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90화 (190/191)

190화 호의

안으로 들어서자 방은 이미 초토화.

서류는 물론이고 문구류까지 온갖 것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조사관 하나가 내 탁상용 캘린더를 쥐고 흔들며 웃어 보였다.

"아, 난 이런 사람이 제일 좋더라."

"저도요. 멍청한 놈."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날 쳐다봤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캘린더에 스케줄을 적는 사람이 대부분이므로 빽빽한 내 캘린더를 보고는 뭔가 중요한 게 적혀있을 거라고 오해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 캘린더엔 별다른 게 적혀있지 않다.

그저 그날 먹은 메뉴와 얼마 썼는지 정도만 적혀있을 뿐.

누굴 만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달력은커녕 다이어리 같은 곳 어디에도 남겨놓지 않았다.

회귀 전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이미 한 번 터득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편하면 편할수록 까발려지기 쉽다는 것을.

조사관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압수수색 영장이 나와서요. 자세히는 알 거 없습니다."

하지만 표정은.

'너 새됐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회귀 직전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검찰이 사무실로 들이닥쳐 컴퓨터 안의 자료는 물론 서류뭉치까지 모든 걸 다 가져갔다.

다른 게 있다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는 마음가짐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사무실이 다 털린 후 허탈한 마음에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시 후, 성환이가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나도 싹 다 털렸어요."

"누구 짓이야?"

"조동욱이요. 최후의 발악을 했나 본데요."

"조동욱이 제보한 거야?"

"네. 회장님이 회사 자금 빼돌려서 비자금 조성했다고 탈세, 횡령, 배임 뭐 그런 걸로 걸고 넘어진 거 같은데요?"

빈털터리로 쫓겨난 데 앙심을 품은 것이다.

'너도 한번 죽어봐라, 나만 죽을쏘냐?'

뭐 이 정도의 심정일 것이다.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구둣발 소리.

원모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문 앞에서 다다라서 뛴 척한 게 아니라 멀리서부터 온 게 여간 급한 게 아니었나 보다.

"전무님!"

"왜? 재무팀도 털렸어?"

"네. 전표 하나하나까지 싹 다요."

원모는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데다가, 저승사자보다도 무섭다는 검찰에서 털어갔으니 얼굴은 곧 나가자빠질 듯한 사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뭔 일이라도 생기면 주무과장인 자기 역시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원모야."

"네?"

"우린 잘못한 게 없잖아. 원칙대로 한 거 아니야?"

"그렇지만. 그건 모르는 거죠."

내 위로의 말이 별 도움은 안 된 듯 원모는 어두운 낯빛을 거두지 못했다.

하긴 자기 딴엔 이상한 걸 모두 걸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란 완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모르고 지나간 게 언제 어떻게 터질진 아무도 모른다.

* * *

서울중앙지검 안.

역시나 코끝에 맞닿은 공기는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예전 생각이 나서 기분이 참 더러워졌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참고인 조사로 불려왔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문도 없는 두 평 남짓한 대기실 안.

역시나 한 시간 넘게 앉혀놓고선 기를 죽이고 있다.

수갑이 채워진 채 굳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밖을 왔다 갔다 하는 걸 일부러 보여주는 것이다.

회귀 전 같았으면 덜컥 겁을 집어먹었지만, 이젠 나름 두 번째라고 별 느낌이 들진 않았다.

"천태평씨? 따라오세요."

잠시 후, 조사관 책상 앞에 앉혀졌다.

당연히 인사말 같은 건 없었다.

대뜸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거 뭡니까? 당신이 한 거 아냐?"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난 정말 모르는 것들이다.

그래서 사실대로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조사관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조사관에게 두 시간 동안 같은 말만 반복하며 들들 볶여가며 녹초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안쪽 검사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딘가 엄청 낯이 익은 검사.

회귀 전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던 바로 그 담당 검사였다.

"이것 다 네 도장 아냐? 전부 당신 도장이 찍혀있잖아!"

검사가 던진 전표 뭉치의 결재란에는 내 도장이 찍혀있었다.

수진이가 선물이라며 건네준.

밤에 몰래 이상한 전표에 찍었던 내 도장.

물론 내가 바꿔치기해 놓은 짝퉁 도장으로 찍은 거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검사는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윽박지르고 있는 거다.

"난 정말 모른다니깐요."

"뭐라고? 이 자식이……."

검사 역시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는지 삿대질을 섞어가며 노발대발했다.

한동안 날뛰다가 조용히 옆방으로 들어갔다.

귀를 쫑긋 기울이니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지금 불러서 조사하고 있습니다."

"……."

"온통 이자가 결재한 전표투성입니다. 네. 맞습니다. 모두 최종 결재자란에 찍혀있습니다."

"……."

사주한 자와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부장님과 총장님께서도 회장님 잘 모시라고 격려도 받았습니다."

"……."

"네. 회장님. 이제껏 거둬주신 것만 해도 큰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 톤과 멘트가 지나치게 예의 바르다더니.

역시 조회장이었다.

대기업들마다 검찰조직에 장학생 몇 명은 심어놓는다더니.

연수원 시절부터 두둑이 챙겨주면서 특별 관리함으로써 결국 목줄을 죄고서 필요할 때마다 두고두고 써먹는다는 소문은 들었었는데, 사실이었나보다.

내 담당 검사는 바로 조회장의 장학생이다.

그렇다면…….

날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게 한 원수는 조윤경이 아니다.

바로 조회장이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아마 그 당시 상황에 딱딱 들어맞는 바람에 이상현이 했던 말.

조윤경이 시켰다는 말을 덜컥 믿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하다.

조윤경이 그럴만한 배포가 있는 것도 깡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믿다니.

어쩌면 이상현이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조회장이 조윤경에게 시켰겠지만, 이상현이 그 사실까진 몰랐을 수도 있으니.

"참, 그리고 회장님. 부탁하신 건 알아봤습니다. 조동욱 그자는 아직 출국하지 않은 걸로 나옵니다. 네, 어차피 오늘부로 출국금지 내려져서 갈 수도 없습니다."

"……."

"소식 들리는 대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회장이 조동욱을 찾고 있다.

그것도 공권력까지 동원하면서.

감히 자기를 곤경에 빠뜨렸으니 아들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모양이다.

결국, 조동욱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조회장의 횡령 사실을 폭로했고.

조회장은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틈틈이 대비해 놓은 대로 모든 걸 나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다.

성환이가 보내준 변호사와 함께 영장실질심사를 들어갔지만, 무난히 기각될 거라는 기대는 어긋났다.

미리 각본이라도 짜 놓은 것인 양,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역시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물론 조급하거나 두렵진 않았다.

증거라는 게 조작된 것이므로 도장이 가짜도장이며 내가 찍은 게 아님을 나중에라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게다가 구치소 안이 제일 안전하다.

조사를 받고 구치소로 돌아오는데 교도관 한 명이 슬쩍 다가왔다.

"면회야."

구치소에서 면회라.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구치소는 증거인멸의 가능성 때문에 면회 승인을 잘 내주지 않는다고 들었었는데, 사건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신청했나 보다.

그렇다면 엄마?

"누구죠? 가족인가요?"

"알 거 없어. 조용히 따라와."

누가 왔는지는 잠시 후 알게 되었다.

날 데려간 곳은 통상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강화유리를 사이에 두고 전화나 마이크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정식 면회장이 아니었다.

취조실같이 어두컴컴한 방 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앉은 누군가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점점 형체가 뚜렷해지면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회장님."

"자네 왔나?"

조회장이 날 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위선의 얼굴.

토가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교도관이 가까운데 앉으려 하자 손을 내두르며 물렸다.

"둘이 조용히 할 얘기가 있네만."

"네. 알겠습니다."

교도관이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자리를 피했다.

새삼 조회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검찰청은 물론이고 구치소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고 있는.

제한 시간도 없고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데다 녹음까지 되지 않는 상황.

뭔가 제안이라도 할 듯한 분위기다.

조회장이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역시나 조심성 있는 사람…….

"자네 날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구만."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나자빠지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소머즈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었어."

"서프라이즈 하실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그냥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조회장이 턱을 괴던 손을 내려놓았다.

"자네랑 내가 고스톱을 친다고 가정하지."

"맞고 말입니까?"

"그래. 만약에 자네가 지금 판을 지고 있다면 자넨 어떤 전략을 가져가겠나?"

조회장이 원하는 답을 알 것만 같았다.

바로 '피박과 광박을 면한다'이다.

고스톱은 물론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크게 잃지 않는 것이다.

단 한판으로 몽땅 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수라고 함은 지고 있는 게임에선 어떻게든 점수의 두 배, 네 배씩의 돈을 잃지 않기 위해 피박과 고박을 면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가 지고 있는 게임이 아니다.

단지 조회장만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뿐.

"제 손에 보너스 패 두 장이 있으면 어쩌려구요? 전 판을 뒤집을까 합니다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에 조회장은 제법 승자의 여유를 보여가며 훈계하듯 말했다.

"보너스 패는 이미 다 나와서 깔린 거 아니었나?"

역전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다.

"아직은 모르죠."

"그러다 피박이랑 광박까지 뒤집어쓰면 어쩌려고?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보게나."

"말씀하십시오."

"듣자 하니 계속 부인하고 있다지 아마? 어차피 자넨 빠져나갈 수가 없어. 내가 검찰에 얘기해 둘 테니 반드시 선처해줄 거네."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고 형 구걸이나 하라는 말.

난 사양이다.

"검찰에 선처를 비는 건 회장님께서 하셔야 할 겁니다."

단박에 거절한 게 못마땅했는지 혀를 찼다.

"허, 정말 이렇게 거절하는 건가? 두렵지 않나?"

"회장님이나 조심하십시오. 조동욱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조동욱이란 말에 흥분한 듯 잠시 표정을 구겼다.

곧 흥분을 가라앉힌 듯 답했다.

"과연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온갖 악의를 품었는지 얼굴이 어둡고 무섭게 변했다.

"음……. 암튼 난 호의를 베풀었네. 후회하지나 말게나."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조회장은 기분 나쁜 듯 자리를 박차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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