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조씨
전화 받으러 나간 최동욱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다들 당황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회의는 차주로 연기되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성환이 물었다.
"황당하네. 무슨 전환데 그렇게 가지?"
"예전에 최동욱 미행했던 병원 기억해?"
"네. 최동욱 어머니 입원했던 병원이요? 왜요?"
"거기 간 거 같아. 아무래도 뭔 일이라도 생긴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하더니 지하층을 눌렀다.
"뭐 하게?"
"가 봐야죠."
"네가 뭔데 그쪽 집안일에 끼려고?"
"우리 집안일이기도 하거든요. 장자인 내가 알아야지 누가 압니까?"
성환인 18층에 내리지 않고 지하층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별일이야 있겠냐 싶은 마음에 퇴근 후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옷 갈아입고 발을 닦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소리.
"병원인데요. 지금 바로 여기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개인 정비를 모두 마친 이때는.
설령 가슴 아프게 헤어진 첫사랑이 보고 싶다고 전화통을 붙잡고 울거나, 혹은 십 년 전에 돈 떼먹고 잠수 탄 친구 놈이 돈 갚겠다고 나오라고 해도 절대 나갈 수가 없다.
말 그대로 Off!
"안 돼."
"왜요?"
"방금 발 씻었단 말야. 난 발 씻으면 못 나가는 거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그래. 그리고 잠옷까지 입었으니깐 내일 얘기해."
"내일 또 오라고요?" 난 들을 수가 없잖아요. 통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답답해서 미치겠구만."
"답답한 건 너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가 이런 사이입니까?"
"그럼 잠옷 입고 같이 파자마 파티라도 할 사이냐? 내가 네 심부름꾼도 아니고 부르면 나가야 해? 시킬 걸 시켜야지."
성환이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도와주세요."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하지만 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지금 뭐라고 했냐?"
"도와달라고요."
아까보단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한 번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거다.
하지만 나한텐 씨알도 안 먹힌다.
"뭐라고? 잘 못 들었는데?"
"도와주세요. 제발요."
삼세번.
대꾸하는 순간 받아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세 번이나 도와달라는 말에 김 다 샜다.
회귀 전은 물론이고 회귀한 후에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 듯.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알았어.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알지? 청구서는 나중에 보낼 테니깐 그리 알아."
"네. 빨리나 와주시죠."
"지금 가니깐 괜히 나돌아다니다가 걸리지나 마."
옷장을 열었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외출에 새 양말을 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던 양말을 다시 신자니 축축해서 찝찝하고.
추운 날씨지만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을 수밖에.
하여간 도움 안 되는 놈.
* * *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는 길.
이상하게 오늘따라 신호등마다 다 걸렸다.
누군가 보고 있다가 내 차가 올 때쯤 신호를 바꾸는지 기가 막히게 바로 앞에서 빨간불로 바뀌고 있다.
신호대기 중 내 차 바로 앞에는 어디선가 많이 봤었던 음산한 기운의 유령차가 한 대 서 있었는데.
얼마 전 안가 다녀올 때 조회장이 보내줬었던 그 차종이다.
집 한 채 값 정도는 우습게 나가는 차가 자주 출몰하는 걸 보니 한국에 돈 많은 사람이 많긴 많나 보다.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자 앞차가 출발했다.
병원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앞차는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계속 내 앞에서만 얼쩡거렸다.
이 차 역시 병원으로 가는 중인가.
병원 정문에 도착하자 기사가 뒷문을 열어주는데 뒷자리에서 내리는 사람은 조회장.
같은 차종뿐만 아니라 바로 그 차였다.
조회장은 꽤 무거운 얼굴을 한 채 급한 걸음으로 병원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성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여기 602호 앞이요."
"회장님 오셨다. 지금 올라가는 중이니깐 빨리 피해."
"네? 회장님요? 이런……. 그럼 옆방 603호에 들어가 있을게요."
행여나 마주칠까 봐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 다음 한 층은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간병인 옷을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급하게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통화 중이라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지 나와 그대로 부딪쳤는데.
아주머니는 꽈당 쓰러지고 휴대폰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민첩하게 손을 뻗어 아주머니의 휴대폰을 잡았다.
Safe.
"괜찮으십니까? 아주머니?"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고맙다가 아닌 핀잔뿐.
"아니.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지,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부딪친 게 누구 잘못인데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다니.
하지만 간병하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을까 하고.
그냥 한번 참자 하고 핸드폰을 건네드렸다.
나도 모르게 슬쩍 시선이 쏠린 휴대폰 화면에는 조부대표라고 적혀있었다.
아주머니는 훽하고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통화를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방금 어떤 놈 때문에 핸드폰을 떨어뜨려서요."
아주머니는 휴게실에 목을 내밀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비밀 전화라도 하듯 입을 막고 통화하는데.
물론 난 다 들린다.
"네.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지병이 있었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
"약속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통화를 마치고는 휴게실을 나왔다.
무서운 얼굴로 내 쪽을 훽 한번 노려보고는 병실로 돌아가는데 방 번호는 602호였다.
성환이가 얘기했던 그 병실.
문을 넘는 간병인 아주머니는 어느새 측은지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변검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최동욱의 어머니 병실.
핸드폰에 적힌 이름 조 부대표.
그렇다면 조윤경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건데…….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고개를 푹 수그리고 603호로 들어갔다.
2인실 병실 한쪽 침대에 성환이 혼자 누워있었다.
"아까 온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어떻게 된 거야? 여기 환자들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말아서 내보였다.
"소주 한잔하라고 좀 쥐여줬어요. 좋다고 가던데?"
"얼마나 줬는데?"
"백이요. 한 두어 시간 신나가 놀다 오겠죠. 뭐."
"야! 두어 시간이 뭐야? 좀 아끼면 두 달도 놀겠구만."
벽 쪽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간간이 신음만 들려올 뿐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임종 때가 다가와서 조회장이 발걸음 한 모양이다.
수십 년만의 재회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미안한 마음.
애틋한 마음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을 거다.
잠시 후 조회장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미안하구료. 면목이 없어서 한 번도 나타날 수 없었네. 윤경이 애미한테도 미안하고."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잘못이니 누구도 원망 안 합니다. 가끔 티비에서 봤었는데 윤경이는 꽤 예쁘게 컸더라구요."
"그렇다네."
예전 조윤경의 유모였어서 그런지 정이라도 들은 듯.
"동욱아.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니? 아주머니도요."
최동욱과 간병인 아주머니가 나가자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회장님.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음……, 그래. 내 뭐든 들어주지. 말씀해 보시게."
"우리 동욱이요. 아들로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걱정 말게. 이미 받아들였네. 가족회의에도 참석하고 집안에서도 다들 인정했어."
"네, 들었어요.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성을. 이제 더 이상 제 성이 아닌 회장님 성을 물려받았으면 해서요."
"뭐라고?"
"왜요? 절대 안 되는 겁니까? 제가 주제도 모르고 선 넘은 건가요?"
임종 직전에 마지막 온 힘을 짜서 꺼낸 말.
사람이라면 외면하기 힘들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바로 울면서 '알았네. 내가 그렇게 하겠네.' 했겠지만, 조회장은 역시 결이 다르다.
결정하기 꽤 힘들었는지 끙끙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심한 듯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알았네. 자네 뜻대로 하겠네. 내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흐느끼는 것 같더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소리가 얇아져 갔다.
최동욱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호흡이 멈췄는지 '삐이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바뀌자 성환이도 느낌이 왔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굳이 들은 얘기를 해주진 않았다.
성환이 역시 임종을 지키러 온 것임을 알았기에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 * *
한 주가 흘렀다.
최동욱은 아무에게도 모친상을 알리지 않았을뿐더러 휴가 신청도 하지 않아 그냥 결근한 것처럼 되었다.
평소엔 휴가도 잘 안 가던 사람이 회의 도중 갑자기 뛰쳐나가 일주일씩이나 결근을 했으니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나쁜 짓 해서 구속됐다.'
'경쟁사에서 연봉 세배 주고 낚아채 갔다' 등등.
갑자기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봤어?"
"헐? 대박. 뭐야 이게?"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원모가 들어왔다.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땀 닦는 시늉까지 했다.
"문 앞에서 뛴 거 다 안다."
"헐! 아셨습니까?"
"티 엄청나거든.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이야?"
손을 쭉 뻗으며.
"대박 사건. 상무님! 조직도요."
"조직도가 왜? 빨리 말해 스무고개 하지 말고."
답답한지 원모가 내 컴퓨터를 열고 조직도에서 이름을 검색했다.
창에 친 이름은 조동욱.
엔터키를 치자 최동욱의 얼굴이 떴다.
하지만 이름 란엔 분명히 조동욱이라고 적혀있었다.
사진, 부서명이나 전화번호는 그대로인데 오직 성만 바뀌어 있었다.
역시 조회장이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거다.
"대박 아니에요? 전 그룹사가 지금 아주 난리 났습니다."
"그렇게 소문이 빨리 돌아?"
"네, 쫙 퍼졌어요. 어쩐지 젊은 사람이 그렇게 잘 나간다라더니, 이제 우리뿐만이 아니라 그룹사 전체가 안 거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철수부장도 바로 들어왔다.
"천상무 들었지?"
"네, 방금 원모가 얘기해줬어요. 혹시 언론사 쪽에서 낌새라도 챘나요?"
"벌써부터 난리야. 전화통이 불나기 시작했어. 후배들 전화도 계속 씹고 있는데 더는 못 버틸 거 같아. 모른다고 할까? 아니면 사실대로 말해줄까?"
"그냥 좀 알아보겠다고 하면 안 돼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 그간 도움 준 사람들도 다 떠난다고.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면 안 될까?"
"홍보팀은 뭐래요?"
"거기도 난리 났어. 아직 회장님 의중을 확인한 게 아니니깐 아무도 결정을 못 해. 조윤경부대표도 묵묵부답이고."
"부장님. 그러면 점심시간까지 내부 스탠스 확인해보고 그때까지도 결정 안 되면 후배들한테만 살짝 얘기해주세요. 맞다고."
"그래도 돼?"
어차피 조회장이 이미 결정한 사항인데다 되돌릴 수도 없다.
"언젠간 터질 건데요. 우리가 이미 후배분들한테 받은 것도 많고 나중에 다시 부탁이라도 할라면 이참에 보답해야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고마워 천상무"
"네."
늦게 출근했는지 오후가 돼서야 성환이 찾아왔다.
고개를 늘어뜨렸지만 침울한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너도 몰랐었어?"
"네. 설마설마했는데. 나나 누나 의견은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회장님께서 그냥 결정해버리셨어요."
"그래.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잖아."
몹시 못마땅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아니, 법적으로까지 형이 될 줄은 몰랐죠.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둘째 아들 돼 버렸네."
"어차피 달라질 건 없어. 친자확인 소송이라도 하면 무조건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깐. 그냥 올 게 좀 빨리 왔다고 생각해. 그런데 조윤경은 뭐래?"
"누나도 성까지 바꿀 거라곤 생각 못 한 거 같아요. 충격받았는지 아무 말도 안 하던 대요."
아무래도 오늘부로 이니셜이 바뀔 거 같다.
J2는 조윤경에서 최동욱, 아니 조동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