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500억
"전무님. 조대표가 부릅니다."
"조동욱이? 근데 그걸 왜 네가 말해? 아하 이제 형님이라고 심부름하는 거야?"
꼬시다.
그날 경영 회의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식사하셨습니까, 형님?"
"모닝 똥은 누셨습니까, 형님?"
"시원하시겠습니다, 형님."
계속 놀리자 성환인 더는 못 참겠는지 의자를 박차며 분통을 터트렸다.
"쫌! 그만 좀 하라니깐요!"
한 번만 더 하면 주먹이라도 내지를 기세다.
할 수 없이.
"알겠습니다. 형님. 그만하겠습니다. 형님."
성환이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하……. 그거야 김부장 한번 넘어가 달라고……. 아휴 내가 말을 말죠. 암튼 그만 좀 하시죠."
"무슨 일인데 그래?"
"나도 모르겠어요. 가족회의 날이긴 한데. 전무님 말고도 몇 명 더 부르는 거 같은데."
가족회의에 외부인인 나를 부른다?
뭔가가 있다.
* * *
안가 사랑방.
성환이 말대로 나만 부른 게 아니었다.
관재파트 이병헌 이사와 머리가 희끗희끗 하얗게 센 노신사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가문의 재산 문제로 부른 모양이다.
내 예상이 맞았다.
조회장의 깜짝 발표에 참석자들 모두 놀랐지만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지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조회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성환이 되물었다.
"네? 뭐라고요?"
"방금 내가 한 말 그대로야. 내가 갖고 있는 천하제일 지분을 너희 둘한테 증여하겠다고."
조회장이 왼편에 앉은 나이 지긋한 분을 불렀다.
"김변호사. 유언장 좀 이리 주게나."
변호사가 서류를 건네자 조회장이 바로 찢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유언장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향했다.
나중에 주워서 맞춰봐야지 했을 거다.
하지만 너무 갈기갈기 찢어놔서 도저히 맞춰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예전에 내가 공증받아놨던 유언장이야. 이제 필요 없어졌지. 윤경이 일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할까. 괜히 너희들끼리 분란만 초래할지 몰라서 미리 교통정리를 하려고."
자기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천하제일 그룹이 자식들 간의 싸움으로 좌초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기력이 남아있을 때 정리를 해서 눈감을 때 편안할 수 있도록.
조동욱이 머리를 조아리며.
"안 됩니다. 회장님. 아직 정정하시고 누구보다 천하제일을 잘 이끌어가실 분이 어째서요."
마치 조선 시대 임금이 세자한테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을 때 나오던 장면 같다.
사극을 많이 본 듯.
그러나 눈치 없는 성환이 녀석은 드라마 한번 안 봤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옅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가 조회장 같았으면 넌 안 준다 했을 거다.
조회장이 헛기침 한번 내뱉고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난 이미 결정했고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말거라."
조동욱이 살짝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저희 둘이 공동 경영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럼요?"
"천하제일 지분을 받은 후에 바로 계열분리를 할 거다."
"계열분리라뇨?"
"식품, 건설, 엔터, 증권 쪽을 하나가 맡고, 다른 하나는 화학, 소재, 부품 쪽 계열사 들을 맡게 될 거다."
절묘하다.
5:5 가르마라도 탄 것인 양 두 동강이를 제대로 내놨다.
이제 중요한 건 천하제일이라는 그룹명을 누가 가져가냐 하는 것.
보나 마나 그룹 모태인 식품과 건설 쪽일 텐데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조회장이 탁자 서랍 속에서 화투패를 꺼냈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두 장을 뽑아서 테이블에 던졌다.
펼쳐진 패는 3광과 8광.
섯다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3, 8 광땡의 패다.
조회장은 성환과 조동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하나씩 골라보거라."
제비뽑기도 아니고 계열사 갈라치기를 화투패로 뽑겠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재미 삼아 그런 건 아닐 테고.
뭔가 숨은 뜻이 있을 거다.
짱구를 굴려봤다.
3광은 3월을 뜻하고 벚꽃이 그려져 있다.
벚꽃이 한창일 음력 3월……. 꽃놀이패.
그렇다면 먹고 마시고 놀다가 잠자는 식품, 건설, 엔터 쪽이다.
이 패가 천하제일 그룹명을 가져간다.
그리고 8광.
음력 8월은 가장 바쁜 추수철이라 남자들이 한가롭게 놀 만한 여유가 없다.
아무래도 24시간 가동하는 화학, 소재, 부품 쪽이 어울린다.
성환은 아직 조회장의 뜻을 간파하지 못한 듯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조동욱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럴 땐 양보가 미덕.
성환이가 조동욱을 향해 말했다.
"형님이 먼저 골라보시지요."
죽일 놈의 원수라고 할 땐 언제고 지난번에 한 번 불러봤다고 이젠 제법 형님 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이에 질세라 조동욱도.
"아우님부터 먼저 고르시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형제간의 우애.
토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재빨리 성환이에게 눈짓하고는 밑으로 세 손가락을 펴서 사인을 보냈다.
알아들었는지.
"그럼 제가 먼저 고르겠습니다."
하고는 3광 패를 집어 들었다.
조동욱은 남은 8광을 집었다.
그러자 조회장이 만족한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너희한테 어울린다. 성환이가 식품, 엔터 쪽을 맡고 동욱이는 화학 쪽을 맡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네."
조동욱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나 자기가 분명 유리한 상황을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반띵이라는 데 그리 실망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다행.
적성에도 맞는 데다 박힌 돌인 성환이가 천하제일 그룹명을 이어받게 되고 조동욱도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큰 첨단산업을 넘겨받았다.
나름 윈윈한 최적의 구조다.
게다가 천하제일 회장의 이름은 성환이가 가져갈 것이므로 난 약속을 지킨 셈도 된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천하제일을 나갈 수 있다.
원수 같은 이복형제간의 갑작스런 화해 모드.
당황스럽긴 하지만 모두가 최악은 피했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것도 같았다.
조회장이 나와 이병헌 이사를 바라봤다.
"재무팀은 계열사 간 보증과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하게."
계열분리를 위해서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상호 출자나 보증 같은 걸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위에서 승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 지주사 체재로 전환한 천하제일은 사실 별로 할 게 없긴 하다.
흔쾌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관재파트는 증여세 자금 마련하는 거 신경 써주고. 천전무랑 잘 협의하게."
"네. 회장님."
증여하면 세율이 50%, 즉 나라에서 반을 떼가므로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여기저기 묻어놓은 끌어모으라는 얘기다.
결국 양지에서의 일은 내가, 음지에서의 일은 이병헌 이사에게 맡겼다.
가족회의에 우리를 부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1년 안에 작업을 마무리할 테니깐 그때까진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시게."
"네. 회장님."
사랑방을 나오는 길.
성환이 표정이 그리 밝지도 그리 어둡지도 않아 보였다.
"뭐야? 반이라도 건져서 좋은 거야? 아님 반을 뺏겨서 싫은 거야?"
"좋긴 개뿔."
"괜찮아. 천하제일의 이름을 지켰잖아. 곁다리가 아니라 원래 모기업을 차지했는데. 천하제일 회장이 돼서 그룹을 더 키우면 되지."
"아뇨. 그럴 생각이 없는데?"
"없다니?"
"내가 굴러온 돌한테 조금이라도 뺏길 거 같아요? 전략상 후퇴라는 말 모릅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안치홍 사고 증거만 손에 넣으면 게임 끝이잖아요. 어차피 1년이면 시간도 충분하고. 지금 이렇게 안도감을 줘야지 나중에 뒤통수 제대로 칠 수 있지."
어쩐지 금세 수긍하더라니,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혹시나 증거를 손에 얻거든 조회장의 짓이라고 말해줘야겠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멀리서 조동욱과 이병헌 이사가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발견하고는 입을 꾹 닫았다.
성환에게 눈짓을 보내며.
"손 흔들면서 말하는 척해."
"네?"
고개를 돌리려 하자 막아 세웠다.
"보지 마. 그냥 말하는 척하라고."
"왜요?"
"저기 조동욱하고 이병헌 이사가 있어. 우리 신경 쓴다고 얘길 안 하잖아."
"아하."
성환은 막 팔을 휘저어가며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입을 벌렸다.
조동욱이 흠칫 쳐다보더니 안심한 듯 이병헌 이사에게 말을 계속했다.
"내일 아침에 잠깐 시간 되나?"
"글쎄요. 스케줄 표를 한번 보겠습……."
답도 안 들어보고 다짜고짜.
"내일 9시 내 사무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을까?
그 매너 좋던 조동욱이 점점 변해갔다.
아마도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지분 명의신탁한 것 내역 뽑아서 와."
"네? 명의신탁이요?"
"그래 누구 이름으로 몇 주씩인지 깡그리 전부 다."
"아……. 네 알겠습니다."
명의신탁 주식은 타인의 명의를 빌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다.
한마디로 차명주식.
세금을 회피하고 재산을 은닉할 목적으로 예전부터 많이 악용되어 왔었다.
이제야 이해 갔다.
방금 전 조동욱이 천하제일 그룹명을 이어받지 못한데다
유리한 상황에서 반밖에 차지하지 못하게 됐는데도 전혀 실망한 기색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명의신탁 주식을 이용해 뭔가 꾸미려는 것이다.
사주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재팀장이 이미 조동욱의 수하가 된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회장까지 뒤통수까지 칠 정도로 깊은 관계인 줄은 몰랐었다.
문제는 내일 아침에 둘이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지 들어야 하는 것.
하지만 대표이사실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지?"
"뭔 일을 꾸미는지는 들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잖아."
"왜 없어요?"
"뭔데?"
"대표이사 옆방이 어디예요?"
대표이사 양옆으로 예전 조윤경과 조동욱의 사무실이다.
지금은 물론 공실이다.
한 명은 감옥에, 다른 한 명은 대표이사실로 옮기는 바람에.
방도 비어있고 상주 직원도 없지만, 문제는 20층 한가운데 대표이사실에 비서 두 명이 앉아 있다는 것이다.
"조동욱 비서가 뻔히 보고 있을 텐데 거길 어떻게 들어가?"
"그러니깐."
"그러니깐 뭐?"
"안 볼 때 들어가야죠."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갈 텐데 어떻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출근 전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퇴근한 후에 나오고."
"뭐라고? 나보고 하루종일 그 안에 있으라고?"
"방법 있습니까?"
좋은 생각이긴 하나 관건은 내 일이 아니란 것.
난 순전히 도와주는 입장인데 하루종일 감옥생활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안 해."
내 생각을 읽었는지 성환이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500억"
"알았어."
1년만 참자.
회장님 돌아가실 때까지 안 기다리는 게 어디냐?
* * *
새벽 5시.
조동욱 비서가 몇 시에 출근하는지 몰라 일찍 집을 나섰다.
캠핑이라도 가듯 두 손 가득히 먹을 걸 싸 들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성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풍 갑니까?"
"그럼 굶냐? 세 끼 먹을 시간 동안 갇혀있는데? 그런데 회사 일은 어떻게 하지?"
"누가 들으면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인 줄……. 내가 원모님한테 문자 했어요. 오늘 아파서 못 나갈 거라고."
"에이. 원모 괜히 걱정하겠구만."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찼다.
"뭐래? 잘 놀다 오시라는데요?"
"뭐라고?"
"원모님이 믿겠습니까?"
"그렇지. 그럴 놈이 아니지."
20층에 올라 조윤경 집무실로 갔다.
손잡이를 돌리자 물론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어떡하지?"
성환이 태연하게 비밀번호를 누르자 '삐리릭' 문이 열렸다.
"조윤경이랑 비밀번호도 공유하냐?"
"옛날부터 뻔했어요. 자기 생일 0415. 자기가 제일 소중하니깐."
날 안에 밀어 넣고는 문을 콱 닫았다.
"밤에 올게요. 소풍 잘하세요."
하루종일 갇혀있을 생각에 잔뜩 불어난 짜증은 불과 십 분도 안 되어서 말끔히 사라졌다.
하루는 물론이고 일주일도 더 있겠다 싶을 정도로 없는 게 없이 편하기만 했다.
문을 하나 열면 침실은 물론이고 삐까뻔쩍한 화장실까지.
침대에 몸을 던지자 촘촘한 스프링이 몸을 인지한 듯 체중을 적절히 분산시켜 조금도 튀어 오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침대는 정말 가구가 아닌 과학이 맞다.
삼각김밥, 보름달 빵에 달다구리한 커피까지.
쇼핑 기분 제대로 내고 있는데, 어느덧 9시.
옆 방에 귀를 기울이자 역시 시간 딱 맞춰서 이병헌 이사가 조동욱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