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88화 (188/191)

188화 형제의 난

시청의 한 호텔 카페.

TV에는 조회장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하제일 그룹 조인철 전회장이 병석으로 누워있는 가운데 그의 장남 조동욱 씨와 차남 조성환 씨 사이에 형제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장남 조동욱 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천하제일 지주는 임시주총을 열기로 오늘 소집통지서를 보냈습니다. 주요 안건으로는 차남 조성환 씨를 사내이사에서 해임하고 조동욱 계열로 분류되는 임원 한 명을 이사로 선임하는 건입니다. 이로써…….'

'급성 심근경색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조 전회장이 지난 5월 자신의 보유주식 전부를 조동욱 씨와 조성환 씨에게 동수로 증여함에 따라 둘의 지분율은 10%씩으로 같습니다. 따라서 양측은 사모펀드 등 상당수 지분을 소유한 주주 등을 만나 백기사 역할을 맡아줄 것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손님들마다 한마디씩 거들고 있었는데.

"돈 많아 봐야 다 필요 없다니깐 자식들끼리 싸움만 나지."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 텐데 말야."

"쯧쯧! 저 노인네 자식들 좋은 일만 시켰네."

부러움, 안타까움, 질투, 자기 위로 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뭐 뻔한 반응이다.

카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백발의 노신사 한 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한 손엔 법전 같은 걸 끼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정교수는 나를 보자 반가운 웃음을 띠며 악수를 청했다.

"그래. 자네 오랜만이구만. 지난 주총 때 보고 처음이지?"

"네. 건강하셨죠?"

워낙 급한 상황이라 오랜 시간 안부를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수님. 이번 임시주총 말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제 조동욱을 만났네."

"네 조동욱 대표를요?"

못 먹는 감 찔러보기라도 하는 심정인가?

우리 편인지 뻔히 알면서 먼저 선수를 치려 하다니.

"조대표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뻔하지 않나?"

"네. 그렇죠. 혹시 대답은 하셨습니까?"

"생각해 보겠다고 했네."

우리 편을 들겠다고 단호하게 답한 게 아니라 생각해 보겠다니.

섭섭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뾰족한 말이 튀어나왔다.

"네? 뭐라고요?"

다행히 정교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난 형제들 간의 싸움 같은 건 원하지 않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천하제일 그룹이 계속 성장하는 것뿐일세."

살짝 삐친 내가 부끄러워졌다.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난 자네는 믿네. 자네는 어느 쪽으로 가는가? 역시 조성환 쪽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누가 회장에 오르던지 여길 뜰 겁니다. 제 역할은 따로 있어서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살짝 놀란 듯 보였다.

"그럼 자네가 생각할 땐 누가 맡는 게 더 좋겠나?"

"물론 개인의 능력이야 차이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조동욱은 천하제일을 그저 뭔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조성환은 그 자체가 목표인 것 같습니다."

"애착이 있다는 말이구만."

"네. 맞습니다."

정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네."

그의 미소에서 답을 알 수 있었다.

5% 확보했다.

* * *

이번엔 충무로의 한 커피숍.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사람을 온갖 곳을 다 동원해서 사정사정해서 겨우 불러냈다.

김철수부장, 오랜만에 고생 좀 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꽤 고위층인 주식운용실장이다.

국민연금은 천하제일의 지분을 8%나 보유하고 있는 제2대 주주.

여기만 섭외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사정사정해서 얻은 시간은 고작 5분.

하지만 상대는 앉자마자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녹음이라도 할까 봐 말 자체도 엄청 가려가면서 했다.

"저희 쪽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실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우리는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경영권 개입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해임은 특별한 하자가 될 수 있으므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형제들 간의 싸움일 뿐인 걸로 압니다만."

"내막은 그렇지 않습니다. 싸움을 멈추고 정상적인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해임안이 부결되어야만 한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그만하시죠."

내 말을 끊어버렸다.

"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껏 형제들 간 분쟁에 개입하라고 국민연금을 납부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바로 일어났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직 5분도 채."

실장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국민연금은 실패.

패색이 짙어갔다.

* * *

대주주 두 곳과의 미팅을 마치고, 20층 성환의 집무실 안으로 돌아갔다.

안에서는 조동욱과의 일전을 대비한 대책 회의가 한창이었다.

물론 옆방에서도 조동욱파의 대책 회의가 진행 중인지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누가 누가 왔는지 사이즈 나왔다.

현재까지 확보한 지분율은 물론이고 회의 참석자들의 규모나 직급 면에서 우리는 옆 방과 게임 자체가 안 되었다.

어두운 표정의 성환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내 표정에서 이미 답을 읽었는지.

"국민연금은 안 된다고 하죠?"

"응. 역부족이야."

"그럼 혹시 조동욱 쪽으로 붙어먹는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야. 이번에도 표결에 참여는 안 할 거 같아."

"그나마 다행이네요."

성환이 김철수 부장을 쳐다보며.

"여론이 좋지 않다면서요?"

김철수 부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 그렇습니다. 조동욱 측에서 엄청 약을 쳐놔서요. 물량 공세에 도저히 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언제적 걸 가지고……."

요즘 언론에서는 조성환의 예전 마약 사건은 물론이고 각종 스캔들까지 전부 재조명되면서 엄청 까이고 있는 중이었다.

김철수 부장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거다.

조동욱이 여러 계열사를 통해서 광고를 몰아주겠다고 날린 공수표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을 거다.

"난 개망나니로 그렸다고 해도 일단 그렇다 치자고요. 그런데 조동욱은? 출생의 비밀도 모르고 힘들고 어렵게 자라 이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비교되는 기사에 울화통이 터진 듯 가슴을 두드렸다.

성환이 말대로 조동욱은 드라마로 치면 주연급.

삶 자체가 굉장히 주목을 끌 만한 서사를 부여받았다.

마약사범에 개망나니 재벌 2세와는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된다.

그나저나 이번 임시주총.

형제의 난, 경영권 분쟁이 이슈화가 되면서 평상시 같으면 오지도 않을 주주들이 대거 몰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적은 지분이라고 해도 십시일반이면 무시 못할 텐데.

이번 표결은 보나 마나 패배다.

어떠한 역전의 시나리오도 그려지지 않았다.

성환이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 전략기획실장에게 물었다.

성환이 입김으로 새로 영입한 몇 안 되는 임원 중 한 명이다.

"국내 펀드들은 만나보셨습니까?"

"네. 1% 미만이지만 비교적 규모 있는 네 군데 업체를 만나봤습니다."

"어떻던가요?"

"모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네? 한군데도요?"

"네. 유감스럽지만요."

실장이 말한 게 사실일 거다.

그들은 '누가 회장에 올라서 장기적인 회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느냐?'

이딴 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주식을 비싼 값에 되파는 것뿐.

오히려 형제들 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고 장기화하기를 원할지 모른다.

경영권 분쟁으로 피 터지게 싸워야 주가가 더 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야 1% 미만의 지분만 있는 상황에서 경영권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캐스팅 보트를 쥔 것도 아니므로 시세차익을 노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성환이는 절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교수를 제외하곤 정말 자기 편인 주주가 아무도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Plan B가 필요하다.

지금 회사에서 쫓겨나더라도 다음번을 기약할 수 있는 작전이.

내가 나섰다.

"자자. 그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죠. 우선 이번 주총에서 쫓겨난다고 하고 다음을 기약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묵묵부답.

참석자들 사이에선 아이디어는커녕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

전략기획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리 중에 다음 달까지 남아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

내가 하나 간과한 사실은

사내에 세 명밖에 없는 등기임원은 주주총회에서 결의해야만 해임할 수 있지만 나나 실장 같은 비등기임원은 그저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것.

우리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게 아니라 업무위촉 계약을 체결했으니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기 때문이다.

참석자들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대책은 무슨 대책 내 코가 석 잔데.'

'내 앞가림도 못하는 상황에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뭐, 대충 이 정도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 * *

드디어 주총일 당일.

단상 위로 가자 먼저 와있던 조동욱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천전무. 오셨습니까?"

적이긴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웃으며 인사도 건넬 줄 알고.

역시 고단수.

정기주총이 아니라 어제 리허설을 따로 하지 않아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었다.

"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랜만이다.

조동욱과 조성환의 사무실이 바로 붙어있지만 어떻게 된 게 복도에서라도 한 번을 마주치지 않았다.

비서들끼리 동선이 겹치지 않게 알아서 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CFO석에 앉아 누가 누가 들어오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은 정영태 교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참 고마운 분이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안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정기주총도 아니고 특별한 안건이 있는 임시주총이기 때문인지 총회꾼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난 주총 때 현장에 온 주총꾼에겐 단 한 명도 봉투를 쥐여주지 않은 효과도 한몫했을 거다.

'천하제일은 가봐야 먹을 거 하나도 없다.'

그 바닥에서 이런 식의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원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전무님. 왔습니다."

"누가?"

"이호철 변호사요."

"그래? 위임장 냈어? 몇 프로야?"

"네. 12%가 넘습니다."

홍콩, 싱가폴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해외 사모펀드들로부터 대리권을 긁어모은 게 12% 이상이라니.

지난 정기주총 때보다도 오히려 2%가 늘었다.

로열패밀리를 제외하고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율보다도 훨씬 높다.

혹시 이호창변호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참석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살짝 해보았지만 역시나 어김없이 무너졌다.

게임 끝났다.

이호철변호사가 주총장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조동욱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이겼다'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다.

시간이 되자 임시주총이 시작되었다.

의장인 조동욱이 연단에 올랐다.

"자 지금부터 천하제일 지주의 임시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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