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78화 (178/191)

178화 주총

원모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방에 들어왔다.

"뭔데. 넌 또 왜 우거지상이야?"

"상무님.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뭐가 이상한데?"

"주총이요. 동규가 총회꾼 담당하는데 작년하고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걱정하더라구요. 오지 말고 여행이나 좀 다녀오라고 챙겨주겠다는데 작년엔 말없이 받던 사람들이 올핸 부득불 오겠다고 하나 봅니다."

거마비도 거절하고 찾아오겠다니.

깽판을 쳐서 체급을 올리고 싶다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얘긴데.

이번 주총이 쉽지 않을 거라는 김부장의 말이 맞는가 보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닐까? 경영권 승계작업을 정말 시작한 건지? 그럼 한 사람한테 몰빵하는 건지 아니면 그룹을 쪼갤 건지 궁금할 거 아냐."

"주식이라곤 딸랑 한두 주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게 궁금하겠습니까? 혹시 더 뜯어먹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겠죠."

김철수부장이 거들었다.

"원모 말이 맞아. 분위기가 좀 달라. 의결권 대리 행사 위임장이 예전보다 엄청나게 많이 날라오고 있어."

주주들이 물리적으로 참석이 어렵거나 혹은 자신을 노출 시키고 싶지 않을 때 미리 안건에 대한 찬반 여부를 표기해서 대리인을 대신 출석시키는 경우가 있다.

회사에 대한 관심이 높거나 그만큼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은 극소수의 주주들이 그랬다.

평상시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이슈가 있는 만큼 그 비중이 늘었다는 얘기다.

"대리 행사야 많이들 하잖아요. 게다가 올해는 실적도 안 좋은데다 마침 조동욱 뉴스도 터졌고."

"그게 살짝 달라. 대리 주식수가 많은 건 둘째치더라도 의안마다 반대표가 상당한가 봐."

일반적으로 대리 행사의 경우 대부분 우호 주주에 해당했다.

대표이사에게 맡기거나 찬성표를 던지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표가 많다는 건 그만큼 이상 조짐이 있다는 건데.

"어떤 안건에 반대한다는 거죠?"

"이사 중임 건."

등기이사의 경우 선임하거나 해임할 때는 물론 임기를 연장할 때도 주총결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상자가 아니면 반대표가 거의 없는 게 일반적인데.

"이사라면 조윤경하고 조동욱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

마침 3년의 임기가 만료되는 두 사람에 대한 연임이 안건 중 하나인데 여기에 반대한다는 얘기다.

되고 안되고 결과를 떠나서 어려운 주총이 예상된다.

지난번까진 주주인 척 손들고 질문만 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의장 옆에서 질문받고 대응하는 역할이니 생각만 해도 피곤해졌다.

"천상무. 지금이라도 주총장을 제일 먼 공장으로 바꿔볼까?"

"에이, 안 돼요. 이미 소집통지서도 다 나갔는데 어떡해요. 본사에 화재가 난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죠."

원모가 끼어들었다.

"그럼 불이라도 내는 게?"

미친놈.

저놈 농담한 거 아니다.

"죽을래?"

"죄송합니다. 상무님."

"그리고 이번에 거마비 안 받고 주총장에 온 총회꾼들한텐 절대 봉투 주지 마."

"네? 그러다 주총장에서 난리라도 치면요?"

"이번에 확 잡아야 해. 줄 때 받지 않으면 아무리 깽판 쳐도 한 푼도 못 챙긴다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줘야지."

"진작 그래 주시지. 하필이면 왜 제가 주무할 때만……."

미안한 마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난 일을 떠올려보니 이런 일이 부지기수였다.

자기들이 담당할 때는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다가 막상 상사가 되고 나면 후임자들을 닦달하면서 개선해라 바꿔라 온갖 간섭을 하기 시작한다.

지금이 딱 그 꼴이다.

* * *

주총일 당일.

아침부터 주총장 주변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일부 총회꾼들과 재무팀 직원들이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험상궂게 생긴 총회꾼 한 명이 팔까지 걷어붙이고 삿대질을 섞어가며 고함을 쳤다.

"아니, 갑자기 왜 이래? 원래 주던 건 줘야 할 거 아냐?"

"저희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깐 오지 마시고 드릴 때 받고 마실이나 가시라고요. 왜 진작 안 받으시고 이제 와서."

"아니 나 안 돌려보내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는 지침이 내려와서요. 당일에 찾아오시는 분껜 절대로 챙겨드리지 않습니다."

"뭐라고?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그래?"

나 같으면 '딸랑 한 주 있는 주주시잖아요.'했겠지만,

경험이 많지 않은 학형이는 안절부절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까닥하자 학형이가 달려왔다.

등을 토닥이며.

"학형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상무님."

"쫄지 마. 사실 저런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워."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뜨며.

"네?"

"목소리만 큰 사람은 막상 멍석 깔아주면 한마디도 못 하니깐 너무 쫄지 말라고. 진짜 무서운 사람은 저런 사람이야."

손가락을 뻗어 노신사 한 명을 가리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계산기까지 두드리며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딱 봐도 숫자에 빠삭한 재무 출신 총회꾼인 듯.

원래 빠꼼이가 제일 피곤한 법이다.

학형이도 의미를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입구 쪽에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천하제일 3대 주주인 정영태 교수다.

매년 온다더니 정말이었나보다.

주총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가운 마음에 단상에서 뛰어 내려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자네 오랜만이구만. 지난번 여기서 봤을 땐 직원이었는데 지금은 단상에 다 앉아 있네."

몇 년 전 총회꾼으로 오해받았던 일을 꺼낸 거다.

"네. 다 교수님이 도와주셔서죠."

"돕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허허"

자리를 안내해드리고 단상 위로 돌아가려는데 입구 쪽에 또다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호창변호사.

예전 사모펀드 앨리스의 대리인이었던 사람이다.

그 당시 천하제일 지분을 늘려가며 지분싸움 거는 척하고 먹튀 해버리는 바람에 한참 곤욕을 치렀던.

이호창변호사는 단순히 참석 주주 명단 확인만 하는 게 아니라 직원에게 뭔가를 건넸다.

분명 의결권 위임장일 거다.

이번엔 누구의 대리인 자격으로 방문했을까 궁금했다.

조용히 원모에게 손짓했다.

"저기 저 검은색 양복 입은 사람, 이호창변호사 알지?"

원모도 한눈에 알아봤는지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니. 저 자식이 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원모야, 조용히 가서 누구 위임장 받아온 건지 확인 좀 해 봐."

"넵. 상무님."

스파이라도 된 것인 양 한껏 자세를 낮추고는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차라리 그냥 가는 게 났지 어정쩡한 폼에 아예 대놓고 회사 직원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격이었다.

잠시 후 원모가 연단으로 헐레벌떡 뛰어 올라왔다.

"헐 상무님. 대박……. 위임받은 지분이 10%도 넘습니다."

"뭐라고? 에이 말도 안 돼. 공시 한 번도 없었잖아."

상장법인의 주식 5%를 초과 보유할 경우 보유목적을 공시할 의무가 있지만, 최근에 어느 누구도 추가로 보유했다는 공시를 낸 적이 없었다.

"하나가 아닌데 말입니다. 자산운용사 여러 군데랑 외국계 펀드까지 꼈다고 하는데요?"

"뭐라고?"

소수 지분을 연합해서 회사와 대항하겠다는 얘긴데.

이호창변호사는 분명 조동욱과 한패일 거다.

결국 조동욱이 자기 편을 알음알음 이렇게 많이 모아놨다는 뜻이다.

안심하면 안 되겠다.

주총이 시작되고 천하제일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주주인 척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대본을 아직 못 외웠는지 포스트잇에 써 붙여놓고 열심히 연습 중이었다.

외우기 어렵기보단 긴장한 탓일 거다.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긴장하는 건 당연하다.

그 직원들을 보자 몇 해 전 맨 뒷줄 구석 철제의자에 쪼그려서 손들고 쪽지 대본을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의장인 대표이사의 인사말이 끝나고 본격적인 안건에 대한 발표가 시작됐다.

"자 그럼 제1호 의안 천하제일 지주의 별도 및 연결 재무제표 승인의 건에 대한 표결이 있겠습니다."

드디어 원모 차례가 왔다.

매년 재무팀 주무과장이 첫 번째 안건에서 대사를 친다.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의장!"

"네. 말씀하십시오."

준비된 각본에 따라 진행요원인 학형이가 원모에게 다가가서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대사 칠 차례.

"먼저 글로바……알. 경제 위기이이……."

발표 공포증이라도 있는지 버벅대기 시작했으며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갈라지기까지 했다.

여기저기 '푸웃'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자 원모는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발표도 아니고 겨우 질문일 뿐인데 저거 하나 못 하다니.

원모도 창피했는지 두리번거리다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입 모양으로 욕이라도 박아 주고 싶었지만, 간절히 도와달라는 표정에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그저 힘내라는 듯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행히 안정을 찾은 듯 질문을 이어갔다.

"먼저 글로벌 대내외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 해 동안 회사를 성장시켜주신 의장 및 모든 임직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리 준비해주신 자료로 내용 확인을 다 했으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안건은 박수로서 의결할 수 있기를 제청드립니다."

떨림은 줄었지만 마치 국어책 읽듯 감정하나 안 실린 딱딱한 어투가 귀에 심히 거슬렸다.

드라마였으면 발연기 한다고 바로 채널을 돌렸을 텐데.

한편, 입사 이래 그 오랜기간 동안 토시 하나 안 바꾸고 똑같은 멘트를 날릴 수 있는지 너무 낯 뜨거워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내년엔 반드시 대본을 대폭 수정해야겠다.

원모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준비된 듯 여기저기서 직원들이 외쳐댔다.

"옳소."

"좋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대표이사가 발언했다.

"주주분들의 의견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번 안건은 박수로써 의결하기로 하겠습니다. 혹시 이견 있으신 주주분 계십니까?"

또다시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아닙니다."

"없습니다."라고 외쳐댔다.

대표이사가 의사봉을 집어 든 순간 누군가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의 있습니다."

역시 이호창변호사.

대본에 없던 상황이라 학형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눈짓을 보내자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고는 마이크를 이호창변호사에게 건넸다.

늦게 줬다고 째려보며 마이크를 확 낚아챘다.

"본 안건에 대해서는 제게 의결권을 위임한 주주분들께서 반대의견을 표명했으며 표결에 붙일 것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역시나 대본에 없던 상황이라 대표이사도 안절부절못했다.

IR파트장 김철수부장이 단상 위에 올라 대표이사에게 쪽지를 건넸다.

"으음……. 사전투표 집계 결과 이미 과반 이상의 찬성의견을 보였던 바, 표결에 붙이지 않고도 가결될 수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이호창변호사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건 표대결을 해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사고가 터졌다는 생각에 아니나 다를까 봉투도 못 받고 씩씩거리며 지켜보고만 있던 총회꾼들까지 일제히 가세하여 언성을 높였다.

"옳소. 표결하라."

"이게 무슨 공산당이냐? 박수치고 넘어가게!"

마치 각본이라도 짠 듯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내일 신문 기사의 제목이 대충 나왔다.

'아수라장 된 천하제일 주총장'

'천하제일 주주총회 대환장 파티!'

3대 주주인 정영태 교수도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 주주분들 말씀대로 뚜껑은 열어봐야 하니 표결을 해 보시죠."

사실 이변호사의 편을 들었다기보단 참석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자는 의미에서 요청한 것일 거다.

오히려 회사를 위한 마음이 엿보였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사전투표 결과 찬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넘기면 안 될 분위기인데.

김철수부장에게 턱짓하자 알아듣고는 대표이사에게 귓속말했다.

실로 몇십 년 만에 해 보는 주총장에서의 실제 표결.

너무나 오래된 나머지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꽤 시간이 오래 지체됐다.

물론 결과는 가결.

아무리 10% 넘는 의결권을 모아놨다고 하더라도 아직 조회장을 비롯한 우호 주주의 세에는 한참 못 미쳐서 압도적인 차이로 의안이 통과됐다.

대표이사가 연단에 올라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제1호 의안은 원안대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선언과 동시에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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