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진퇴양난
오후 늦은 시간부터 인터넷 신문에는 기사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천하제일 그룹 조인철 회장의 숨겨진 아들.'
섹시한 제목에 출생의 비밀을 담은 소재는 역시 톱뉴스감이다.
뜨자마자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단골 소재가 현실에서 일어났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기사 내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는데.
조동욱은 말 못 할 만한 사정으로 인해 아버지 조회장과 떨어지게 되었고.
보살핌은커녕 경제적인 지원 하나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유학까지 보내준 걸로 들었는데, 왜곡이 너무 심하다.
가난과 고난뿐인 성장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고도 한 번도 어긋남 없이 반듯하게 자라왔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혼자 힘으로 성장해서 결국 조회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가문에서 받아주었다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포장되었다.
"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자세하게 털어준 거 아니예요? 게다가 엄청 미화됐는데요? 이건 뭐 아주 개천에서 용 난 정도가 아닌데."
"그게 좀 이상해. 분명 난 그냥 사실확인 차원에서만 얘기해 준 건데 너무 자세한 기사가 실린 언론사가 있더라고. 후배들이 서운해할 정도야. 다른 데는 좋은 거 주고 자기들한텐 껍데기만 줬다고."
"그럴 리가? 그럼 우리 말고 다른 데서도 흘렸다는 얘기에요?"
"그래. 제일 먼저 자세히 터트린 곳이 우리 홍보실에서 관리하는 언론사래."
"네? 그럼 홍보실에서 일부러?"
내부에서라니 완전 막장이다
"그렇다고 봐야지."
"아니, 왜요? 회장님 의중 모른다고 결정하지 못했다면서요."
"그게……. 그 언론사 기자가 최동욱, 아니 이제 조동욱이지. 입에 잘 안 붙네. 하여간 조동욱하고 동기래. 유학 시절 동기."
"네? 그럼 조동욱 본인이 일부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본인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기사화된 걸 보니깐 맞는 거 같아."
조동욱은 톱기사로 이슈를 선점하면서 동시에 대내외적으로 천하제일 그룹의 장자라고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회장의 의중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러진 않았을 테니 조회장이 승인했거나 최소한 묵인이라도 했을 것이다.
"조동욱 그 친구 무서운 친구네요. 그럼 성환이는 어떻게 되죠?"
김부장은 성환이 처지를 떠올리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실 소생의 아들이니 아직 해 볼 만은 하다는 건데……."
김철수부장은 아직 모른다.
성환이 역시 정실 소생이 아니란 것을.
그렇다면 시간문제다.
최동욱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환이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 처지니 결국 자기가 장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기진 않을 것이다.
분명 결정적인 순간에 빵하고 터트리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을 거다.
한 주 만에 재개된 경영 전략회의.
지난주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까진 아무리 제일 잘 나가고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저 그룹 내에 젊은 임원 중 한 명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아들, 그것도 장자가 되어 나타났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임원들은 물론이고 대표이사까지 평상시처럼 끔뻑끔뻑 졸기는커녕 눈을 크게 부릅뜨고 각 잡은 채 앉아 있었다.
조동욱이 되어 주최하는 첫 회의.
회의라기보단 마치 백두혈통의 대관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원들이 충성맹세라도 하듯 경직된 자세로 조동욱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경청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생이라도 된 듯 노트를 꺼내 받아쓰기할 준비까지 했다.
"지난주 회의 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점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대표이사가 비굴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셨겠죠. 죄송하긴요. 허허."
자존심 같은 건 버린 지 오래.
벌써부터 딸랑딸랑 줄 섰다.
"제게 개인적인 신변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직책이나 업무가 바뀐 건 아니니 종전과 똑같이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과 어투는 매우 위압적인 게.
마치 '어디 한번 똑같이 대해보시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난주에 어느 부서까지 발표했었죠?"
경영지원실장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내 쪽을 흘끔거리더니 고소하다는 듯 한쪽 입술을 얄밉게 말아 올렸다.
"네. 재무팀에서 현안 보고하다가 말았습니다."
이렇게 얄밉게 나서는 사람 꼭 있다.
열불이 났지만 들이받을 마땅한 명분도 없고 그냥 노려보기만 했다.
"네. 그럼 재무팀 보고 마저 해주시죠."
조동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은 재무팀장인 내가 아닌 성환에게로 쏠렸다.
지난주에 이슈 없음 한마디로 정리했던 기억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자, 이번엔 어떻게 나오나 보자'라는 심산인 듯 팔짱까지 끼며 관전 모드에 들어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고요함 속에서도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신경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성환이는 헛기침을 한번 뱉더니.
"우리 재무팀 이슈 없다고 했었을 텐데요."
일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도 '지난주와 달라진 건 없다'라고 선언한 거다.
하지만 성환이 생각과는 달리 분위기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지난주에는 똑같은 성환의 말에도 엄숙한 분위기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어디선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하고 살짝 튀어나온 소리까지 들렸다.
순간 성환이 얼굴이 일그러지자 참석자들이 매우 놀란 듯 두리번거렸다.
누가 대담하게 웃은 건지 알고 싶다기보단 조동욱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일 거다.
조동욱이 나섰다.
"여긴 현안 보고를 하는 자리지 꼭 이슈만 공유하자는 자리는 아닙니다. 재무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려주시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조동욱 역시 한껏 자신감이 붙은 듯 가만있던 지난주와는 달라졌다.
참석자들 역시 말은 안 했지만 모두가 느끼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 그룹의 헤게모니가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성환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나서려는 거 같아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막아 세웠다.
흥분하면 일이라도 터질 거 같아 나서지 말라고 한 거다.
대신 내가 나섰다.
"재무팀장 천태평입니다. 루틴한 업무는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고 추진 중인 일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공유드리기 어려워서요. 접근 권한도 없는 분들께 말씀드리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기획조정실장이 다 들리게끔 비꼬았다.
"자기들만 알겠다는 거야 뭐야?"
훽 노려보며.
"왜요? 설마 우리 팀 관 파트가 무슨 일 하는지도 알고 싶은 겁니까?"
보고를 받는 것도 아니고 사실 관재파트 뭔 일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어쨌든 재무팀 소속이니 둘러대기엔 딱이다.
"아니. 내 말은 꼭 그런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조동욱 역시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는지 한마디 했다.
"자자. 그럼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멀찌감치 팔짱만 끼고 노려보고 있던 조윤경은 회의 도중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게 충격이 꽤 컸음을 알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성환이 자기 자리로 가지 않고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런 X발."
울분을 참지 못한 듯 서류를 테이블에 집어 던졌다.
"흥분하지 마라. 내 테이블이다."
"이깟 테이블이 문젭니까? 아까 기획조정실장 맞죠?"
"웃은 사람 말하는 거야?"
"네. 아니 어떻게 그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수 있지? 그것도 그자가?"
평상시 자기한테 깍듯한데다, 최소한 어느 누구 편도 아니었던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해 상심이 더 큰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 거 알잖아. 자기 한번 봐달라고 최동욱한테 어필한 거지. 아니지, 이제 조동욱이지. 아무튼 입에 짝짝 안 붙네."
"눈치만 보다가 이번에 노선 확실히 탄 거네요."
"그렇지. 앞으로도 이런 일은 점점 더 늘어날 거야."
고개를 훽 들어 올리며.
"설마 상무님도?"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난 재밌으면 웃잖아. 분위기 보면서 웃는 게 아니라."
* * *
며칠 뒤.
외근 나갔던 김철수부장이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무거운 표정으로 내 방을 찾았다.
"천상무. 곧 기사 하나가 뜰 거야."
"무슨 기사요?"
"천하제일 후계 구도에 관한 기사."
"아니, 아직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사건의 발생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대중의 관심을 받느냐 마느냐지. 마치 왕자의 난이라도 날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려는 거 같아. 혹시 알아? 기사라도 나오면 당사자들이 조급한 마음에 뭔가 실행에 옮길지? 언론사는 오히려 그걸 노리는 것일 수 있어."
"기사가 먼저 나간 후에 사건이 발생한다고요?"
"당연하지. 세상에 그런 게 얼마나 많은데. 언론은 여론을 수집하는 기능보단 여론은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 천상무도 잘 알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은 그걸 잘 몰라. 언론이 몰아갔기 때문인데 마치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한 거라고 착각하는 거란 걸."
"그럼 이번 주주총회는 쉽지 않겠는데요."
"그래. 총회꾼은 물론이고 기자들도 많이 올 거 같으니깐 준비 잘해야 할 거야."
오후가 되자 정말 한 언론사에서 기사가 하나 떴다.
'천하제일 후계 구도 안개 속으로'란 제목으로.
조회장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진 않았지만 숨겨온 아들을 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룹 최고위직에 앉히는 등 후계 구도의 중요한 축을 맡았다는 내용이었다.
기존 외아들 성환이와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예상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동욱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마치 승진한 것처럼 오해하게 써놓은 것도 모자라 정말 다툼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극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아, 완전 양아치네요."
"어쩔 수 없지 뭐.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조회수가 오르는데. 그런데 천상무 지금 주가 봤어?"
"네?"
재빨리 초록 창을 열어 천하제일 주가를 검색했다.
실적이 좋지 않아 한동안 슬슬 흘러내리던 주가가 며칠 전부터 갑자기 우상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전일 대비 5%가 넘게 상승 중이다.
"뭐야? 주가가 오르네요?"
"당연하지. 지분경쟁이라도 붙으면 주가가 뜰 거니깐 미리 사놓겠다는 거잖아."
"개미들이 사는 거예요? 아님 세력이라도 붙었어요?"
"며칠 전부터 외국계 증권사 창구에서 대량 매집한다는 말이 있었어. 외국인 보유 비중도 계속 높아지고 있잖아."
김부장 말대로 정말 지난주부터 외국인 보유 비중이 계속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렇다면 기사가 나올지 알았다는 거예요?"
"그렇지. 아니면 그쪽에서 일부러 기사를 낸 것일 수도 있고."
"그럼 주가 조작 아니에요?"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입증하겠어?"
"그러네요. 방법이 없겠네. 부장님. 혹시 어디서 집중해서 사들이는지 파악 좀 해주세요."
"알았어. 여기저기 좀 알아볼게. 그런데 그거 알아?"
"뭐요?"
"조윤경부대표 며칠째 출근 안 하고 있대."
그렇지.
지금 가장 초조한 건 조윤경이다.
깜짝 뉴스로 천하제일 그룹 장자에 등극하면서 컨벤션 효과를 제대로 누리는 조동욱이나 원래 장자의 위치에서 한 칸 내려온 듯한 위태로운 세자 느낌의 조성환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무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고 있으니 상대적 박탈감이 심할 것이다.
차마 이제 와서 다시 성환이한테 손 내밀진 못하겠고 그렇다고 조동욱 도와 성환이를 치자니 나중에 맞설 자신도 없고 진퇴양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