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업키걸 한서원(2) (16/371)

업키걸 한서원(2)

겨울거리의 센치함 속에서 서원이에게 설렘을 느낀 것도 잠시.

녀석의 오피스텔로 가는 3분 내내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하는 논쟁이 이어졌다.

“거기 털을 왜 밀어.”

“이번에 아사히 TV 예능 나가는 거 온천에서 촬영한대요.”

“그거랑 왁싱이랑 뭔 상관이야. 다 벗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면서. 수영복 입어?”

“아뇨. 수영복은 아니더라도 비치룩 정도는 입을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요. 그냥 애들이랑 다 같이 왁싱하기로 했어요. 깔끔하게.”

“뭐? 다른 애들도 민다고?”

“응. 돼지랑 요나는 왁싱샵 가서 한다는데 나는 쫌 민망해서···.”

“민망해서 나한테 부탁한다고?”

“응.”

“나한테는 안 민망해?”

“대표님은 어차피 나 벗은 거 다 봤잖아요.”

보긴 봤지.

예전에 숙소생활 할 때 샤워 후 나체로 나오다가 몇 번 마주쳤었다.

아무리 그래도 왁싱샵 여직원보다 내 신뢰도가 높다는 건 좀 비정상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음모를 제거하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발상 아닌가.

“안 돼. 밀지 마.”

“요즘에는 직캠이랑 인방도 위험하잖아요. 유진이 인방 때 팬티 보인 거 캡처돼서 유튜브에 박제 됐어요.”

유진이는 메이퀸즈라는 팀으로 활동 중인 서원이 친구다.

얼마 전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인터넷 방송으로 공개했는데, 의자에 양반다리로 쩍벌 하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화면에 잡혔었다. 그리고 속바지도 아닌 리얼 팬티가 노출됐다.

팬티는 양반이다. 인터넷 방송 도중 유두가 노출된 걸그룹 멤버도 있다.

인방 외에도 홈마나 찍덕들이 대포카메라로 찍는 직캠 영상에서의 노출도 문제가 되는데, 속바지를 입는다고 해도 안무 중에 턴을 도는 동작이 있으면 엉밑살이나 생식기 자국이 불가피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까지 음모가 노출됐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암튼 안 돼. 홍이랑 요나한테도 왁싱은 절대금지라고 똑똑히 전해.”

요나의 그 보드랍고 가녀린 털을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돈다.

“아, 왜요. 어차피 여자들은 위생 문제 때문에 많이 한대요.”

“털이 불결한 거면 머리카락은 왜 안 미는데.”

“머리카락이랑 거기 털이랑 똑같나.”

“똑같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 한 가닥 털까지도 소중히 여겨야 되는 거야.”

“뭐라는 거야. 그래서 안 해준다고요?”

“어. 안 해. 못 해. 내 심장이 허락하질 않아.”

“제모용품도 사왔단 말이에요.”

“어디 있는데.”

“여기, 가방에···.”

“이리 내놔. 당장 버리게.”

“아잇, 진짜. 털에 무슨 원수라도 졌어요?”

“원수를 졌으면 당장 밀어줬겠지. 사랑하니까 밀지 말라는 거잖아.”

“와 대박. 지금 나한테 고백한 거? 사랑한다고?”

“아니 너 말고 털한테 한 거야.”

그 말에 서원이의 웃음이 터졌다.

“크히히힣, 아 진짜 미쳤나봐!”

“그리고 내 기억에는 니가 왁싱을 해야 할 정도로 숱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으응으응. 숱이 많은 편은 아닌데 모양이 안 예뻐서 좀 다듬긴 해야 돼요.”

“안 예쁜 털은 뽑힌 털 뿐이다. 몸에 박혀 있는 털은 모두 예쁜 거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근데 너 나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안 창피하냐?”

“뭐가 창피해. 나는 대표님 꼬불꼬불 털 가지고 있는데.”

“응?”

숄더백 속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흔든다.

명함 크기의 코팅지였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내 꼬추 털 세 가닥이었다.

예전에 숙소 욕실과 내 방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워서 코팅을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자기들 것도 하나씩 뽑아서 준다고 했었지.

털이 없는 막내 라인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실제로 뽑았다고 했었다.

“참나···.”

서원이의 손에 들린 코팅지를 보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갔다.

녀석은 마치 그것이 자기가 정성스레 뜬 십자수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얼굴 앞으로 쑥 내밀며 미소 지었다.

“귀엽죠?”

“···니 눈에는 이게 귀엽냐?”

“그냥 털이라고 하면 당연히 안 귀엽지. 김윤호 털이니까 귀여운 거지.”

“남의 털은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하는 애가 정작 자기 털은 밀려고 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 해.”

“왜 이렇게 털에 민감해요.”

그러게.

서원이의 그 말을 듣고서야 머쓱해졌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털에 집착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원이가 코팅된 털을 내밀었을 때 마치 어릴 적 만화캐릭터 운동화를 선물 받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심지어는 멋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나도 녀석들의 털을 수집하고 싶······.

“암튼 전체 왁싱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듬긴 다듬어야 돼요. 나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대표님이 해달라고.”

“누군 해봤냐.”

“그래도 남자들은 평소에 면도하잖아요. 똑같이 하면 되지.”

“남의 털은 안 밀어봤는데···.”

두근두근.

미치겠다.

서원이의 음모를 다듬어주는 장면을 상상하자마자 심장과 고환이 벅차도록 뛰었다. 쿠퍼액도 살짝 배출된 것 같다.

이쯤 되면 내가 털 페티쉬 음모론자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인정한다.

나는 거기 털이 좋다.

음모가 좋다.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지는 것에서 흥분한다.

초가을 시골 오두막에 누워 듣는 풀벌레 소리처럼, 음모를 살짝 비볐을 때 들리는 보스럭지스럭 소리가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곳에 코를 대고 호흡을 흥킁흥킁 거릴 때, 내 콧바람과 당사자의 체온이 어우러지며 습한 공기로 되돌아오는 그 향이 좋다.

욘나, 아아, 욘나.

녀석의 그곳 털은 참으로 곱고 가늘면서 정갈했지.

나를 음모론자로 만든 주범이다.

또 인정한다.

나는 주름 없이 매끈한 겨드랑이도 좋다.

씨바, 아아, 씨바.

녀석의 겨드랑이는 참으로 보드랍고 매끈하고 뽀얬지.

나를 겨드랑이 빌런으로 만든 주범이다.

시발.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아무래도 퍽커 모임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현자타임이었는데 뇌가 금세 정액에 절여졌다.

그리하여 서원이에게 역으로 물어본 것이다.

“겨, 겨드랑이는 안 밀어줘도 돼···?”

“난 겨드랑이 털은 안 나요. 아니, 가끔 한 가닥씩 나긴 하는데 그때마다 뽑아.”

“그래···? 호, 혹시 거기에도 있으면 밀어주려고 했지.”

그러자 “어우!”거리면서 몸을 부르르 떤다.

“왜?”

“겨드랑이는 좀 그렇다.”

“거기 털은 괜찮고, 겨털은 부끄럽다고?”

“응. 밑에는 하나도 한 창피한데 겨털은 이상하게 민망하네···.”

내 잘못이다.

애초에 업나니들이랑 대화를 하면서 상식과 비상식, 보편과 특수를 구분 하려는 내가 잘못한 거다.

열띤 털쟁을 벌이는 사이 어느덧 서원이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녀석이 1층 편의점 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술 없어요. 사야 돼요.”

“내가 사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소주 마실 거지?”

“응.”

“안주는 내가 알아서 고른다?”

“응. 대표님 먹고 싶은 걸로 사요.”

내가 업키걸 매니저 출신이자 회사 대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 밤 시간에 서원이와 단 둘이 술을 사는 건 좀 그렇다.

녀석을 먼저 들여보낸 뒤 나 혼자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소주와 맥주, 안줏거리를 몇 개 골라서 계산대로 향하는데 콘돔 판매대가 눈에 들어온다.

꿀꺽―

사, 살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은빛이한테도 흥분해서 달려들었는데 서원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안 벌어진다고 장담할 수 있겠어?

하지만 결국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편의점 남자 알바가 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어? 안녕하세요. 그림자의 빛 잘 봤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업키걸 노래도 항상 잘 듣고 있습니다. 제가 걸그룹 노래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업키걸은 일단 노래가 좋으니까 플레이리스트에 넣게 되더라고요. 아이돌 노래 같지 않고 뭔가 외국 노래처럼 세련됐다고 해야 되나?”

아이돌 노래야 말로 최신 트랜드의 집합체인데 당연히 세련됐지.

하지만 괜히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다.

계산을 마친 뒤 사진까지 찍어주고 나왔다.

***

―쀠유 삐삐삐삐삐

경박한 소리의 초인종 소리다.

서원이가 인터폰으로 대답한다.

―누구세요.

“나.”

―어머, 자기 벌써 퇴근했어요?

“장난하지 말고 빨리 열어.”

―철컥

그새 편한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은 서원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었다.

복층 구조의 원룸 오피스텔이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향초 향이 달달하게 풍긴다.

깔끔하고 효율적인 성격답게 인테리어와 소품은 딱 필요한 것만 있다.

편의점 봉투를 싱크대에 올려놓는데 허리 뒤에서 손이 훅 들어오더니 몸통을 꽉 끌어안는다.

뭉클하고 따뜻하다.

“아, 김윤호 냄새 오랜만이다. 우리 이러니까 꼭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응,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오글거리게 무슨···.”

“1분만 이러고 있어요.”

등에 기댄 서원이의 체온과 무게에서 고단함이 느껴진다.

타지에서 활동하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

우울증 걸릴 것 같다는 말이 단순한 찡찡거림은 아닐 것이다.

만나면 장난치고 티격태격해도 나는 업키걸 아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대중의 눈에 비친 연예인이라는 게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고 세계 곳곳으로 여행도 다니는 꿀직업일지 몰라도, 하루에 2~3시간 쪽잠 자면서 재능을 소비한다는 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세상에 고충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연예인만큼 극단적으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직업은 없을 것이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정상의 자리에서 느끼는 압박감이라는 건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

“아!”

고추를 잡혔다.

서원이를 포함한 업키걸 아이들이 느낄 고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가놈이 내 고추를 움켜쥔 것이다.

내가 통성을 지르자 그나마 손에 힘을 조금 풀더니 섬뜩하게 중얼거린다.

“확 짤라 버릴까···.”

“자르긴 뭘 잘라!”

“이거요.”

“왜, 왜. 가만히 있는 애를 왜 잘라!”

“생각하니까 열 받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 또 무슨 망상을 한 건데.”

“망상 아니야. 은빛이 한국 왔을 때 둘이 뭐했어요.”

흠칫.

아이엠 그루트.

“뭐하긴. 씽씽걸 생일파티 했지.”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생파 끝나고 뭐했냐고.”

“뭐, 형네 식구랑 노래방 갔다가···.”

“갔다가.”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하고.”

“뭐··· 집에 들어가서 잤지.”

“집에 들어가서 둘이 뭐했냐고요.”

“어···? 그때···?”

“솔직히 말해요. 은빛이한테 다 들었으니까.”

“다 들었다면서 뭘 또 솔직히 말해.”

“씨이···.”

손에 쥔 고추를 놓고 백허그를 푼다.

뒤돌아보니 눈빛으로 나를 패죽이고 있다.

그런데 내 뇌가 정액에 절여지긴 제대로 절여진 모양이다.

그 화난 얼굴마저 섹시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고추를 잡혔을 때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발기도 돼 버렸고.

“브루나이에서 요나랑 했을 때도 솔직히 짜증났는데 그러려니 했어요. 그때는 다 같이 할 줄 알았으니까.”

“응···.”

“근데 은빛이가 나보다 먼저 했다고 하니까 확 열 받잖아요.”

“야, 은빛이랑 안 했어.”

“했다는데.”

“안 했다고.”

“그럼 걔가 거짓말 한 거라고요?”

“씨바가 뭐랬는데?”

“대표님이 밤새도록 안 놔줬대요. 6번째 하려다가 부모님 일어나서 못 했다고.”

이 씨바색기는 또 뭔 허세를 부린 건지······.

“야, 걔 그날 생리 터졌어.”

“응?”

“씨바 생리였다고.”

“그럼 안 했어요?”

“하늘에 맹세하고 안 했어.”

엄연하게 따지면 나 혼자 자위한 거니까.

“뭐야···.”

“뭐긴 뭐야. 씨바가 허세 부린 거지.”

“편―안.”

“에이.”

“근데 대표님 방금 거기 커진 거죠?”

“안 커졌어.”

“커졌던데. 처음에 잡았을 때랑 놓을 때랑 크기가 달랐는데.”

“너는 모쏠이라는 애가 남자 거를 아무렇지 않게 막 만지고 그러냐.”

“뭐 어때. 어차피 만질 건데.”

“응? 누가 만지게 해준대?”

“내가 만지면 되는 거지.”

그러더니 툭― 하고 고추에 손을 얹는다.

“읏.”

“봐요. 커졌잖아.”

뭐, 뭐지.

이번 건 좀 셌다.

그저 손만 닿았을 뿐인데 귀두에 짜릿하게 반응이 온 것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고추는 술렁― 술렁― 설렌다.

녀석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당돌하게 묻는다.

“나랑 할 수 있을 것 같지?”

“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나 여기부터 다듬어줘요.”

“어. 알았어.”

“씻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근데 너 모쏠 주제에 왜 이렇게 공격적이냐. 누가 보면 남자 경험 많은 줄.”

녀석은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흥. 나 여왕이잖아요. 퀸서원.”

물론 그 자신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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