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82화 (182/191)

182화 반전

이사회까지는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

조회장에게 반기를 든 조윤경은 일생일대의 베팅을 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할 경우에는 모든 것은커녕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까지 모두 토해내야 할지 모른다.

막말로 이사회 표 대결에서 한번 이긴다고 해봐야 임시방편일 뿐 결국엔 지분을 움켜쥔 조회장의 뜻대로 될 텐데 무슨 생각으로 저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성환아. 사외이사들 섭외 어떻게 되는지 알아?"

"비서실 통해서 들었는데 그냥 싱겁게 끝날 거 같은데요?"

"무슨 일인데?"

"사외이사 두 명이 해외 출장 중이라 물리적으로 도저히 돌아올 수가 없나 봐요."

"그래? 이사회는 대리출석이 안 되지."

"네. 어차피 과반만 출석하면 이사회 열리는데 문제없으니깐 상관없죠."

"그럼 나머지 둘은?"

"조동욱 측에서 섭외 끝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출석 이사는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2명 총 5명에 찬성이 4명이란 얘긴데.

게임 끝이다.

"너무 싱겁네. 난 또 뭐라도 있을 줄……. 대체 조윤경이 왜 그런 거지?"

"글쎄요. 그냥 최후 발악 한번 해본 거 아닐까? 사사건건 그냥 넘어가진 않겠다. 나 좀 봐달라 뭐 그런 거겠죠."

"음. 그럴지도."

* * *

이사회 당일.

20층 대회의실.

법적으로 대표이사인 김인수대표가 의장석에 자리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운 듯 얼핏 울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예상대로 출석한 이사는 해외 출장 나간 사외이사 2명을 제외하고 총 5명.

CFO인 나는 등기이사가 아니므로 회의석이 아닌 뒷줄에 앉아 혹시 모를 질문에 답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질문 따윈 없을 거다.

그저 팔짱 끼고 싸움 구경만 하면 된다.

레알마드리드와 동네 조기 축구팀이 붙은 것처럼 일방적인 게임이겠지만.

대표이사가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댔다.

"먼저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금일 임시이사회는 정관 제27조에 의거 재적 이사 총 7명 중 5명이 참석하여 성원이 되었기에 개회를 선언……."

"의장! 잠시만요."

조윤경이 개회 선언하는 것을 막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는 게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말씀하십시오."

"출석 인원을 정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뭔 개소리.

아무리 둘러봐도 회의 테이블에는 5명뿐인데.

대리출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조윤경이 말을 이었다.

"지금 사외이사 두 명이 출석 대기 중입니다."

조동욱이 따지듯 말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누가 왔다는 거죠?"

조윤경이 뒤를 돌아 손짓하자 갑자기 대회의실 대형 TV가 켜졌다.

화상회의처럼 세 개의 분할 화면이 뜨고 두 개의 카메라에서 각각 한 명씩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출장갔다던 사외이사 2명이 화상회의로 접속한 거다.

"상법에 따라 전부 또는 일부의 이사가 음성을 동시에 송수신하는 원격통신 수단에 접속할 경우 결의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명의 사외이사를 더해 총 7명의 이사가 참석하였다고 정정할 것을 요청드립니다."

어쩐지 믿는 구석이 있더라니, 바로 이거였다.

아마 임원발표 난 이후에 바로 작업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기 표까지 합해서 3표.

아직까진 1표가 부족하다.

대표이사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 여기 혹시 법무팀장 계십니까?"

왼쪽 구석 자리에 앉은 법무팀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의장님."

"화상회의로 참석하는 게 법적으로 용인됩니까?"

법무팀장은 사내 변호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듯 바로 답변했다.

"네. 맞습니다. 적법한 출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미리 각본을 짜놓은 작전이었으며 법무팀장은 조윤경의 수하다.

이상현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저 자리에 앉아 있었을 테지.

대표이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출석 이사는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4명 총 7명이 참석하였으며 성원이 되었기에 개회를 선언합니다."

"바로 안건에 들어가겠습니다. 제1호 의안 대표이사 선임 건으로서 이사 조동욱을 대표이사로 선임할 것을 상정합니다. 찬성하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을 든 사람은 조동욱과 직접 출석한 사외이사 2명뿐.

대표이사가 손을 안 든 것이다.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희미하게 웃음 짓는 조윤경.

이거였다.

어느새 대표이사까지 구워삶았다.

대표이사야 어차피 내쳐질 거 밑져야 본전일 테니 조윤경한테 붙은 모양이다.

지금의 이 호의호식을 몇 년 더 지속시켜 주겠다고 하니 덥썩 물었을 테지.

"자 그럼 제1호 의안은 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주변이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대표이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제1 안이 부결되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안을 제시하는 바입니다. 여기 계신 조윤경 이사를 대표이사로 선임할 것을 제안드리는 바입니다."

헐!

반대하는 것도 모자라 한술 더 떠 자기가 오르겠다니.

후폭풍이 무섭지 않나?

일단 지르고 보자인가?

권모술수나 지혜 이런 것들이 조동욱보다 한 수 위란 사실을 어필해 보려는 거다.

어차피 가만있으면 다 뺏길 텐데 밑져야 본전일 테니.

당황한 조동욱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이성을 되찾은 듯 조용히 말했다.

"의장님. 잠시 이사회 휴식을 요청드립니다."

조동욱이 눈짓하자 사외이사 한 명도 같이 일어났다.

"저도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생리현상 때문에요."

배를 움켜쥐는 척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회의실을 나간 조동욱 복도 끝까지 가서 핸드폰을 들었다.

귀를 쫑긋 기울이자.

아니나 다를까.

조회장에게 걸었다.

"회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자.

"네? 직접 오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알겠습니다. 전용 엘리베이터 가동시켜 놓겠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듯 조회장이 직접 오겠다는 건데.

아무래도 얼굴 한번 비춤으로써 반란 세력을 잠재우려는 모양이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아직 조윤경에 대한 신뢰도 약할뿐더러 뒷감당도 못 할 텐데 차마 조회장 면전에서 반기를 들기는 어려울 테니.

골육상쟁의 대환장 파티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바로 오늘이다.

조용히 회의실을 나가 원모에게 전화했다.

잠시 후 비상구 문이 활짝 열리며 원모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헉헉. 상무님. 사무실부터 뛰어온 거 맞습니다."

"누가 뭐래? 누가 보면 아주 로비에서 뛰어온 줄 알겠다. 겨우 두 층 가지고 헉헉대긴."

"그럼 로비로 가서 다시 뛰어올까요?"

매를 부르는 놈.

"닥쳐. 듣기나 해……."

한참을 들어도 눈만 치켜뜨는 게 알아듣기나 한 건지 통 구분이 안 갔다.

다른 놈을 부를 걸 했지만, 믿을 놈도 없고 너무 늦었다.

"이해했어?"

원모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결연하게 쳐다봤다.

"네. 완벽히요. 절 한번 믿어보십시오."

"그래. 믿어."

하지만 알고 있다.

내 표정은 말과는 다르게 나갔다는 것을.

빈말을 잘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난 그게 안 된다.

한참 뒤.

바깥쪽에서 우당탕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대회의실 문이 활짝 열어젖히더니 수행비서가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역시나 빛바랜 공장 작업복 차림의 조회장이 구두를 질질 끌며 휘적휘적 들어왔다.

기자회견을 열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이후 실로 오랜만의 행차였다.

유독 신경 쓰이는 구두 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좌우가 바뀐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대표이사가 썩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기를 들긴 했다만 막상 얼굴을 보니 자신감이 사라진 듯.

'X됐다'고 느꼈을 거다.

참석 인원 모두가 일어나 목례했다.

대표이사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두 손을 뻗어 의장 자리로 양보했다.

하지만 절제 절레 손짓하며.

"내가 뭐라고. 그냥 최대 주주지 등기이사도 아닌데. 난 그냥 뒤에서 지켜만 보겠네."

그러더니 내 자리 옆으로 와서 앉았다.

"자네. 오랜만이구만."

"네. 회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쭈뼛쭈뼛 눈치만 보던 대표이사가 조윤경을 흘끗 쳐다봤다.

조윤경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다시 이사회를 속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윤경이사의 대표이사 선임 건에 대한 찬반투표가 있겠습니다. 찬성하는 분께서는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화상회의로 참석한 두 명의 사외이사는 면전이 아닌데다 화면에 조회장이 비치는 것도 아니니 비교적 태연하게 손을 들었지만, 대표이사는 달랐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게 다 보였다.

맞은편 조윤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 들어라.

약속 지켜줄 테니 내 줄에 서라고 한 거다.

대표이사는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들었다.

이로써 4표 획득.

"그럼 출석이사 7명 중 4명 과반이 찬성하여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땅땅.

생각지도 못하게 조윤경은 조동욱이 오르는 걸 막았을뿐더러 아예 자기가 대표이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말 길어봐야 다음 주총 때 손든 이사들은 모두 조회장에 의해 물갈이가 될 테지만 그 안에 아빠한테 들러붙어서 뭔가를 제안하려고 하겠지.

그룹 쪼개기.

뭐 그런 게 아닐까 점쳐본다.

자기는 아니더라도 자기 아들만큼은 챙겨달라고.

하지만 그렇겐 안된다.

내가 가만 냅 두질 않을 테니깐.

모두가 허탈해하는 가운데 조윤경 혼자만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스피커에선 '치치치직' 라디오라도 켜진 듯 잡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나오는 대화 소리.

"확실히 약속한 겁니다. 부대표님"

"몇 번을 말해. 실수 없게만 하라고."

"하루에 한 번씩만 타면 되는 거죠?"

"그렇대도?"

"혹시 환자분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바로 간병인 아주머니와 조윤경의 대화 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쇳소리 섞인 앙칼진 조윤경 목소리 그대로다.

"이게 뭐야?"

"설마 조윤경 부대표 아냐?"

참석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띠링.

빔프로젝터가 켜지고 화면 안엔 간병인 아주머니 얼굴이 잡혔다.

조동욱이 크게 놀란 듯.

"아니? 저분은!"

간병인 아주머니는 화면을 응시한 채 약봉지를 꺼내서 병원에서 준 약과 함께 타는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섞은 약을 누군가에게 먹이는데.

상대방은 물론 조동욱의 어머니였다.

무슨 상황인지 모두가 인지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네 이년! 네가 어떻게!"

조동욱이 소리치며 조윤경에게 달려들었다.

수행비서가 막아 세워서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조동욱이 나 대신 복수해줄 뻔했다.

고개를 돌려 조회장을 쳐다봤다.

아무리 포커페이스라고 해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곤 하지만 선을 넘다 못해 우주까지 날아가 버린 데 대한 분노다.

사태 파악을 한 조윤경.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릴 질렀다.

"아니에요. 아빠!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저 여자가 맘대로 한 거라고. 증인이나 증거 아무것도 없잖아!"

때맞춰 흘러나오는 녹음 파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부대표님 지시에만 따른 겁니다."

"……."

"그냥 입만 막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조부대표가 그 여자 목숨을 완전히 거두라고 했어요."

깍두기 아저씨가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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