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화장실에서 별 짓을 다한다 (38/371)

화장실에서 별 짓을 다한다

요나가 내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떨군다.

“미안해요. 저는 원래 한 남자로 만족할 수가 없는 여자예요. 그러니 우리 이쯤에서 그만해요.”

나는 당황하며 녀석의 어깨를 붙들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예,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예요.”

“알았어. 내가 더 잘 할게. 그러니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

“아뇨. 당신은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큼 잘해줬어요. 문제는 저예요.”

요나의 단호함에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린 나는 이내 욱하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발을 구르며 소리친다.

“너란 여자 정말 최악이야! 대체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예, 저 최악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저한테 벗어나세요.”

“못 벗어나! 크릅···.”

“왜요!”

“나가는 출구가 없는데 어떻게 벗어나!”

“···그럼 셋이서 같이 살 자신 있으세요?”

“그래, 자신 있다! 이렇게 된 거 어디 끝까지 가보자!”

“바보··· 사랑 밖에 모르는 바보···.”

요나의 호수 같은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방울로 뭉쳐져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대단하네.

내 병맛 같은 발 연기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법도 한데 한번 잡은 감정선이 결코 깨지지 않았다.

지금 요나를 여주로 하고 싶다며 회사로 전달된 대본과 시나리오가 수십 편.

이 정도 연기력이면 첫 작품에 주연을 맡는다 해도 욕은 먹지 않을 것이다.

“사랑해. 그 끝이 파멸이라고 해도···.”

내가 요나의 머리를 오버스럽게 돌려서 키스 흉내를 내자 피디의 사인이 떨어졌다.

“컷! 오케이, 좋았어요!”

“오케이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발 연기에 실소를 머금고 있던 현장 스탭들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나는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자진 실토했다.

“피디님, ‘못 벗어나’ 대사 다음에 웃음 터진 거 괜찮나요?”

“그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요. 고생하셨습니다.”

대사도 프롬프터로 나오고, 대놓고 웃어도 NG가 아니고···.

이틀 동안 받은 연기 레슨이 아까울 지경이다.

너무 날로 먹는 것 같아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자 피디 옆에서 팔짱을 끼고 함께 모니터를 하고 있던 리야가 묻는다.

“뮨댕쓰, 설마 자기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야?”

“아니, 이번에는 좀 크게 웃은 것 같아서···.”

“누가 보면 칸 영화제 출품작 촬영하는 줄 알겠어. 뮨댕쓰는 어색하게 머금은 웃음이 매력 포인트라고 몇 번을 말해.”

“야, 니가 뭔데 내 연기를 판단해. 다른 멤버는 몰라도 너한테 연기 평가를 받는 건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어휴, 연기라고도 하지 마. 내가 다 창피하자너.”

“발 연기도 연기는 연기 아니냐?”

“노노, 오빠는 그냥 발이지, 발.”

옆에서 치고 들어온 은빛이의 근본 없는 드립에 스탭들의 웃음이 터졌다.

나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그래도 연기 선생님이 이틀 배운 거 치곤 잘했다고 그랬는데···.”

“뮨댕쓰가 무슨 세 살 박이 애도 아니고, 그런 자본주의 립 서비스를 곧이곧대로 믿는 거야?”

리야는 스탭들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나를 계속 능욕했다.

“우리 뮨댕쓰가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니까요. 하도 오냐오냐 자라서 그래요.”

“야, 나 오냐오냐 안 자랐거든?”

“우리가 오냐오냐 해줬자너! 대표 된 이후로는 아예 터치도 안 했고!”

업키걸과 나의 허물없는 관계를 알고 있는 스탭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현장 분위기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벽 2시에 촬영을 시작해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3시간가량 진행이 됐고 이제 마지막 씬 촬영만을 앞두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 씬은 ‘내귀두남’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씬이라 불리는 ‘도배풀 따귀’씬이었다.

“스탭 분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세트를 교체하는 동안 업키걸 공식 팬클럽 ‘어부바’에서 준비한 도시락이 스탭들에게 전달됐다.

방송계에서는 돈 주고도 못 사먹는 걸로 유명해진 ‘업키걸 도시락’이다.

팬클럽 회장이 사비를 들여 특별 주문한 호텔 도시락인데, 그 회장은 다름 아닌 리야였다.

도시락 뚜껑을 연 스탭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크으, 이게 말로만 듣던 업키걸 도시락이구나.”

“와이씨, 비주얼 죽인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랍스터와 스테이크였다.

팔뚝만한 버터구이 랍스터가 스테이크, 구운 채소와 함께 통째로 들어가 있다.

“내가 웬만하면 음식 사진 안 찍는데 이건 찍어야겠네.”

“이 정도면 단가부터 장난 아닐 것 같은데요? 실장님 이거 개당 얼마쯤 해요?”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 스탭 한 명이 도시락을 돌리고 있는 장우에게 물었다.

“글쎄요. 팬클럽에서 준비한 거라서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장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시락을 준비한 장본인이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5만원인 거예요.”

“워이씨, 내 일당보다 비싸. 이거 아까워서 못 먹겠는데요.”

“앙? 일당이 5만원도 안돼요?”

스탭의 너스레에 리야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커진 눈동자 크기만 놓고 보면 세상이 망한 스케일이다.

“아뇨, 5만원보다는 쬐금 많이 받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하하.”

“끼에엑! 지금 웃음이 나와요? 완죤 불쌍하자너, 뮨댕댕! 뮨댕댕쓰!”

아 나는 왜 또 불러···.

“어, 왜.”

“오늘 우리 출연료 전부 스탭들한테 기부해야겠어. 지금이 무슨 70년대도 아니고 일당으로 5만원 쪼금 더 받는대!”

“응? 우리도 오늘 건 출연료 얼마 안 돼.”

“그럼 내 정산금으로 보태면 되자너. 피디님들이랑 작가 언니들은 페이 많이 받을 테니까 빼고, 일당 삼십 안 되는 스탭들한테만 적용해서 맞춰줘. 오케이?”

“어? 우리도 일당 삼십 안 되는데···.”

메인피디의 비굴한 혼잣말을 들은 리야는 너무 놀라서 입이 반쯤 벌어졌다. 아프리카 난민촌에 처음 봉사활동을 나간 사람처럼 황망한 표정이 되었다.

리야는 현장 스탭 모두에게 30만원씩의 금일봉과 함께, 업키걸 이름으로 겨울용 파카를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10분 뒤에 마지막 씬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금만 고생들 해주세요!”

야식 타임이 끝나가던 그때, 나의 개인용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망란이였다.

새벽 5시가 넘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밤 12시쯤에 숙소에 들어갔다는 톡이 왔었고, 나는 업키걸 아이들과 밤샘 촬영이 있을 거라고 답장을 해줬었다.

혹시 자다가 라희의 다리 마비가 시작됐나?

놀란 마음에 곧장 스튜디오 밖 복도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어, 란아.”

―대표님 촬영 끝났어요?

잠에서 방금 깬 듯한 갈라지는 목소리다.

“아니, 이제 한 씬 남았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저 하고 싶어요···.

“어···?”

―방금 대표님이랑 하는 꿈꾸다가 깨가지고 자위 한 번 했거든요. 근데 안 풀려요. 대표님이 안에다 싸줘야 풀릴 것 같은데 어떡해요?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아흐응···

목소리에서도 답답함이 느껴졌다.

당황스럽네.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긴 했었지만 이런 시간에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걸.

―촬영 끝나려면 오래 남았어요?

“한 시간 안에 끝날 것 같긴 한데··· 근데 끝나면 업키걸 애들이랑 같이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거든. 오랜만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하려고.”

―아···.

“라희는 자?”

―예. 걔는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라요.

‘그러니까 숙소에서 해도 돼요’라는 뉘앙스였다.

이걸 어쩐다.

내가 먼저 약속을 한 부분이니 잠깐이라도 들러서 풀어줘야 될 것 같은데, 업나니들한테는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란아, 내가 촬영 끝나면 전화할 테니까 일단 자위를 한 번 더 하고 있어봐.”

―예, 알았어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내가 약속한 건데.”

―저도 웬만하면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노력 했거든요. 근데 대표님께 안 들어오면 안 풀릴 것 같아요. 완전 꼴려서 제 손으로 젖꼭지만 만져도 확 느껴져요.

헛웃음 나오네.

“어허허, 그래그래. 이따 보자. 끊는다.”

끊으려는데 란이가 대표님, 하고 부른다.

―혹시 지금 1분 정도 시간되시면요···.

“어.”

―화장실에서 꼬추 사진 찍어서 보내주시면 안돼요?

“뭐?”

―대표님 꼬추 사진 보면서 자위하면 이입이 더 잘 될 것 같아요.

“아니아니···.”

―아, 방금 대표님 꼴린 꼬추 떠올렸는데 미칠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영상통화하면서 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은 안 되잖아요.

“하아··· 알았다. 사진이면 되지?”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좋긴 하죠. 딸딸이 치는 동영상··· 아, 어떡해, 완전 꼴려···.

내가 진짜 별 짓을 다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의 가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발기가 됐다는 것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이나 내가 느끼는 자괴감의 무게는 똑같다.

이왕 희생하기로 한 거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낫겠지···.

나는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서 30초 정도 딸딸이 치는 동영상을 찍은 뒤 음란이 놈한테 보냈다.

나 [유출 안 되게 조심해라. 락 걸어놔.]

망란이 [아, 완전 사랑해요]

후우···.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는데 역시나 거대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생체 딜도도 모자라서 몸캠이라니···.

핸드 타월로 물기를 닦는데 란이에게 톡이 왔다.

영상 파일이었다.

피사체가 많이 흔들려서 썸네일만으로는 식별이 어려웠다.

무심결에 눌렀다.

―아, 아, 아!

“아잇, 씨발.”

미, 미친 망란이 같으니라고!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자위하는 모습을 굳이 찍어서 보내줬다.

등줄기가 오싹하다.

신음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끄기는 했는데, 잠깐 새어나온 소리는 복도 바깥까지 들리기에 충분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는 사람이 없고, 복도에도 아무도 없기를 바라야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하지만 표정만큼은 태연하게 유지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

움찔.

복도로 나오자마자 여자화장실에서 세면대 수도 소리가 들렸다.

지금 2층에서 촬영 중인 곳은 우리 팀 밖에 없는데···.

여자화장실은 왼쪽으로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고, 스튜디오로 가기 위해서는 그 앞을 지나쳐야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영상 소리가 여자화장실 안까지 들렸을까?’ 가늠을 해보며 스튜디오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저벅저벅

밖에서는 화장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내가 여자화장실 앞을 지날 때까지 손 씻는 소리는 계속됐고, 다행히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 대표님!”

움찔!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엄승미 작가였다.

“어, 예. 작가님.”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 라고 마인드컨트롤을 해보지만 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은은한 향수 향을 풍기며 다가온 엄 작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에구, 많이 피곤하시죠?”

“아니에요. 식사는 하셨어요?”

“예, 저는 먹었어요. 근데 대표님은 다 안 드시고 나가셨다고 업키걸 멤버들이 걱정하던데요?”

“아, 그래요? 급한 전화가 와서요.”

“그러셨구나. 이제 한 씬 남았으니까 화이팅 하쎄요.”

“옙, 작가님도 화이팅.”

태연하게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오만잡생각이 다 든다.

만약에 신음소리가 들렸다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 생각하긴, 화장실에서 야동이나 보는 놈으로 생각하겠지.

그것도 촬영 중간에 밥 먹다 말고 다급하게 나가서···.

엄 작가와 나는 서로의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추며 둘 다 어색한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끊긴 대화를 잇는다.

“아, 맞다. 업키걸 멤버들이 금일봉이랑 점퍼 선물한 거요.”

“예.”

“그거 미담 식으로 보도 자료 만들어서 기사 내보내도 될까요? 시상식 홍보용으로요.”

“뭐 저희는 상관없죠.”

“오케이, 그럼 보도자료 만들겠습니다.”

그녀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잡고 양손 타이핑으로 메모를 했다.

해달이 가슴 위에서 조개를 깨는 모습이 연상돼 속으로 피식 웃었다.

줄무늬 셔츠의 소매를 한 번 접어서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얇은 팔찌가 채워진 손목이 참 가늘고 하얗다.

네일아트를 하지 않은 맨 손톱이었는데 손톱의 바디도 길고 예쁘······.

아··· 젠장.

나 진짜 미쳤나보다.

지난 2년 동안 아무 감정도 없던 엄 작가에게도 성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아니다.

자책하며 짧게 고개를 흔드는데 핸드폰 메모를 마친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싱긋 웃는다. 스튜디오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대표님, 언제 술 한잔 해요.”

비약할 것 없다.

방송국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으레 듣는 말이고 나 역시 자주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와는 이미 프로그램 회식을 하면서 몇 번이나 술잔을 기울인 사이기도 했다.

“예, 좋죠. 좋은 콘텐츠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어? 저 지금 사심으로 말씀드린 건데.”

윽.

몸 쪽 꽉 찬 직구가 훅 들어오네.

내 몸에서 무슨 페로몬이라도 발산되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성격상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할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아, 여자 친구 있으신지 물어보는 게 우선이구나. 대표님 여자 친구 있으세요?”

이봐. 역시 농담이 아니라니까.

나는 적당히 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아뇨, 여자 친구는··· 없는데··· 없어요.”

그녀도 귀엽게 코를 찡그리며 화답한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은 장난 섞인 말투였다.

“하긴, 여자 친구 있으신 분이 화장실에서 야동을 보진 않겠죠. 많이 외로우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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