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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81화 (181/191)

181화 가능성 없는 게임

조윤경을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불현듯 찾아온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완벽한 증거를 잡았다곤 하지만.

만약 아주머니께서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증언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빠방한 전관 변호사들을 대동할 수 있는 재벌가이지 아닌가.

아직 아주머니 아들을 취업시키는 등 대가를 지급한 건 아니므로 빠져나갈 여지는 충분하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지 않냐고 따졌을 때 대응 방안이 솔직히 부족했다.

결국엔 간병인 아주머니를 사고에 이르게 한 그 범행도 밝힐 수밖에.

하지만 깍두기는.

무섭지만 어쩔 수 없다.

"성환아 혹시 너네 집에서 쓰는 조폭 있냐?"

며칠 만에 마음을 다잡고 출근한 성환이를 붙잡고 뱉은 첫마디였다.

"그런 말할 만한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요?"

어이없다는 듯 인상 쓰고 대꾸하는 게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기대했나 보다.

하지만 내 사전엔 가식적인 위로 따윈 없다.

"그럼 무단결근부터 까고 시작할까?"

"그게 아니잖아요. 후배가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는 게 먼저 아닌가?"

"무슨 일 없으니깐 오늘 왔겠지."

"아. 하긴 그러네."

"닥치고 묻는 말에 답이나 해."

"뭐, 조폭이요? 당근이죠. 설마 없는 집도 있어요?"

이 자식.

불필요하게 선 긋는다고 꼭 한마디씩 더한다.

"잘났다 자식아. 그런데 누군지 알아?"

"네. 예전에 철없을 때 술집에서 놀다가 깡패놈들한테 맞은 적이 있었는데 회장님께서 아시고는 어떤 사람 시켜서 손봐 준 적 있어요."

"양아치냐? 한 대 맞았다고 아빠한테 일러?"

"싸운 거 아니라니깐요. 완전 깡패놈들한테 당한 거라구요."

왠지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찾아갈 수 있어?"

"네. 그때 사무실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으니깐."

"그놈이 네 얼굴을 알까?"

"당연하죠. 본 적도 있고 뉴스에도 몇 번이나 나왔는데."

"자랑이다."

성환이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고는 손등을 툭툭 털며 말했다.

"그런데 깡패는 뭐 하러요?"

"아니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자세히는 알 거 없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눈을 흘겼다.

"알기 전까진 나도 협조 못 합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최후통첩.

어차피 알게 될 거 상관없다.

조윤경이 간병인을 시켜서 조동욱 어머니에게 한 짓, 그리고 간병인 입을 막으려 한 짓까지 모두 알려줬다.

그리고는 성환이의 눈빛을 살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고 자기를 감방에까지 처넣었지만 그래도 남매사이인데 팔이 안으로 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람의 탈을 쓰고……."

이를 악물려 잔뜩 찡그린 표정에선 진정으로 미워하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 *

명동 한복판.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온 명동 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성환이 놈 분명히 아까 지나갔던 거리인데도 처음 보는 것인 양 두리번거리는 게 꼴 보기 싫다.

"야! 정말 제대로 가는 거 맞는 거야?"

"맞다니깐요. 오래돼서 가물가물한 것뿐이에요."

"그냥 밥이나 먹고 갈까?"

"그러다 퇴근하면 어떡합니까?"

"야! 깡패가 퇴근이 어딨어?"

"우리 상무님 영화 참 많이 보셨나 보네. 그런 구닥다리 깡패가 어딨다고. 다들 주 5일에 칼퇴하거든요?"

"그럼 언제 싸워?"

"깡패가 싸우는 거 봤어요?"

가만 보니 영화에서만 봤지, 들어본 적은 없었다.

"저깁니다."

성환은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듯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손을 뻗었다.

가리킨 곳은 뒷골목 허름한 건물.

명동엔 화려한 상점만 있는 줄 알았지 한 블록만 뒤로 가면 백 년은 되어 보임 직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걸 몰랐었다.

음산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수록 삐걱거리는 게 두 명이 계단 하나를 밟는 순간 무너질 것만 같아 무서웠다.

유리문을 젖히고 들어간 사무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담배 냄새 하나 없이 여느 회사 사무실과 다를 바 없는 가지런한 책상들 사이로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인상까지는 숨길 수 없는 법.

칼빵인지 담배빵인지 온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흉터가 여기가 바로 깡패 소굴임을 알려줬다.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미간을 잔뜩 찌푸려 일부러 주름 몇 개라도 더 보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누구셔요?"

덩치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썼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환이가 말했다.

"사장은?"

상대는 마치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위협적으로 답했다.

"아이 글쎄 누구냐니깐?"

"알 거 없고! 그냥 나 더 기다리게 하면 혼날 거니깐 빨리 가서 전해. 천하제일에서 왔다고."

흔들리는 눈동자.

벼랑 끝에 몰려 돈 몇 푼 빌리고자 온 사람 같지는 않고

그러자니 '네'하고 물러서면 모양 빠질 거 같은지 어정쩡하게 답했다.

"누구냐니깐……요?"

물음과 동시에 뒷걸음질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버선발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지난번 백제호텔에서 봤던 그 깍두기가 맞다.

성환을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

"오 이런! 도련님께서 직접 오셨네요. 오랜만입니다. 요즘은 문제없으시죠?"

살짝 비꼬았다고 생각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쳐다봤다.

"뭐라고? 문제?"

"아닙니다. 반가운 마음에 제가 쓸데없이 오지랖을……."

성환이 이제부턴 내가 말하라고 턱짓했다.

상사놀이 하려나 본데.

부탁하는 입장이라 그냥 순순히 따라줬다.

"사장님께서 회장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집안일을 도와주셨다고요"

놀란 듯 꽉 쥔 주먹을 입으로 갖다 댔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하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듯 태연하게.

"저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럴 줄 알았다.

조용히 가방에서 A4 용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볼펜 캠코더로 조윤경과 깍두기 아저씨가 백제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장면을 담은 화면 캡처본이었다.

"왜 400% 준다니깐 혹했습니까? 감히 회장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겁니까?"

몰아세우자 깍두기가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뭔가 억울한 게 있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 부대표님께서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400%는 아닙니다. 200%만 받았습니다."

맞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니니 잔금 지급을 안 한 거다.

두 손으로 멱살을 쥐어 잡으며.

"왜? 그 아줌마가 아직 살아 계서서? 네가 무슨 짓을 한지나 알아 이 깡패 새끼야?"

깍두기 면전에 욕을 받은 것도 모자라 멱살까지 잡다니.

통쾌함이 몰려왔다.

물론 들이받을까 겁이 나긴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부대표님 지시에만 따른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목숨을 그렇게. 조부대표는 그냥 입만 막으라고 했는데 당신이 오버한 거잖아?"

조윤경과 나눈 말을 하니 제대로 걸려들었다.

절대 아니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저었다.

"그냥 입만 막으라고 한 게 아니라 조부대표가 그 여자 목숨을 완전히 거두라고 했어요."

"정말이야?"

"네, 그렇다니깐요."

이 정도면 됐다.

눈짓하자 성환이 알아듣고는 말을 꺼냈다.

"일단 알았어. 회장님께서 따로 말씀 있을 때까진 그냥 잠자코 있어. 누나하고 말 섞지 말고. 괜히 회장님 화면 돋구는 거니깐."

"네."

깍두기 머리 정수리를 내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성환에게 물었다.

"녹음 땄지?"

"네. 내가 누굽니까?"

성환이 웃으면서 핸드폰을 흔들어댔다.

"자 그럼 오랜만에 명동에서 밥이나 먹을까? 갈치 조림 어때?"

"혼자 드십시오. 난 들어가야 해요. 가족회의 있어서."

"그래? 아쉽네. 내가 회 한 접시라도 살라고 했는데……."

어이가 없는 듯 실소하며.

"허, 방금 갈치 조림이라고 하지 않았나?"

"뒤를 생략한 거지. 아무튼 오늘은 내가……."

"네네. 오늘 얻어먹은 걸로 칠게요."

"그럼……."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네. 내일은 내가 살게요."

척이면 착이다.

"됐다. 알았으면 가라."

* * *

아침부터 성환이 얼굴이 심상치 않다.

께름칙한 표정이 어젯밤 가족회의에서 뭔 일이라도 있었다는 얘긴데.

방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조용히 손짓했다.

"뭐야?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난리 났어요."

성환이가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 * *

"회장님. 먼저 그룹 현황 보고부터 드리겠습니다."

조동욱이 먼저 입을 떼며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날 한번 쳐다봤다.

그냥 보고하면 되지 꼭 한번씩 저런다.

'넌 내 아래다'라고 자기 위치를 상기시켜주려는 듯.

역겨운 자식.

누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들어 째려봤다.

"먼저 지주사에서는……."

보고가 끝나자 회장님이 말했다.

"자 그럼 혹시 따로 할 얘기 있는 사람 있나?"

이쯤에서 끝내자는 얘기.

하지만 누나가 대뜸 말을 꺼냈다.

"아빠! 대표이사를 누구 맘대로 바꾸죠? 대표이사 선임은 이사회 결의사항 아니에요?"

내 기억엔 누나가 고삐리 때 이후로 이렇게 대놓고 대드는 건 처음이다.

자기 딴에는 자기와 엄마를 배신한 옛날 유모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 건데 결과적으로는 조동욱만 더 키운 꼴이 되니 배알이 꼬였나 보다.

회장님 역시 누나가 대드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결의했다고 치고 의사록만 만들어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매번 그렇게 했잖아."

통상 사후에 이사회 의결했다고 사인만 받는 경우가 관행이긴 하다.

사내이사는 물론 사외이사들 모두 사실상 거수기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만약 반대한다?

그럼 그 사람은 다음 이사회에 참석 못 하는 거다.

"표결도 안 해보고요?"

"어차피 과반이면 통과되는 거 모르니? 너한테 비토권이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아무리 반대해도 그냥 통과되는 거라고."

"그건 해봐야 아는 거 아닌가요?"

쿠데타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님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조동욱은 가운데서 심히 난감하다는 듯 표정 관리 들어갔다.

하지만 누나와 회장님이 어긋나는 걸 보면서 속으론 쾌재를 부르겠지.

회장님은 예상 밖으로 차분했다.

"윤경아. 그럼 실제로 이사회 열면 되겠니? 표결이라도 붙이면 마음이 풀릴 거니?"

"네. 한번 해보시죠. 누가 이기는지."

* * *

"조윤경이 회장님께 정말 그랬단 말야?"

"그렇다니깐요. 처음이에요. 이렇게 막 나간 건."

"미치지 않고서야. 이사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 데다 다들 조회장이 꽂은 사람들인데 뭐 하자는 거지?"

"그냥 투정 한번 부린 거 아닌가?"

"글쎄. 투정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데."

이제부터는 물밑에서의 표 싸움이다.

연구소장으로 밀려난 전직 대표이사 김인수대표는 아직까진 등기이사이다.

등기이사 해임은 주총결의사항인데 임시주총을 아직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룹 내부 발표만 있었을 뿐 아직 이사회결의를 거치지 않아 법적으로도 대표이사 신분이기도 하고.

따라서 김인수대표, 조윤경, 조동욱 등기이사 3명에 사외이사 4명.

총 7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모두 출석한다면 4표만 얻으면 안건이 통과한다.

조윤경은 분명 이 사외이사 4명에게 작업을 걸려고 할 거다.

사외이사야 무늬만 이사일 뿐 상법에 따르려고 둔 것뿐이지 말 그대로 거수기다.

상근이 아니니 출근할 필요도 없고 그냥 이름만 빌려주는 명예직.

보수도 적지 않은데다 아무 생각 없이 회사에서 정해준 대로 찬성표만 던지면 되는 땡보 중의 땡보다.

하지만 사외이사들 모두 조회장이 선임한 자들이니 조동욱이 대표이사로 선임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

가능성 없는 게임인데 왜 하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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