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80화 (180/191)

180화 결정적 증거

백제호텔 커피숍.

십 분쯤 먼저 도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윤경은 절대 약속 시간보다 빨리 나타날 리가 없으니 분명 상대방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다.

평일 점심인데도 커피숍 안에는 사람들로 꽤 북적북적했다.

손님의 반 이상이 정장을 갖춰 입은 남녀커플인 걸 보니.

슬슬 날이 따뜻해지면서 벚꽃과 함께 선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모양이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테이블과 시원하게 펼쳐진 통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자연조명 역할을 해 미모가 한껏 업그레이드된다는 맞선의 명소.

그중에서도 가장 조명이 잘 받는다는 인공폭포 앞자리.

깍두기 머리를 한 아저씨 한 명이 떡하니 다리를 쩍 벌린 채 앉아 있었다.

이곳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게 분명 저놈이다.

역시 재벌가 집안마다 해결사 노릇 해주는 조폭 몇 명쯤은 가까이 두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보다.

좋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저씨 때문인지 주변 테이블은 다행히 비어있었다.

깍두기 아저씨 바로 뒤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호텔이라 그런지 바로 뒤였지만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들키지 않고 엿들을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잠시 후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여기서 제일 싼 거……. 아, 아니."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튀어나올 뻔했다.

천하제일 법카가 지갑에 꽂혀 있다는 걸 잊어버리다니.

"제일 비싼 걸로 주세요."

"네? 손님? 주류로 주문하시는 겁니까?"

안 물어봤으면 대리 불러서 기어들어 갈 뻔.

"아니요. 그냥 커피 중에서 가장 비싼 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만 원도 훌쩍 넘는 커피.

아무리 무한으로 리필해 준다곤 하지만 100잔을 리필하더라도 본전 뽑기는 사실 불가능할 거다.

한 모금 대략 이천 원어치 만큼 홀짝거려봤지만.

도무지 백 원짜리 봉지 커피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 돈이 아닌데도 아까울 정도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또각또각.

신경질이라도 부리는 것인 양 귀에 쏙쏙 박히는 구두 굽 소리.

조윤경이 왔다.

역시나 안부 따윈 묻지도 않고는 앉자마자 다짜고짜.

"이 사람이야."

아주머니 사진을 건넸을 거다.

"거기 주소도 있어."

깍두기 아저씨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고는 조용히 물었다.

"네. 그럼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당에서 밥 시키는 것도 아니고 조폭 입에서 주문이라니.

오히려 더 살벌하게 들렸다.

"말을 못 하게 해놔. 감히 어디 나다니면서 입 나불대지 않게 말이야."

"그냥 입을 열지 않게 해드릴까요? 아니면 입을 아예 열지 못하도록 해드릴까요?"

협박만 할 거냐 아니면 목숨이라도 거둘 거냐는 물음인데.

조윤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답했다.

"후자가 좋겠지? 전자면 언제라도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거잖아."

역시 악랄한 조윤경.

어떻게 내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질 않는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아무리 아주머니가 죄를 지었다곤 하더라도 사람 목숨은 모두 소중한 법인데.

막아야 한다.

그리고 조윤경이 지시한 그 증거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기한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러나 절대 한 달을 넘어가면 안 돼."

한 달!

역시 아주머니가 못 박았던 기한이다.

"네. 알겠습니다. 보름 안에 해드리죠."

"아 참! 그리고 말야. 회장님께는 아무 말씀 안 드렸으면 좋겠어."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조회장님께요? 그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반응을 보니 조회장이 주로 부리는 사람인가보다.

"그럼 따블로 하지. 오늘 계약금 100%를 보내고, 잔금은 일 끝나면 바로 100% 어떤가?"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답했다.

"따따블입니다. 계약금 200%, 잔금 200%."

역시 요즘 시대에 저 바닥에선 의리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머릿속에 선입견이 자리 잡은 것일 뿐 어쩌면 의리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알았어. 대신 절대 잡음이 없어야 해."

"네. 걱정 말고 저희만 믿으십시오. 돈만 잘 챙겨주시구요."

* * *

퇴근하면서 집이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는 정문 쪽을 쳐다보며 아주머니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간병 업무를 마친 아주머니가 병원 문을 나서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다가갔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시죠? 저를 아세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갸우뚱했다.

"네. 저는 천하제일그룹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천하제일이라는 말에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잔뜩 경계했다.

"조부대표가 보냈어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전……."

하지만 도망치듯 자리를 급하게 뜨는 아주머니.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약에 가루 탄 거요. 물론 조윤경이 시켰다는 것도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 뛰어왔다.

멱살을 꽉 쥐여 잡고는.

"너 누구야? 조윤경이 보낸 거야? 조윤경이 나한테 협박이라도 하라디?"

"아니라니깐요. 오히려 그 반댑니다."

"무슨 말이야? 그 얘긴 나랑 조윤경만 아는 건데."

"이제 몇 명 더 알게 됐어요. 어차피 드러나는 건 시간문젭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범행증거를 넘기시죠."

어처구니가 없는 듯 콧방귀를 꼈다.

"무슨 말이야? 증거라니?"

"아주머니랑 조윤경이 나눈 대화 녹음 파일이요. 아주머니한테 있잖아요."

발뺌하려다 잘 안되는지 실토를 했다.

"미쳤어? 내가 감빵 가게?"

멱살 잡은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지금 감방이 문젭니까? 목숨이 위태롭게 생겼는데두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간략히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증거를 댈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뛰겠다.

"제가 모든 일을 알고 있잖아요. 그 정도면 증거가 안 되겠습니까?"

끄으으응.

긴가민가하는 마음과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거다.

조용히 내가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아드님이 세상을 떳떳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성도 곱고 착한 친구 같던데요?"

"당신이 우리 아들을 어떻게 알아?"

"다 안다고 했잖습니까? 조윤경에게 채용 청탁한 것까지도요. 나중에 아드님께서 어머니가 큰 죄를 지은 대가로 자신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걸 알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대답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아! 우리 엄마 고생하셨으니깐 이제 내가 열심히 살아야겠네? 할까요?"

"……."

"그런 죄책감을 아드님께 물려주실 겁니까? 평생 치유할 수 없을 텐데요? 경찰에 넘겨서 죄값을 치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게 아드님한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고개 숙인 아주머니의 턱에선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오열하고 있었다.

간병인으로서 해선 안 될 일을 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아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끝내 대답하진 못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뛰어갔다.

붙잡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음에 설득하면 넘어올 거다.

* * *

며칠 뒤.

주간업무 회의 도중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

모르는 번호라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지만, 다시 울리기를 벌써 세 번째.

할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천태평상무님이시죠?"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같다.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

"저희 어머니가 상무님 성함이랑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셔서요."

번호? 쪽지?

그렇다면 간병인 아주머니란 얘긴데.

지난번에 집 안에 있었던 아주머니 아들이다.

"아 네. 아드님이시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어머니가 어젯밤 사고를 당하셔서요."

"네? 사고라고요?"

"네. 교통사고입니다."

"아니 어떻게요?"

"어머니가 지난밤……."

담담했던 목소리가 심히 떨려왔다.

울음을 집어삼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난밤에 뺑소니차에 그만……."

"네?"

불현듯 스치는 한 가지.

보름 안에 해결하겠다는 깍두기 아저씨의 말.

며칠도 안 돼서 바로?

게다가 이런 방법으로 실행할 줄이야.

상대방은 슬픔을 억누른 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병원으로 좀 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네? 제가요?"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궁금한 마음에 회의까지 깨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주머니의 아들은 내가 다가가자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천상무님이신가요?"

"네, 아주머니는요?"

"새벽에 수술은 마쳤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아. 상심이 크시겠네요. 그런데 아주머니께서는 어떻게 하다 뺑소니를?"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대로변에서 그만……. 기적적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회복할 수 있으실지는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회복하시더라도 더 이상 일상생활이 힘들 수도 있다고 하구요."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주머니 아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 듯 결연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괜찮을 겁니다. 반드시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네. 꼭 그러실 겁니다."

이 분위기에 왜 불렀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쭈뼛거리자.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조그만 USB와 쪽지 한 장.

"어제 아침에 어머니가 출근하시면서 제게 남기신 겁니다."

쪽지는 내가 아주머니에게 건넨 거고 UBS는 분명 증거 파일일 거다.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어머니가 자기한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상무님께 연락해서 이걸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네? 그런 말씀을 하셨다구요?"

목숨이 위태할 수 있다는 내 말을 믿었나 보다.

"혹시 이 파일은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이거 주시면서 엄청 우시길래요.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고 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기 어머니의 범행, 그것도 자기의 취직을 빌미로 일을 벌였다는 걸 알고서 자책하는 거다.

어머니의 범죄 증거를 나한테 곧이곧대로 넘겨주다니.

그만큼 어머니가 아들한테 넘길 때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엿봤기 때문일 거다.

"저한테 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어머니는 이미 결정하셨을 겁니다."

"혹시 어머니가 깨어나셔서 건강을 회복하시더라도 이것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실 수 없는 데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어머니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네. 그럼 받도록 하겠습니다."

"상무님. 그 부대표란 사람의 죗값을 꼭 치르게 해주십시오."

조윤경을 말한 거다.

"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왔다.

노트북을 켜고 UBS를 꽂았다.

그 안에는 단순히 아주머니와 조윤경 사이의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마치 식스센스에 나왔던 장면처럼 아주머니가 약에다 무슨 가루 같은 걸 섞는 장면까지 찍힌 화면도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왔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아주머니가 Plan B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파일이다.

파일을 들고 경찰서로 갈까 하다가 참았다.

이렇게 끝낼 수 없다.

비수란 모름지기 상대방이 이제 다 끝났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바로 그때 꽂아야 하는 거다.

물리적 충격은 물론 심리적 충격도 배가 되기 때문이다.

고스톱에서도 보너스 패는 손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내던지는 게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 피 몇 개만 더 붙으면 난다거나 상대방이 앞에서 쌌을 때 왠지 한 장 뽑으면 싼 걸 뽑을 수 있겠다 싶은 순간에 던지는 것이다.

그때까지 잘 들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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