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선전포고
"미안. 마시고들 있어. 내가 따라 가볼게."
원모가 날 붙잡지 않았다.
이 정도 상황이면 법카 내놓고 가라고 할 법했지만
자기 예산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랬을 거다.
걱정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성환이를 쫓아갔다.
술 마신 상태로 운전대 잡으려는 걸 가까스로 막아 세웠다.
"야! 그러다 너 회장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저세상 간다."
내 한마디에 바로 차에서 내렸다.
저세상 간다는 말보다는 회장 못 된다는 말에 반응했을 거다.
큰길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다.
"한국대 병원 응급실이요. 빨리 좀 부탁해요."
타자마자 재촉하는 바람에 택시가 일단 출발했다.
빨간색 신호등에 멈춰 네비를 켜자 20분 뒤에 도착한다고 알려줬는데.
영 못마땅했는지 성환이 한마디 했다.
"10분 빨리 가면 100만 원 드릴게요."
성환이 말과 동시에 기사 아저씨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풀파워로 엑셀을 밟았다.
밟은 족족 뛰쳐나가는 차.
말에 올라타 궁둥이를 때린 듯 몸이 뒤로 쏠릴 정도였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병원엔 무슨 일로 왜 가는 거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짐작은 갔지만.
무려 11분이나 단축했다.
속도위반으로 세 번 정도 카메라가 번쩍인 걸 봤지만, 기사 아저씨한텐 문제될 게 없는지 가뿐히 무시하고 밟아댔다.
범칙금보다도 몇 배나 더 남는 장사일 테니.
성환이가 차에서 내려 지갑에서 5만 원 뭉치를 빼서 건넸다.
딱 봐도 스무 장은 훌쩍 넘어 보이는 듯.
너무했단 생각에 낚아채려고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이미 택시는 출발한 후였다.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조회장은 보이질 않았다.
"이미 수술실로 옮겨졌습니다."
물어물어 수술실 앞으로 달려간 성환과 나.
영화에서처럼 문 위쪽엔 '수술 중'이라는 빨간색 표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옆 의자에 머리를 감싸고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일어났다.
조동욱이다.
금방 울음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연기력 갑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성환이 물음에 조동욱이 슬픔을 잠시 거두는 척하며 답했다.
"회장님께서 저녁 식사하러 하도 내려오시질 않길래 아주머니께서 내실로 가봤더니 회장님께서 쓰러져 계셨데."
"아니? 뭐 때문에?"
"급성 심근경색."
"심근경색이요? 예전에 한 번 앓은 이후로는 얼마나 조심하는데 또 재발했단 말이에요?"
"그 병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게 아니니깐."
"상태는?"
"지금 수술 중인데 장담할 순 없나 봐. 골든타임 딱 경계에 있어서.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야."
조동욱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심정지 상태에서 골든타임을 넘겼다면 회생이 힘들 거다.
이런 식으로 조성환이 회장에 등극하나?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이다.
한편, 수술실 바깥쪽 병원 로비에선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고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는지, 여기저기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한참 뒤.
수술 중이라는 빨간색 등의 불이 꺼지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나왔다.
초췌한 모습에선 오랜 시간 사투를 벌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사들이 수술 경과를 설명했다.
"환자분께선 우선 스텐스 삽입술을 받으셨고 아직까지 의식이 회복되진 않았습니다."
"깨어나시겠죠?"
"글쎄요.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시간이 많이 경과해서요.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장담드릴 순 없습니다."
의사들이야 말은 어쩔 수 없이 최악을 가정해서 한다고 해도 표정으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이번엔 전혀 파악이 안 됐다.
"에크모 치료도 병행하고 있으니 좀 더 경과를 지켜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의사들은 뒤돌아 수술실로 들어갔다.
위중증 환자에게만 쓴다는 인공심폐장치, 에크모 치료까지 받는다는 걸 보니 조회장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중한 모양이다.
다음 날.
뉴스를 켜자 조회장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천하제일 그룹 조인철 전회장이 어제저녁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로 한국대학교 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병원 도착 후 심장마비 증세로 심폐소생술을 받고 심장혈관 확장술까지 시술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이며 에크모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는데 성환이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병원에 있지 회사엔 뭐 하러 왔어?"
"병원 못 가요."
"못가다니 왜?"
"오늘 아침에 바로 한성대학병원으로 옮기셨어요."
"아니 왜? 국내 최고 병원을 냅 두고 뭐 하러 옮겨?"
"회장님 친구분이 거기 원장이거든요. 매뉴얼에 있었나 봐요. 병 재발해서 치료받을 일 생기면 그리로 가서 치료한다고요. 어젠 워낙 급해서 가까운 응급실로 간 거고."
역시 재벌가.
시나리오별로 온갖 매뉴얼이 다 구비되어 있다.
"그럼 그 병원으로 가지 그래?"
"못 들어가게 합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회사 사람들도 아무도 못 들어가요. 오직 엄마만 들어갈 수 있대요."
"뭐라고?"
"그렇게 정해놨대요. 개인 변호사가 얘기해 줬어요."
처음 들어보는 경우다.
그들만의 세상이니 접해볼 일이 없었으니깐.
"조동욱은 뭐라 안 해?"
"네. 몇 번 따지다가 말더라고요. 자기라고 별수 있겠어요?"
하긴, 조회장 사모님의 의지가 있으니 토 달 수 없었을 거다.
자기가 직접 낳은 딸은 교도소에 처박혀 있고 조회장이 다른 데서 데려온 아들 둘이 모든 걸 물려받았으니 사정을 봐주고 말고 할 여지도 없을 테고.
조동욱이 작업해 놓은 건 아니란 얘기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그 병원이 심장 쪽으로는 알아주는 병원이니깐 너무 걱정 말래요."
* * *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차도가 있다는 소식은 들려오질 않았다.
조회장은 지금 생명유지장치를 달아 가까스로 목숨을 붙들고 있을 뿐 말짱한 정신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곧 있으면 생명유지장치마저 제거할 거라는 흉흉한 소문만 들려왔다.
20층 성환의 사무실.
예전에 조동욱이 부대표 시절에 쓰던 사무실을 이제 성환이가 쓰게 됐다.
대표이사 사무실 왼편의 조윤경 사무실은 아직까지 그대로 뒀다.
아마 조회장 사모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든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성환이 사무실엔 며칠째 나도 거의 상주해 있다.
조동욱이 무슨 일 꾸미는지 계속 들어봐달라고 사정사정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젠 몰래 조윤경 사무실 들어가서 엿들을 필요가 없이 여기 소파에 누워 귀만 기울이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소파가 편해도 하루종일 누워있으면 좀이 쑤셔 죽는다.
"나 좀 내 사무실로 가면 안 될까?"
"여기가 더 좋지 않아요?"
"내려가면 왕이잖아."
"군림하고 행세하고 그딴 거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보고받을 게 얼마나 많은데."
"보고를 받긴. 다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그리고 중요한 거 있으면 여기 와서 받으라면 되잖아요."
"애들이 귀찮아하잖아."
"아니거든요? 원모님 좋아 죽는 거 안 보여요?"
하긴 내가 있어봤자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결재야 뭐.
엘리베이터 타고 두 층만 올라와서 받으면 그만이니.
오른쪽으로 누워있는 자세를 왼쪽으로 돌렸다.
"알았다. 그럼 나 깨우지 마."
막 잠을 청하려는데.
옆 방 조동욱 집무실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기울였다.
"대표님, 접니다."
관재파트장 이병헌이사의 목소리다.
"그래. 어떻게 됐어? 차명주주들 포섭할 수 있을 거 같아?"
"네, 가능할 거 같습니다."
드디어 조회장의 차명 주식에 작업을 걸 모양이다.
지난번에 이병헌이사가 조회장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바뀌었다.
"어떻게 말야?"
"차명 주식이 모두 회장님 본인 소유이고 명의자들한테는 명의만 빌렸다고 서명받은 확인서를 개인 변호사가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그 변호사를 포섭해라?"
"네. 어차피 회장님께서 회복하기 어렵다고 하시니깐 딱히 배신이라는 생각은 안 할 겁니다. 물론 많이 쥐여주시면 배신감이 들어도 상관없을 테구요."
역시나 너무나 현실적인 아이디어.
"그럼 명의 빌려준 사람들한테는?"
"그럴듯한 제안을 하면 넘어올 겁니다. 회장님이 아닌 대표님 이름으로 바뀐 확인서에 서명하나 받는 건 쉽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자기들 소유라고 우길 방법이 없으니 조금만 쥐여주면 순순히 응해줄 겁니다."
뒷돈 챙겨주면 서류 갈아끼기를 해서라도 조동욱한테 몰아줄 거라는 말이다.
이병헌이사.
최고의 가신이라 불리는 자가 배신하면 저렇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경을 헤매는 사이에 다 털리게 되는 거다.
영혼까지 탈탈.
이번 작업까지 성공하면 조동욱이 20%의 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성환이 지분율 10%의 두 배가 된다.
이 정도면 계열분리가 아니라 성환이를 몰아내고 회장 자리에 앉는 것도 충분히 노려볼 만해졌다.
"뭐래요?"
"답답해 죽겠네, 정말."
궁금한 걸 못 참겠는지 성환이 옆에서 자꾸 재촉했다.
방금 들었던 얘기를 해주자 분을 못 참고 분개했다.
"뭐라고? 저 개자식이……."
욕설을 내뱉으며 옆 방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지금 따져봤자 방법이 없다. 패만 보여주는 거지."
"그럼 어쩌자고요. 이대로 당하고만 있자고요?"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이 있어요?"
사실 방법은 없다.
주주 중 누군가가 성환이를 위해 나서서 백기사를 자청해주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평창동의 현인으로 불리는 정영태교수뿐이었다.
천하태평의 3대 주주로서 5%를 넘게 보유하고 있는 그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성환이 물었다.
"정교수님 지분 합쳐봐야 15%밖에 안 돼요. 5%를 어디서 더 끌어오지?"
"5% 아냐. 15%가 더 필요해."
"네?"
"지난번 주주총회 때 위임장 갔고 왔었던 이호철변호사 있잖아. 그때 대리한 의결권이 10%도 넘은 거 몰라? 그 사람이 누구편 들 거 같아?"
"그러네. 옛날에도 그렇고 조동욱 편이겠죠?"
"맞아."
"그런데 아직 가지고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야. 아직 팔았다는 얘긴 못 들었어."
"그럼 15%대 30%?"
성환이 표정이 절망적으로 굳어졌다.
"한번 뛰어보자고. 기관투자자들도 많으니깐."
하지만 조동욱은 생각보다 빨리 발톱을 드러냈다.
* * *
며칠 뒤.
김철수부장이 뭔가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천전무, 이것 좀 봐."
김부장이 우리에게 내민 것은 임시주주총회 소집통지서였다.
"임시주총이요?"
"맞아. 당장 다음 주에."
주총 소집이나 총회꾼 대응 등 대부분의 업무가 재무팀 일인데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 내가 승인한 것도 아닌데 누가?"
"대표이사가 자기 사람들 통해서 자체 진행했어. 그리고 지금 우리한테 통보한 거지."
"뭐라고요?"
김부장이 손가락으로 통지서 한쪽을 가리켰다.
"문제는 그게 아냐. 이것 좀 봐."
임시주주총회 제1호 의안 이사 해임의 건.
바로 등기이사인 성환이를 자르겠다는 안건이다.
선전포고다.
미쳐 전열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한 방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