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79화 (179/191)

179화 약속

한바탕 소동이 일단락된 후.

대표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의장석에 올랐다.

"자, 그럼 제2 안 이사 중임의 건에 대한 표결이 있겠습니다."

대본에 따라 홍과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의장!"

역시나 박수로 표결하자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여기저기서 총회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돈도 못 받았겠다 어디 한번 엿이나 먹어라 라는 심정일 것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다 필요 없다. 다 치와부러라."

"어디서 또 개수작질이야!"

"니들 다 직원인 거 모를 거 같아?"

"표결로 하자고!"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대표이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자, 주주님들 질문 있으시면 손을 들고 발표해 주십시오."

그러자 바로 이호창변호사 손을 번쩍 들었다.

마이크를 들고선 미리 써놓은 질문지를 읽어 내려갔다.

"몇 해 전 조인철 회장께서는 사주 구성원들이 주요 보직에서 물러나는 등 전문경영인 체재로 가겠다고 해놓고선 몇 해 만에 이렇게 자녀분들이 등기이사에 취임하고 연임까지 하는 등 그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전문경영인 체재로 지배 구조 개선을 요청드리는 바이며, 동 안건에 대해서도 표결에 부칠 것을 제청합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준비라도 해놓은 듯 다른 주주가 손을 들었다.

이호창변호사가 섭외해놓은 사람일 거다.

"단순히 사주 일가라고 해서 경영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주 일가라고 해도 능력을 검증받고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인재면 중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습니다."

"옳소!"

이호창변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바닥부터 올라와서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분이면 몰라도 능력 하나 보이지 않고 단순히 오너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리 차지한 분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상보다 강도 센 발언에 여기저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능력 있는 조동욱은 환영이지만 능력 없는 조윤경은 자리 지킬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디스한 건데.

내일이면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조윤경이 이 자리에 있어서 썩어가는 표정을 봐야 하는 데 정말 아쉽다.

이는 물론 조동욱의 계략.

자기는 역시 사주 일가이긴 하지만 신데렐라 스토리 서사를 부여받은 데다 아래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케이스다.

하지만 조윤경을 무능력한 바보로 낙인찍어버리고, 성환이 역시 아예 경영진에 오르지도 못하게 막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분위기는 투표 결과로도 이어졌다.

물론 모두 가결되긴 했지만, 조동욱과는 달리 조윤경에 대해서는 중임에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반대가 15%를 훌쩍 뛰어넘었다.

비단 이호창의 위임장뿐만이 아니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이 꽤 된다는 얘기였다.

주총이 끝나자 소식을 전해 들은 성환이 씩씩거리며 찾아왔다.

"뭐야? 분위기 왜 그래요?"

"조동욱이 작업한 거지."

"내가 결국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나중에 등기이사 못 하게 하려는 거겠죠?"

"당근이지. 목표가 설마 조윤경을 떨어뜨리는 거겠어? 조동욱의 목표는 바로 너야. 조윤경은 이제 슬슬 세력이 떨어져 나갈 거야. 이번에 누가 센지 다들 확실히 느꼈을 테니깐."

"하지만 누나가 만만히 물러설 사람인가?"

"발버둥은 칠 수 있겠지. 쉽진 않겠지만."

하지만 조윤경에게 타격을 허용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마지막에 조윤경의 숨통을 끊어 놓는 건 바로 나여야 하니깐.

주총 소동은 오후부터 바로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제목은 내가 예상한 것과 비슷했다.

댓글을 내려보니 욕이 대부분이었다.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이슈가 여론의 뭇매로 이어진 것이다.

김철수부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부족이야. 우리 쪽 우호 언론 통해서 무마시켜보려고 해도 워낙 자극적으로 쓴 데가 많아서 온통 관심이 그쪽으로만 실린다니깐."

"나 같아도 그럴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언론사 쪽 내부 분위기는 어때요?"

"조동욱의 세상이 올 것처럼 보나 봐. 조회장도 그런 의중으로 성씨까지 바꿔가며 법적으로 받아준 거 아니냐는 말이 돌아. 아무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 같은 내막은 알지 못하니깐 그런 거겠지만."

"그렇죠. 마침 때를 잘 탄 거죠."

* * *

며칠 뒤.

띠리링!

사무실 내 모든 TV가 저절로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 방송이 뜬 것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 일부러 켜지 않는 이상,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켜지지 않는 TV인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보다.

직원들의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

다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초조하게 TV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어서 화면엔 사내 아나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빠바바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멘트.

"천하제일그룹 임원인사를 발표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임원인사라니.

승진 및 보직 변경 인사를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임원인사를 한다는 건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화면에 사진이 하나 떴다.

조동욱.

얼마 전 조직도에서 열어봤던 바로 그 사진이다.

아래에는 '천하제일지주 대표이사 조동욱'이라는 자막이 함께 떴다.

지주사 대표이사.

회장의 직함이 없어진 지금 대외적으로 그룹 'No.1'이 된 것이다.

직원들 모두 조성환을 쳐다봤다.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려 했지만 실패다.

상실감이 어찌나 컸던지 금방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올림픽 유도 결승전.

절반으로 앞서가는 가운데 남은 시간은 단 십 초.

이리저리 도망가며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에게 옷깃이 잡혀서는 업어치기로 나뒹굴게 되어 바닥에 대자로 뻗은 선수의 모습처럼 보였다.

심판을 쳐다볼 필요도 없이 한판패라는 걸 직감이라도 한 듯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더니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뭐라 할 말도 없고 그저 축 늘어뜨린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이틀 정도 바람 쐬면 정리될 거다.

* * *

늦은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오는 길.

로비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과 보안 직원들이 옥신각신 한창 실랑이 중이었는데.

가끔 남편하고 바람난 직원 내려오라며 난리 치는 경우가 있어서 오늘도 그저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올라가려는데 왠지 아주머니의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이 안 떠올랐다.

"부대표님만 잠깐 보면 된다고요."

"아니, 지금 안 계신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주차장에 차 있는 거 다 봤는데?"

"아니 정말 안 계신다고요. 다음에 약속하고 다시 찾아오십시오."

"안돼. 나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아, 그냥 가시라니깐요."

위압적으로 팔을 뿌리쳤지만, 전혀 쫄지 않고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멱살을 잡았다.

"가서 전해. 확 그냥 다 불어버린다고. 그렇게만 전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을 희번덕거린데다 목소리까지 격양돼 있어서 긴가민가했지만 분명 조동욱 어머니 병실에서 봤던 간병인이다.

휴게실에서 통화하던 상대방은 역시 조윤경이 맞았다.

보안요원이 어딘가와 통화하는 거 같더니.

잠시 후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따라오시죠."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사람 피곤하게 말야."

팔을 걷어붙이고 따라나서는데, 나 역시 뒤따랐다.

엘리베이터에 따라 오르자 보안요원이 날 아래위로 훑듯 쳐다봤다.

넌 뭔데 따라오냐는 거다.

조용히 목에 걸린 사원증을 뒤집어 직책이 보이게 하자 슬쩍 한번 보더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19층에 도착하자 그들이 좌측으로 틀어 조윤경 부대표 방으로 향했다.

멀찌감치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방금 통화했던 보안팀인데요. 손님 모셔왔습니다."

"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주머니는 안내에 따라 씩씩거리며 들어갔다.

보안요원이 집무실에서 나오자 내가 들어갔다.

비서가 삐딱하게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재무팀장 천태평상문데요. 조부대표님 계십니까?"

"급한 일이십니까? 방금 손님이 오셔서요."

"아니요. 안 급해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면 됩니다."

"네. 그러시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다.

허락도 받았겠다 편하게 엿들으면 된다.

역시 부대표급 정도 되니 손님 대기실마저 럭셔리 그 자체인데.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는데도 마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귀를 기울이니 집무실 안에서의 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하신 건 언제 해주실 거예요?"

"내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은 채용 시즌이 아니라고!!"

채용 청탁이다.

"꼭 정규 채용 시즌이 아니더라도 중간에 꽂아줄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경력직도 아니고 신입을 꽂는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설령 무리하면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조동욱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행여나 약점이라도 잡힐만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조금만 기다리라니깐!"

"그 전에 부대표님이 짤리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뭐라고? 이게 감히 얻다 대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부탁을 했고 반대급부로 채용 청탁을 한 거다.

하지만 며칠 전 뉴스에서 봤다시피 조윤경이 앞으로도 회사에 계속 붙어있을지 나가떨어질지 모르니 걱정돼서 찾아온 모양이다.

"제가 부대표님 때문에 손을 얼마나 더럽혔는데 저보고 그냥 기다리라고요?"

조윤경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무슨 소리 한 거지? 나 때문에 손을 더럽혔다고?"

전형적인 발뺌.

'난 모르는 일이다'를 시전한 거다.

하지만 상대 또한 이를 이미 예측했는지.

"네네. 부대표님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습니다."

뭔가를 꺼내더니 누르는 소리가 났다.

녹음기인 듯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약속한 겁니다. 부대표님"

"몇 번을 말해. 실수 없게만 하라고."

"하루에 한 번씩만 타면 되는 거죠?"

"그렇대도?"

"혹시 환자분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

약을 줄 때 뭔가를 같이 타라는 지시였고 그 대가는 아들의 신입사원 채용이었다.

아무리 취업으로 고통받는 아들을 위한 일이라지만

어떻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분노감에 치가 떨려왔다.

조윤경 역시 크게 당황한 듯.

"아니 이게? 어디서 협박질이야?"

"협박이라뇨? 협박은 방금 부대표님이 하셨죠."

"으으으음……."

조윤경이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부대표님 지시로 무슨 짓까지 했는데 더는 못 기다립니다."

"알았어. 한 달만 기다려."

"정말이죠? 이번엔 믿어도 되죠 부대표님?"

"기다리라니깐. 그 안에 반드시 해결해줄 테니깐."

"한 달 안에 소식 없으면 저도 이 파일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알았으니까 가 봐."

이미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이번 일은 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증인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얘기일 테니.

조윤경이 직접 나서다가 이 꼴이 난 거다.

이상현 같은 놈한테 배신당한 이후로 더 이상 수족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아주머니가 집무실을 뜨자 조윤경이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난데. 일거리가 하나 생겨서 말야."

"……."

"내일 오후 두 시 백제호텔 커피숍으로 나와."

씩씩거리며 집무실에서 나온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내가 뒤따르자 조윤경 비서가 불러세웠다.

"상무님! 부대표님 만나보신다면서요?"

"아. 해결됐습니다."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네?"

아주머니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고 내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더군다나 내려오는 도중 사람들이 더 타면서 난 자연스럽게 군중 속에 묻히게 됐다.

로비를 나온 아주머니는 3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고 몇 정거장 뒤에 내렸다.

비교적 번잡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 어느 가정집에 도착했다.

아주머니의 집인 듯.

안에서는 한 청년이 아주머니를 불렀다.

"엄마, 밥 먹었어?"

"아니. 이제 밥해야지."

"부엌에 내가 차려놓은 거 있으니깐 드세요."'

"그래? 고마워. 아들."

친근한 말을 주고받는 홀어머니와 아들.

어머니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주소를 기억해놓고는 돌아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