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를 잡히면 꼼짝을 못해 버렷! >
“뮨댕쓰 진짜 스고이자너. 아, 이건 칭찬인 거예요.”
리야가 조수석에 자리 잡은 뒤 처음 건넨 말이었다.
느와르 영화에서 이중첩자를 잡아내기 직전의 똥줄 타는 긴장감이 흐른다.
꿀꺽···.
내 인생에서 이보다 식겁했던 적이 있었던가.
나를 이렇게까지 긴장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던가.
3수생 신분으로 치렀던 수능도, 훈련소 입소 첫날도, 취업 면접장에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할 때도, 첫 출근 날에도 이것보다는 덜 긴장했으리라.
“바로 어제 홍홍 언니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는 휴식기 없이 바로 컴백이라니. 정말 섹노는 뮤스머신인 것이야?”
이것은 19세 소녀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녀석의 억양과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무게감은 어마어마했다. 사람을 부려본 계층에서 나오는 특유의 지배력이 공기를 압도하면서 나를 꾹꾹 찍어 내리고 있다. 실제로 발끝이 저릴 정도로 말이다.
내가 이런데 란이는 어떨까.
―달달달달달달
나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는 란이는 텍사스 연쇄살인마에게 감금이라도 된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어댔다. 턱까지 다닥다닥 떨린다.
평상시에도 자기보다 어린 리야를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무서워하던 녀석이었으니 지금 느끼는 공포와 압박감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무엇보다, 리야는 아직 란이를 우리 식구로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아이컨택 시절 요나의 뒤통수를 친 울분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란이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내가 나서서 수습을 해야만 했다.
“리야야, 내가 지금은 말 못할 사정이 있는데 나중에···.”
“응? 아냐, 아냐.”
내 말을 끊은 리야가 의외의 말을 꺼낸다.
“알리야 지금 뮨댕쓰한테 화난 거 아니니까 설명할 필요 없어. 란이 언니쓰도 긴장 풀어도 되는 거예요.”
“예? 아, 예···.”
듣고 보니 그렇다.
내게 화가 난 거였으면 뮨댕쓰라는 애칭조차 안 썼을 것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한데 일단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 안심······.
“하지만 다른 언니쓰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알리야랑은 다른 반응을 보이겠지?”
알병할 놈, 니가 그러면 그렇지.
녀석의 의중을 알아차린 나는 단도직입적인 협상테이블을 차렸다.
“알았다. 애들한테 말하지 않는 대가로 원하는 게 뭐야.”
“잠깐만, 녹음 좀 하고.”
“후우···.”
“란이 언니쓰는 이제 가 봐도 되는 거예요.”
“예? 아뇨, 저도 대표님이랑 같이···.”
“아냐, 란아. 너는 올라가. 무대 준비해야지.”
“아···.”
“괜찮아, 올라가 빨리.”
“그럼 저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란이는 내가 아닌 리야에게 인사를 했고, 리야는 아랫사람을 격려하듯 답했다.
“오늘 좋은 무대 기대하는 거예요. 모두가 다 No라고 할 때 언니쓰를 믿어준 우리 뮨댕쓰랑 욘리다를 위해서라도.”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저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준비했어요.”
“열심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대한민국 연습생 중에서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건 그렇죠···.”
역시 망란이 잡는 데는 리야가 최고긴 한데 너무 팩트로 후려 패니까 딱하다.
나는 직접 차 문을 열고 녀석을 떠밀었다.
“란이 빨리 가. 이러다 진짜 늦어.” “예.”
리야는 란이가 차에서 내린 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란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혀를 차며 비아냥거린다.
“으이그, 꼴에 자기 새끼라고 감싸주는 거 봐.”
“란이 요즘에 열심히 한···.”
“뮨댕쓰 견찰서 가고 시퍼! 불명예 검색어 1위에 오르고 시퍼!”
“아, 깜짝이야···.”
“잘한다, 잘해. 이러니 서원 언니쓰가 정조대를 사려고 하지.”
“뭐? 정조대?”
“그래. 다나카 아조씨한테 남자 정조대 물어보더라. 그것의 주인이 누구겠어?”
아··· 한서원 미쳤다 진짜.
내가 잠시 너를 잊고 있었구나.
“그건 그런데 뮨댕쓰 눈이 이렇게 낮은 남자였어? 그 많은 탑스타들 놔두고 왜 연습생이랑 이러는 거야?”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서원 언니쓰한테 현재 상황을 알리기 전에 당장 말해야 할 것이야.”
“하아··· 알았다.”
나는 리야가 믿든 안 믿든, 란이와 교접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퍽커니 반인족이니 하는 초자연적 현상은 뺐고, 편의를 위한 약간의 각색도 거쳤다.
란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섹스중독자인데(팩트), 얘가 나를 좋아한다(거짓). 그래서 나랑 섹스를 하고 나면 한동안은 중독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팩트).
오늘 이 자리에서 꼴사나운 짓을 한 이유도 갑자기 금단증상이 도져서 월말 평가를 볼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거짓), 라고 해명을 하자 수용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리야랑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벌써 스섹중독이라니, 스고이.”
“란이는 진짜 섹스가 너무 좋대. 그러면서도 증오한대.”
“어딕션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자너. 알리야는 다 이해해. 알리야도 뮨댕쓰를 볼 때 그런 마음··· 야잇 멍청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CEO인 랑깡깡이 컨트롤을 어? 잘 했어야지! 그래, 안 그래! 알리야 말이 맞아 안 맞아!”
귀여운 놈.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얘기하려다 아차 싶으니까 괜히 횡설수설 화를 내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애교로 넘어가줘야지.
“그래,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지. 그래도 어쩌냐.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끄고 봐야지.”
“뮨댕쓰도 참 어렵게 산다, 어렵게 살아. 이럴 거면 그냥 우리 매니저나 다시 하던가.”
“거절.”
“으휴, 정조대를 차봐야 정신을 차리지.”
“알았으니까 빨리 원하는 걸 말해. 나도 올라가봐야 돼.”
“오케이, 알리야의 위시리스트는 다섯 가지야.”
“뭐야, 왜 그렇게 많아!”
“멤버 당 하나씩이자너. 그걸 받아들이는 건 뮨댕쓰 마음이니까 알아서 초이스해.”
멤버 한 명에게 말을 안 하는 대가가 소원 하나이니, 그 중에서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리야는 그것을 ‘제5심판대’라고 이름 붙였다.
“잠깐만, 근데 너는 이해한다며. 그럼 네 개여야지.”
“응, 이해는 해. But 용서는 다른 개념이자너.”
“알았다, 알았어. 말해.”
녀석은 다섯 개의 소원을 읊어나갔다.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한 녀석답게 미리 생각을 해두었는지, 멤버들의 성격에 따라서 밸런스 조절을 잘 조절해놓았다.
당연히 서원이에게 알리지 않는 대가로 바라는 것이 가장 강했다.
―제1심판대 ‘씨바지옥’ 소원 : 12월 31일에서 1월1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아침까지 스케줄 비워두기.
“그건 쉽지. 오케이.”
―제2심판대 ‘집착의 늪’ 소원 : 파트너가 누가 됐든 앞으로 섹스를 할 때는 무전기 착용하기.
“야, 그건 상대방 사생활도 있는데 당연히 안 되지.”
“그럼 거절?”
“거절. 압도적인 거절.”
“알았어. 그럼 서원이 언니한테는 란이 언니랑 스섹한 거 말한다?”
“아니, 잠깐만··· 생각 좀 하고.”
“삼십초 줄게, 스타트. 삼십, 이십구, 이 십팔 랑깡깡, 이십칠···.”
하아, 환장하겠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서원이한테 알려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은빛이나 홍이는 순진무구 순두부 멘탈상 큰 충격을 받을 것이고, 욘나는··· 무섭다. 그냥 무섭다.
하지만 서원이는 당장은 화를 내겠지만 그 화가 오래가지 않고 뒤끝이 없다. 애가 또 의외로 빙구미와 찐따미가 있고 귀도 얇은 스타일이지.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던 제희의 말빨에 넘어가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괜히 업키걸 서열 꼴찌가 아니다.
내가 설명을 마친 뒤에 잘해주면 쏠랑 넘어올 것이다.
“그래, 서원이한테는 말해. 아무리 생각해도 도청은 아니다.”
“···알리야가 낭낭하게 기회 줄 테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녀석은 내가 서원이를 가장 무서워할 줄 알고 제일 센 소원을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리니 당황스럽겠지.
“아냐. 번복 없어.”
“제법인데···?”
“근데 너 변태야? 왜 자꾸 남의 성생활을 엿들으려고 그래.”
“누, 누가 변태야! 알리야는 단지 응? 그 뭐냐······.”
“너 지금 일단 질러놓고 변명거리 생각하는 거지?”
“셧업! 옳지, 알리야는 단지 우리 CEO가 왜곡된 성욕 때문에 인생을 망칠까봐 미리미리 데이터를 모으고 점검을 해두는 거지. 지금 뮨댕쓰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야?”
“알았다, 그렇다고 치자.”
―제3심판대 ‘리더의 왕좌’ 소원 : 앞으로 1년 간 알리야를 공주님처럼 떠받들고 말 잘 듣는 개처럼 절대 충성하기.
“절대 충성이면 거의 치트키잖아? 밸런스 붕괴야. 니가 무슨 짓을 시킬 줄 알고.”
“그래서 싫다고? 욘리다한테 말한다?”
“어, 말해.”
“아아, 맞다. 랑깡깡은 아직 욘리다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그래, 알았어. 욘리다한테 말할게. 어디 한번 신세계를 경험해봐, 크크큿.”
어? 이놈이 이렇게 강하게 나가는 걸 보면 뭔가가 있다는 뜻인데.
나는 잽싸게 말을 바꿨다.
“아냐, 요나한테 말하지 마. 말 잘 듣는 개처럼 충성할게.”
그건 지금도 뭐 어느 정도 그러고 있는 거니까···.
“그럼 이제부터 존댓말 써. 말끝에는 꼭 공주님 붙이고.”
“예, 예. 알았습니다, 공주님.”
“발가락부터 싹싹 핥아.”
“뭐 인마?”
“좆크, 좆크. 그럼 제4심판대인 ‘육덕 식당’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예, 공주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홍홍 언니랑 스섹을 할 것.”
이건 포상인데?
“오케이, 접수입니다 공주님.”
“단, 어제처럼 무전기 차고.”
“우리 리야 공주님, 안 놀릴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관음증 있으시죠?”
“쓰읍! 어디 충성스러운 댕댕이가 마스터한테 질문을 하지? 예쓰인지 노인지만 말해.”
“콜.”
“자, 그럼 마지막 소원. 이 너그럽고 관대한 공주님이 용서해주는 대가로 댕댕이한테 바라는 건···.”
“바라는 건···.”
“나중에 말해줄 것이야.”
“언제?”
“또, 또 질문한다! 뮨뭉이 손!”
리야가 뒤로 뻗은 손바닥에 손을 올려주었다.
“옳지, 턱.”
턱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개의 턱을 긁듯이 손가락으로 긁어준다.
“착하다. 거봐, 이렇게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좋아. 좋은 뮨뭉이는 복종하는 뮨뭉이 뿐이다.”
“된 거지 그럼?”
“응. 그래도 거래는 거래니까 서원 언니한테는 말을 할 것이야.”
“뭐라고 할 건데.”
“뭐라고 하긴······.”
***
“···아이컨택 막내랑 차에서 섹스 했다면서.”
“아아··· 서원아. 일단 침착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됐어요. 그냥 둘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럼 깔끔하잖아?” “야야야, 어디가!”
“놔요. 좋은 말로 할 때.”
녀석을 처음 봤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불안정하고 악의와 불신, 독기로 가득 찼던 그 눈빛.
“아니, 죽일 땐 죽이더라도 양쪽 말은 다 들어봐야지. 내 얘기 다 끝나면 그때 죽이든 말든 니 맘대로 해.”
“섹스 한 건 맞죠?”
“어.”
“쌌고?”
“어···.”
“거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데.”
“변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는··· 아아아!”
서원이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음경과 음낭을 한 번에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세상 천진난만한 미소로 말했다.
“그래, 걔가 무슨 죄겠어. 결국은 이게 문제지. 자르자. 잘라서 한강에 던지자.”
“아아아, 아파, 아파!”
“응. 쫌만 참아요. 안 아프게 해줄 테니까. 없으면 안 아파.”
“야, 이러면 너도 손해잖아. 너 나랑 평생 안 할 거야? 그 좋은 걸?”
“어차피 나도 죽을 건데 뭐.”
“한서원. 내가 너 죽는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말라고 했···.”
―알!
“아아아! 야, 터져, 진짜 터져!”
“터뜨리려고.”
고추를 잡히니까 꼼짝을 못해 버렷!
남자가 남자가 아닌 게 되어 버렷!
여리여리한 여자에게도 무력으로 안 돼 버렷!
“그리고 나 죽는다는 말 쉽게 한 거 아닌데. 나 진짜 죽을 건데.”
“그러지 마라···.”
“내가 우리 멤버들까지는 죽을힘을 다해서 참고 있는 중이거든요. 하루에도 막 열두 번도 넘게 살인충동이 드는데 최선을 다해서 참고 있는 중이라고. 근데 외부 불순물은 용납 못하지. 그러다가 병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병 안 걸···.”
―알!
“끄아아아··· 야 제발··· 놓고 말하자··· 서원이 너 오늘 유난히 귀엽고 섹시하다?”
“입 닥쳐요. 그딴 거짓 칭찬 안 통해.”
“거짓 칭찬 아닌데···.”
제 분을 참지 못한 서원이는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
“씨이··· 김윤호 너 진짜 나빴어···. 걔한테 넣었던 걸 다시 나한테 넣을 생각이었던 거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아아, 차라리 분노가 낫지, 서원이의 눈물은 최고의 위험신호다.
어떻게든 이 상황만큼은 벗어나야 했던 나는 내 입으로 그것의 존재를 말해버렸다.
“저, 정조대··· 너 정조대 알아봤다며··· 그거 찰게, 응?”
< 고추를 잡히면 꼼짝을 못해 버렷!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