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차명 주식
"가져왔어?"
가방을 열어 서류를 건네는 듯.
"네. 회장님께서 차명으로 보유한 주식은 10% 가까이 됩니다."
헐.
조회장이 옛날부터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고 야금야금 사서 모은 게 벌써 10%가 됐다는 얘기다.
"그럼 회장님 명의 20%랑 합치면 30%네?"
"네. 대표님."
증여한다고 했으니까 반띵이면 성환이와 조동욱 각 15%씩 받게 된다.
"해외 사모펀드 중에서 회장님 우호 지분은?"
"네. 이호철변호사가 10% 상회한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주총 때 이호철변호사가 위임장 가져왔던 게 그 정도였었다.
본인 지분이 30%에 우호 주주 10%면 40%를 확보한 셈인데.
견고하다.
이런 비율의 대기업을 찾기는 사실상 힘들다.
어떠한 적대적 M&A 시도에도 꿈쩍 안 할 만큼 견고한 철옹성.
"스위스 계좌 이동하는 건 알아봤나?"
"네. 지난번에 새로 만든 계좌 중에 조윤경 몫은 그 아들에게 주기로 했고 나머지 둘은 변동 없습니다. 나중에 증여세 내실 때 활용하라고 냅 두셨습니다."
"이이사!"
조동욱이 살짝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도와줄 수 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유언 공증했던 회장님 개인 변호사랑 약속 한번 잡아줘. 그냥 식사 대접 한번 해드리겠다고."
"네, 그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께 이름 빌려준 이 사람들 포섭할 수 있나?"
본론이다.
역시 조회장이 반띵해 준다고 했을 때 낙담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깄었다.
공사 쳐서 빼돌리려고 한 거다.
하지만 가도 너무 갔다.
조회장이 눈 크게 뜨고 있는데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니.
이병헌이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대표님. 그건 불가합니다. 혹시 시도라도 했다가 회장님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래. 안 되겠지?"
"네. 회장님 계신 한은 절대로요."
"그렇지. 회장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말이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야."
잠시 후.
뭔가 생각난 듯 조동욱이 물었다.
"혹시 자네 조윤경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나?"
"네."
"그럼 컴퓨터에도 접근할 수 있고?"
"네. 가능합니다. 저희는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회사 내에서 쓰는 비밀번호는 다 공유하고 있습니다."
역시 관재파트.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런 것까지 꿰차고 있다.
"여기 있는 파일을 조윤경 컴퓨터 하드에 넣어놔."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알 거 없어. 행여나 열 생각도 하지 말고."
제법 진지한 말투에 이병헌이사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나왔다.
그렇다면 지금 조윤경의 사무실로 간다는 얘기.
너무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잠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까먹었다.
집무실 바깥에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삐비비빅.
비밀번호를 누르고는 문이 열렸다.
재빨리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하마터면 걸릴 뻔.
이병헌 이사가 조윤경 책상 위 컴퓨터를 켰다.
이어서 '타타타탁' 자판을 네 번 두드리는 소리.
역시나 자기 생일이겠지.
USB를 꽂고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자판을 두드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동욱이 시킨 대로 저장만 해놓는 것 같다.
역시 관재파트.
로열패밀리의 말이라면 칼같이 지킨다.
그러나 잠시 후.
조윤경 집무실의 문이 훽하고 열렸다.
"다했나?"
조동욱 목소리다.
이병헌이사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테스트한 거다.
파일을 열어보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불쑥 들어온 것이다.
"네. 지금 거의 마무리 됐습니다."
이병헌이사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답했다.
사주 일가는 워낙 의심이 많아 이렇게 테스트하는 게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일 거다.
"그래? 다했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지."
"네. 알겠습니다."
같이 방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소리까지 듣고는 소파 뒤에서 나왔다.
자리로 가 컴퓨터를 켰다.
성환이가 얘기했던 '0415'
역시 비밀번호가 생일이 맞는지 배경 화면이 뜨기 시작했다.
바탕화면 한가운데 폴더 '두루미'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일부러 잘 보이도록 해놓은 듯.
폴더를 열자 음성녹음 파일과 여러 장의 스캔 파일이 들어있었다.
녹음파일을 클릭하자 조회장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하지? 문제없는 거?"
"네. 오늘 저녁에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
조회장이 안치홍의 사고를 지시한 내용은 물론이고 나중에 그 기사에게 구치소에서 자결하도록 한 내용.
그리고 그 대가를 무엇으로 지불했는지 등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지시하면 약점을 잡힐 수 있을까 봐 본인이 직접 지시했다.
물론 상대는 조회장이 꽤 믿을 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 하나쯤은 들어 놓는 법이니.
음성녹음만으로는 부족할까 봐 여러 가지 증거들을 담아놓은 스캔 파일까지 있었다.
조윤경이 받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성환이가 입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거다.
그 둘이 아닌 조동욱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조회장을 칠 수 있는 증거를 조동욱이 갖고 있다?
게다가 이 파일들을 조윤경의 컴퓨터에 심어놓는다?
제일 처음에 몰래 병원에서 엿들었을 때 조동욱이 자기 어머니에게 했던 말.
그 집안을 가만 냅 두지 않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동욱은 단순히 천하제일을 차지할 계획만 있는 게 아니다.
조회장을 무너뜨릴 계략도 꾸미고 있다.
일단 내 USB에 복사해서 담았다.
언젠간 나도 유용하게 쓸 때가 있을 거다.
* * *
그 후로 몇 달간.
천하제일에서는 그렇다 할만한 이슈가 없었다.
우선 재무팀 역할.
조회장이 지시했던 계열사 간 보증은 이미 오래전에 지주사 체재로 개편하면서 정리가 끝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여세 관련해서 관재파트를 도와달라는 조회장의 말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됐다.
이병헌이사가 나에게 어떤 것도 협의하거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한데다 조동욱의 지시도 따로 있었을 테니.
나로선 오히려 땡큐다.
손 더럽힐 필요가 없으니깐.
하지만 주가를 일부러 누르는 작업은 좀 귀찮았다.
상장주식의 경우 증여할 때 몇 달간의 평균주가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세금을 줄이기 위해 주가를 일부러 낮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주가조작 혐의를 받을 수도 있으므로 최대한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난 무리하진 않았다.
조성환과 조동욱 세금 줄이자고 내가 감옥에 갈 이유는 전혀 없으니.
문을 걷어찬 듯 뻥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성환이 오늘도 또 찾아왔다.
씩씩거리며.
"야 이 자식아. 노크……."
욕 박으려 했지만 바로 내 말을 끊었다.
"전무님 자꾸 이럴 거예요?"
"왜?"
"이익 좀 낮추자고요. 손실 반영도 팍팍하고."
예전엔 손실 나면 안 된다고 하더니만 그새 입장이 바뀌었다.
"여기서 더하면 분식이야. 난 할 만큼 했어."
"그럼 악재 같은 거 한 번에 털어버리면 안 되나?"
"아예 네가 곧 천하제일 회장이 될 거라고 발표하는 게 어때? 그보다 더 큰 악재가 어디 있을라고? 막 하한가로 내리찍는 거 아냐?"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농담 아냐. 방법이 없어. 할 만큼 한 거라니깐."
"그럼 어떻게 합니까? 천하제일 지분을 받자마자 팔아요? 세금 내자고?"
"그건 이병헌이사랑 고민하지? 나랑은 암것도 공유 안 하는데."
한 달째 징징대는 데도 내가 꿈쩍도 안 하니.
더는 못 참겠다고 판단한 거 같았다.
"아, 쫌! 그럼 천하태평에 내 자금 다 뺍니다. 내가 빌려준 돈부터 갚으시죠."
"치사한 놈. 그거 다신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
"나부터 살아야죠."
이번엔 장난 아닌 듯.
천하제일의 지분이 걸려있으니 제법 심각했다.
"그럼 팔아."
"증여받아서 팔라고요? 그럼 몇 프로나 주는지 아세요?"
"지주 말고 엔터."
"네?"
"너 개인적으로 엔터 지분 30% 있잖아. 그걸 지주에 팔라고."
"그걸 어떻게 팔아요? 얼마나 오르고 있는데."
"어차피 지주사 지분 들고 있으면 간접적으로 엔터사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네가 엔터 계열도 받기로 했으니깐 상관없잖아?"
"아니, 그래도 어떻게……."
못내 아쉬운 듯 선뜻 답을 못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을 텐데.
막상 개인 지분을 그것도 계속 오르고 있는 우량주식을 내놓을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거다.
"괜찮아. 지주사 지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옛날에 내가 그거 받으라고 했을 때 말 들어서 잘 된 거잖아."
예전 조회장이 조윤경과 조성환 둘에게 개인 지분 넘긴다고 했을 때 내가 그 당시 못 나가던 엔터사 지분 받으라고 한 걸 얘기했다.
본인도 부정할 수 없는지.
"네. 할 수 없죠, 뭐."
결국 성환이는 엔터사 지분을 지주에 팔아 세금 낼 현금 일부를 확보했다.
천하제일과는 다르게 천하태평에서는 이슈가 많았다.
물론 긍정적인 뉴스뿐.
우선 수호 개발에 지분으로 투자한 아파트 개발 건 분양이 완판된데다 준공까지 나면서 막대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게다가 명동 김선생의 테헤란로 주차장 부지에 실버타운을 건설한 것도 완공되면서 100% 입주가 이루어졌고 비싼 값에 되팔 수 있었다.
먹튀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노하우가 있는 쪽이 직접 사업을 하는 게 이용자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이로써 천하태평에는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
물론 현금화하는 족족 전부 다 암호화폐로 들어갔다.
절대 가격을 쳐다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살짝 어겼다.
매입할 때 거래 금액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처음에 매입했을 때보다 꽤나 많이 오른 가격은 맞지만, 아직 회귀 전에 봤던 최고점을 가려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계획대로 되는 거 같아 기분은 좋아졌다.
* * *
증권시장 마감과 동시에 공시를 냈다.
조회장이 자녀에게 지분을 증여했다는 공시.
공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원모가 헐레벌떡 찾아왔다.
"전무님 방금 기사 떴습니다."
"그래?"
"네 여기저기 다 떴어요."
초록창을 열자 원모 말대로 신문은 물론이고, 뉴스채널에서도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하제일 그룹은 조인철 전회장이 천하제일 지주의 지분 10%씩을 조동욱 대표와 조성환 상무에게 증여했다고 오늘 오후 공시를 통해 밝혔습니다. 보유지분 전부를 증여함에 따라 이제 조 전회장이 보유한 천하제일 지주의 지분은 없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번 천하제일 그룹은 장자승계라는 전통을 깨고 두 아들에게 지분을 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형제들의 공동경영보다는 인적분할 및 지분교환 등으로 계열분리를 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며칠 뒤.
오랜만에 천하태평 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천하태평의 이익 실현을 자축함과 동시에
성환이 천하제일 지주의 최대 주주로 등극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물론 명의신탁한 10%의 지분은 사실상 조회장 것이니 삼부자 간에 10%씩 나눠 갖고 있는 셈이지만.
차명 주식을 본인 명의로 돌리는 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에 미뤄두고 있다.
"축하드립니다. 상무님."
성환이를 위한 축하 자리.
김철수 부장이 성환이에게 술을 따르자 원모가 어깃장을 놓았다.
"에이. 부장님! 상무님이 뭡니까? 상무님이……. 대천하제일의 회장님이시죠.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딸랑딸랑.
성환은 기분이 좋은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에이. 회장은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주거니 받거니 참 가관이다.
술이 몇 잔 돌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성환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한참을 듣고만 있던 성환이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네. 한국대학병원이요? 지금 당장 갈게요."
성환은 아무 얘기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