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반전
조동욱이 주주들에게 인사말과 함께 소집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본격적인 안건에 들어갔다.
"자 그럼. 제1호 의안인 등기이사 조성환 해임의 건에 대한 표결이 있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합시다."
"꼭 표결해야 합니까?"
"뽕쟁이를 몰아내자." 등
조동욱 측에서 섭외한 주주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진 듯 번쩍거리기도 했다.
형제의 난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조동욱이 준비 많이 했다.
등기이사의 해임은 주주총회 특별결의사항.
과반이면 통과하는 일반결의와는 달리 출석 주주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조성환은 본인 10%와 정교수 5%를 합쳐봐야 15%다.
하지만 조동욱은 본인 10%와 조회장 명의 이전분 10%, 그리고 이호철이 의결권을 모아온 12%를 더하면 최소 32%이다.
더군다나 여기저기 중소규모 펀드들로부터 세력을 끌어모았을 테고 자기한테 유리하게 조성된 여론으로 일반 소액주주들 사이에서도 표를 많이 가져갈 거다.
결국 35%은 가뿐히 넘는다는 얘기니.
15% 대 35%.
2/3를 넘기므로 안건은 통과하고 조성환은 잘린다.
당장 오늘 방 빼라고 할 거다.
첫 번째 안건에 대한 표결이 끝났다.
하지만 표를 집계하는 곳에서는 웅성웅성하며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표 결과가 적힌 종이를 펼쳐 든 의장 조동욱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누군가를 찾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거다.
"거, 좀! 빨리 좀 합시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일성.
이호창변호사가 내뱉은 말이었다.
같은 편에게 총질이라니 이상한 일이지만 조동욱의 표정을 보아하니 적개심을 잔뜩 드러내고 있었다.
조동욱은 집계 결과를 말하지 않았다.
"발표하시죠."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가운데 주총장 뒤편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질질 구두 끄는 소리.
헤진 작업복을 걸친 조회장이다.
호흡기 달고 병실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 두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조회장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목례를 했다.
그 중엔 이호창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조동욱의 편이면서 사실상 조회장의 수하였다.
조회장은 구석에 앉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를 쳐다봤다.
유언 공증을 했었던 그 개인 변호사.
역시 조회장을 배신한 게 아니라 그런 척한 거였다.
조회장 지분을 차명으로 갖고 있던 사람들 역시 조동욱에게 붙지 않았다.
조회장의 갑작스런 등장에 조동욱은 치를 떨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드디어 내 세상이다!' 했었을 텐데.
골인 지점을 몇 발자국 안 남긴 상황에서 갑자기 뒤통수 제대로 맞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슬슬 산책하듯 걸어들어오는 조성환이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걸 그저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조회장이 자리하자 이호창 변호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표이사 의장의 불신임 건을 긴급 발의하는 바입니다. 표결에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조동욱을 주총 의장석에서 끌어내리자는 말.
"아니, 이게!"
삿대질하는 조동욱.
드디어 본래 성격이 나왔다.
결국 긴급발의 건은 표결로서 통과되어 조동욱은 의장석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불신임을 받은 의장은 유고나 마찬가지이므로 사회자가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들었다.
"의장의 유고시 임시 의장은 정관에서 정한 바, 재무 담당 임원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얼떨결에 내가 임시로 의장 바통을 이어받았다.
투표 결과용지를 받아들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제1호 의안 등기이사 조성환 해임의 건에 대해서는 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땅땅땅.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조회장의 차명으로 보유한 지분 10%를 자기 앞으로 돌리려는 수작.
그리고 외국계 사모펀드들이 보유한 12%의 지분을 우호주주로 섭외하려는 조동욱의 계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 제2호 의안 이사선임의 건에 대한 표결이 있겠습니다."
조동욱이 꽂아 넣으려는 임원.
역시나 투표 결과는 부결이었다.
이로써 왕자의 난이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병실에 누워 호흡기 떼기만 기다린다던 조회장이 두 발로 멀쩡히 주총장에 걸어들어왔으니 그야말로 특종이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명의신탁은 그렇다 쳐도 이호창이 모아온 외국계 사모펀드가 왜 조회장을 갑자기?
짱구를 열심히 굴려봤자 답은 하나.
조회장 본인의 회사다.
오랜 세월 비자금을 빼돌려서 조세피난처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놓고 그 회사를 통해 천하제일의 지분을 계속해서 사들인 거다.
그거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거에 조회장이 물러난 계기가 된 앨리스와의 지분 싸움도 다 쑈였다는 말.
본인이 가진 회사로 천하제일 지분을 사들여서 공시까지 하면서 결국 본인과 지분경쟁을 일으킨 꼴이다.
적대적 M&A 테마로 주식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팔았으니 많은 시세차익을 봤을 거다.
결국 그 자금으로 이후 주가가 정상 수준으로 내려왔을 때 야금야금 다시 매입함으로써 지금 12%까지 늘렸다.
아무도 모르게 자기 왼손과 오른손이 싸우게 해서 과실을 뽑아먹은 셈이었다.
그리고 관재파트장 이병헌이사.
겉으로는 조동욱에게 넘어간 척했지만, 역시나 조회장의 측근 중의 최측근.
유일하게 믿는 가신이란 말이 어울렸다.
조동욱에게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조회장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있었을 거다.
* * *
"조동욱 소식은 들은 거 없어?"
"물론이죠. 그놈이 무슨 염치로 나타나겠어요?"
성환이 말대로 주총장을 나간 조동욱은 한동안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동욱의 소식은 며칠 뒤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천하제일그룹 전대표이사이자 조인철 전회장의 아들 조동욱 씨가 자신이 증여받은 천하제일 주식 10%를 모두 처분하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증여계약 해제 등의 사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자신이 보유한 10% 지분, 조회장이 증여해 준 바로 그 주식을 몽땅 처분하고 해외로 나르던 지 아님 훗날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성환아 어떻게 된 거야? 해제라니?"
"회장님을 물로 본 거죠."
"잉?"
"그냥 순순히 주셨겠습니까, 회장님이? 유언 담당한 한변호사님한테 들으니깐 증여계약서에 단서 조항이 있었더라구요."
"뭔데?"
"증여자 일방의 의사표시로 증여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이 문구요."
역시 치밀한 사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퇴로를 열어놓는 게 습관이 돼버린 거다.
"스위스 계좌도 막았어요."
"조동욱 몫으로 남긴 거 말야?"
"네. 어차피 회장님 명의였고 본인이 사망해서 상속이 개시된 게 아니니깐 여전히 회장님 소유죠. 비밀번호도 바꿔버리고 잔고는 몽땅 옮겼답니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다 네 계좌로 옮겼다고?"
"네. 크크. 전부 다요."
조회장을 배신한 대가는 혹독했다.
조동욱은 결국 천하제일 지분은커녕 땡전 한 푼 얻지 못하고 철저히 무일푼이 되었다.
한편 언론을 통해서 천하의 패륜아로 그려지는 바람에 엄청난 손가락질까지 당했다.
온갖 언론사가 조회장 입맛대로 기사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조회장이 들어오자 집안일 봐주시던 아주머니가 이실직고를 했다.
평상시 챙겨 먹던 약을 조동욱이 시키는 대로 바꿔치기했다는 고백과 협박 때문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양은 물론 크기와 색깔까지 모두 똑같아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회장은 수개월 동안 제대로 된 약을 먹지 못하고 기저질환이 재발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골든타임 언저리에 들어와 목숨을 건졌다.
회복도 빠르게 되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아프게 된 시점이 요상치 않다고 여겨
친구를 통해 아무도 들이지 못하는 병실로 꼭꼭 숨어들었고, 오늘내일할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모두를 속였다.
그러면서 돌아가는 꼴을 지켜봤다.
자신의 부재를 틈타 조동욱이 자기 수하들을 포섭하면서 일을 꾸미는 것을.
개인 변호사나 이호창변호사, 그리고 이병헌이사 모두 조회장의 심복 중의 심복으로, 겉으론 넘어간 척하면서 조회장에게 보고 했을 테고.
지난번 주총에서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 * *
안가.
조촐한 가족회의.
이제는 참석자가 조회장과 조성환 딸랑 두 명뿐이다.
오늘은 웬일인지 조회장이 참석해 달라고 해서 나도 성환이와 함께 왔다.
문을 들어서 식당으로 향하는 길.
거실 쪽을 살짝 돌아봤지만, 담요나 화투장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 얘기란 소린데.
대충 짐작이 갔다.
드디어 때가 왔음을.
된장찌개를 곁들인 단출한 식사.
하지만 예전에 먹던 맛이 아니었다.
고향의 맛 다시X에서 원조 미X으로 조미료 하나 바뀐 정도가 아니었다.
내 생각을 읽은 듯 성환이 말했다.
"아주머니가 바뀌셔서……."
"티 났냐?"
"완전 인상 쓰던데. 새로 오신 아주머니 속상할 듯한데요."
"그럼 다른 거 먹지 뭐."
다른 반찬을 집어봤지만 하나같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혀가 고장 났나?
혀를 낼름낼름거리자.
이번엔 조회장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린 듯 말했다.
"내 병이 재발한 후로 무염식으로 식단을 바꿨네. 자네 건 따로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소금 없이 반찬을 할 수 있다니.
짜장 없이 짜장면 만든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가뜩이나 관리 잘하는 조회장.
100살까진 건강하게 살 것 같다.
예의상 괜찮다고 하고는 억지로 구겨 넣었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무맛.
난 이렇게 먹고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식사를 마치고 안내받은 응접실.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조회장이 입을 뗐다.
"자네가 천하제일 지주 대표이사를 맡아주게."
역시 예상대로다.
옆자리 성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콜' 하라는 얘기.
하지만 난 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다이' 외치며 패를 뒤집어 던지듯.
"죄송합니다. 회장님.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짝이 놀란 듯.
"아니 왜?"
"전 할 일이 따로 많아서요. 제가 천하제일에서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조성환이 나섰다.
"제 위잖아요. 내가 부대표로 갈 테니깐 그냥 좀 받아주면 안 돼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천하제일 대표는 내가 아니라 너한테 어울려."
여러 번 권하면 귀찮기만 하고 그냥 카운터 펀치 한 방 세게 날렸다.
역시나 적중한 듯.
완전 만족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가요? 정 그러면……."
하지만 조회장은 생각이 다른 듯.
"자네 생각을 굽힐 마음은 없나?"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환이가 대표로 올라갈 때까지 몇 달간만이라도 옆에 있어 줄 순 있겠나? 당장은 설득해야 할 데가 많아서 성환이를 대표로 앉히기 그렇네만."
한 번 더 거절하면 면목 없을 듯해서 받아들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늦어도 두 달 안엔 정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래 주게나."
정말 두 달 뒤면 성환이 대표에 오르든 말든 난 모르겠다 하고 나갈 거다.
얼마 안 있으면 천하태평이 보유한 암호화폐가 내가 알던 최고가를 찍을 테니.
그땐 몽땅 팔아서 우량한 기업들을 하나둘씩 사 모을 거다.
* * *
한 달 뒤, 출근길.
20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조동욱이 쓰던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임시로 임명한 새로운 대표이사는 아래층에 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성환이가 이 방을 차지할 테니 그때까지만 임시로 내가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복도를 돌아 비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창백한 표정의 비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들리는 여러 명의 목소리.
뭔가 일이 터졌다.
"무슨 일이죠?"
"글쎄, 전무님. 방금 전 검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