똘끼 있어 보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녀석의 입에서 개뜬금포가 터졌다.
“저 대표님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으응?
이게 무슨 망란이 처녀막 터지는 소리?
“어? 갑자기?”
“예, 저도 제가 이해가 안 돼요.”
“아니, 너랑 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다고. 혹시 내가 너한테 뭐 헷갈리게 한 거 있어?”
“없습니다.”
“당연히 없지. 나는 사람 마음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 혹시 방금 전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니요.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한국에서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어제도 일부러 대표님한테 쌀쌀 맞게 대한 거였는데···.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설마 미약 때문은 아니겠지···.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사전에 어떤 징조가 보였다면 모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 한파처럼 쌀쌀 맞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의아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너 혹시 금사빠야?”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그런 스타일은 아닌데.”
“제가 비 때문에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냥 미친 애가 헛소리 했다고 생각해주세요.”
“암튼 일단 들어가자. 정신은 나갔는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몸 상태는 확실히 안 좋아 보인다.”
“······이모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내가 그렇게 입이 싼 사람은 아니지.”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생각하던 그때 전화가 왔다.
벨소리를 듣자마자 뭔가 쌔한 느낌을 들었는데 발신자는 이정아였다.
예정대로라면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오면 안 되는 건데······.
“여보세요?”
―대표님 어디세요?
“저 지금 규율이랑 같이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 빨리 오셔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잔뜩 흥분돼 있었다.
< 망란이 처녀막 터지는 소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