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스위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환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젠 또 다 뒤집어놓을 것처럼 하더니 왜 갑자기 순한 양이 됐지?"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 뭔 소리래."
"아니야 그냥. 내가 뒷다리 잡아서 뭐 하게? 사업회사에서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는데 일단은 지켜보다가 잘 안 되면 그때 책임 묻지 뭐."
"그땐 저 사람들 다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겠지. 물론 그땐 나도 없을 거다.'라고 입술까지 삐져나온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한 층인데 그냥 계단으로 내려가시죠."
"그럴까?"
비상구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서자 아래층에서 누군가 통화를 하는지 중저음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재파트장 이병헌이었다.
"쉿! 밑에 관재……."
성환이가 조용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다행히 이병헌이사는 우리가 나온 소리를 못 들은 듯 통화를 계속했다.
"네. 내일 12시에 L호텔 중식당으로 오라고 전달했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아무도 배석 안 하는 걸로 하고 그쪽에서도 통역사 없이 한국말 할 줄 아는 직원 한 명만 나오기로 했습니다."
"……."
"이 업체 역시 고객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사람들이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
"네. 알겠습니다."
자기 팀원들에게까지 숨겨야 할 내용인지 복도까지 나와서 몰래 통화한 거다.
통화 상대방은 물론 조회장.
이병헌이사가 통화를 마치고 복도를 나가자 성환이 조용히 물었다.
"방금 들었죠? 회장님이라고 부른 거? 그리고 L호텔 중식당 어쩌고 한 거 같은데?"
"내일이 마지막 주 수요일이잖아."
"맞네. 불도장! 누구랑 약속 잡은 거지? 혹시 들었어요?"
"누군지는 말 안 했어. 그냥 조회장님이 고객이라고만 했지."
"마지막 주 수요일 점심을 같이하다니, 엄청 중요한 사람이겠네."
"내일 가서 들어보면 알겠지."
"네. 내가 회장님 방 옆 방으로 예약해 놓을게요."
바로 통화하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자 손을 뻗어 만류했다.
"잠깐! 동작 그만!"
"왜요? 지금 당장 예약해야죠. 예약 꽉 찼다고 하면 어떡할라고."
"그게 아니라 주문은 하지 말라고. 주문해 놓을 거면 네 거만 해."
불은 짜장은 절대 사절이다.
뭔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11시 반.
성환이와 함께 조회장이 항상 들어가는 5번 방 바로 옆 방으로 안내받았다.
메뉴판을 건네받기도 전에 앉자마자 주문부터 했다.
"전 불도장으로 주세요. 네 건 네가 알아서 시켜."
"그거 원래 비싸서 안 먹지 않나? 오늘따라 웬일이지?"
"상황이 달라졌잖아. 천하태평 땐 결국 내 돈 쓰는 거였고. 지금은 법카가 있잖아."
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게 바로 대리인비용이구나."
"이게 어디서 주인행세야? 너도 아직 주인 아니거든? 엄밀히 말하자면 회장님 역시 30%밖에 안 되고."
"30%면 꽤나 높은 거거든요."
"알았다. 그 정도면 반쯤 주인 인정"
성환이 말대로 다른 대기업들은 10%도 채 안 되는 소수지분으로 황제경영을 일삼듯 하지만 그나마 천하제일은 조회장의 지분비율이 높은 편이긴 하다.
티격태격하는 사이.
옆 방에서 질질 구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조회장이 온 거다.
우리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마주칠 뻔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옆 방에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제임스강이라고 합니다."
"스위스분이라고 들었네만. 한국말을 참 잘하시는구만."
"네. 저희는 주요 국가별 출신들이 다 있어서 고객님들마다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통역을 맡기다 보면 고객님 비밀이 새 나갈 수도 있으니깐요."
"그렇구만."
"우선 저희 쪽에 계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위스 사람에 계좌라니.
스위스 은행 직원임이 분명하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출장 서비스.
스위스에선 아주 유명한 대형은행부터 간판도 없는 작은 프라이빗뱅크까지 고객을 위해서는 전 세계 어디든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소문만 그럴 뿐 진짜일 줄은 몰랐었다.
더군다나 한국말 하는 직원까지 따로 두고 있다니.
한국에도 계좌 튼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다.
"다른 은행들 이용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은행 역시 이율은 없으며 보관료 명목으로 매년 1%의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이자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보관료까지 받겠다니.
말 그대로 마이너스 금리다.
역시 전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설령 검찰이나 국가정보기관 등 어디에도 계좌의 소유주를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으므로 그 정도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게다가 이렇게 출장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요청하신 대로 세 개의 계좌번호입니다. 입금 후에는 오직 고객님께서만 인출하실 권리가 있으며, 혹시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셨을 경우에도 상속인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모두 알고 있어야지만 인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돈 나도 알고 있네."
철저한 비밀에 붙인다더니 상속을 받는데도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싱가포르 회사를 팔고 손에 쥘 금액을 비밀계좌로 나눌 생각인가보다.
그나저나 세 개의 계좌라면 조윤경, 조성환은 물론 최동욱까지 한자리 차지한다는 건데.
비율은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최동욱이 상속 플랜의 한 축이 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모든 조건에 동의하시면 여기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스윽스윽 볼펜 끄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마무리된 건가?"
"네. 저희 고객이 돼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식사 주문하실까?"
"아닙니다. 저희는 고객님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없는 게 규정이라서요."
"차 한잔도 그런가?"
"네."
"알겠네. 그럼. 담에 또 보세."
사인만 받고 쿨하게 나갔다.
식사 한 끼는커녕 대화 중에도 이름이나 직함 같은 건 일절 붙이지 않고 오로지 고객님이라고만 부르는 걸 보니 역시 비밀보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다.
"뭐래요? 회장님이 누구랑 만나고 있어요?""
"벌써 갔어. 회장님이 스위스 은행에 계좌가 있는 거 같은데. 알고 있었어?"
"당근이죠. 스위스에 계좌 없는 사람이 어딨다고?"
이놈이 재벌 2세란 걸 잠시 잊었었다.
한국의 재벌들은 대부분 비자금을 조성해서 딴 주머니를 차고 있으니, 스위스 은행 계좌 몇 개쯤은 다들 갖고 있을 거다.
전쟁범죄자, 독재자와 중남미 마약상 및 정치인을 비롯해 한국 대기업 총수들도 스위스 은행의 주요 단골 직종 중 하나라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난 없다. 그러는 넌?"
"글쎄요. 모르는 거죠, 뭐."
말투에선 조회장이 자기도 몰래 하나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옆방에서 들은 얘기를 간략히 해주었다.
하지만 성환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져 갔다.
"왜 그래? 계좌를 세 개 만들었다고 해서 그래?"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최동욱이?"
성환이 역시 최동욱이 꼈다고 생각한 거다.
"그건 아직 모르잖아."
"뻔하죠. 뭐"
"하나에 몰빵할 건지 1/3씩 나눌 건지 누가 알아?"
"비밀계좌에 넣을 거면 한두 푼이 아니란 얘기잖아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전부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좌절한 거다.
"현금이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천하제일 주식이지."
"현금이 있어야 차명으로 주식을 사든지 상속세를 내든지 하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 * *
보통 회사를 인수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이번 인수 건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빠르게 진행됐다.
전자결재 후 계약체결과 대금 지급까지 불과 일주일 만에 모든 절차가 완료됐다.
천하제일화학이 지급한 그 대금은 케이맨 제도 등 여러 경로를 거쳐 결국 조회장이 만든 세 개의 계좌로 나눠서 꽂히게 될 거다.
인수자금 인출 건을 승인하고 자리에서 낮잠을 청하는데.
따르르릉.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내 달콤한 낮잠이 싹 달아났다.
경영지원실장 비서 전화다.
"상무님. 오늘 경영 전략회의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에는 참석하실 거죠?"
"네? 또? 벌써요?"
"벌써긴요. 한 달에 한 번인데. 오늘 첫째 주 금요일이잖아요."
꼭 잡아도 이런 날로 잡는다.
불금에 그것도 아주 늦은 오후.
회의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참석한 임원들의 부서원들 역시 집에 가지 못한다.
행여나 사무실로 복귀했을 때 부서원이 아무도 없으면 바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다음 주부터 탈탈 털리게 될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늦게까지 고생하는데 감히 먼저 갔다고?
할 일이 없나 보지?
다음 주부터 어디 두고 보자.
뭐 이런 마음일 거다.
물론 나도 회귀 전엔 그랬었고.
"잠시만요. 좀 이따가 참석 여부 알려드릴게요."
"네, 상무님. 바로 전화주세요."
바로 성환이를 호출했다.
"왜요?"
"오늘은 어디로 갈까?"
"네?"
"오늘 경영 전략회의 있다잖아. 지난달엔 주거래 은행 사람들 만난다고 했고. 이번엔 뭐라고 하지?"
"왜요? 오늘 또 안 가게?"
"당근이지. 거기 가서 뭐 하게? 괜히 우리 때문에 팀원들 퇴근도 못 하고 기다릴 게 뻔한데."
"핑계는……. 그냥 퇴근하라고 하면 되지. 그리고 회의를 들어가야 요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죠."
"전자결재만 들여다봐도 알거든?"
"아니. 오늘은 들어갑니다."
"가고 싶으면 너만 들어가든지. 난 외근 갈 거니깐."
성환이 짜증을 온 얼굴에 가득 담아 노려봤다.
"아, 쫌! 내가 혼자 어떻게 들어가요. 재무팀장 들어가는 자리에 배석하는 거면 몰라도. 정 그러면 내가 재무팀장하고 상무님이 파트장 하든지요."
"야. 난 너 밑에선 하루도 안 한다고 했잖아."
"그럼 같이 들어가든지."
사실 귀찮은 것도 있지만 더 들어가기 싫은 이유는 온갖 것들을 물어보기 때문이다.
'천상무. 이건 세무 리스크가 있나?'
'이번 건은 어떤 리스크가 있지?'
'그럼 대안이 뭐지?' 등등
이렇게 당연히 자기들이 알아봐야 할 걸 가지고 괜히 재무팀 일인 것처럼 몰아서 떠넘기려고 하는 게 눈꼴시어서다.
"알았어. 대신 대꾸할 거 있으면 네가 대신해. 우리가 무슨 리스크 감별사도 아니고 자기들 책임 회피만 할라고 무작정 물어보는 거 몰라?"
"뭐 하러 답해요? 그냥 자기들이 파악하라고 하면 되지."
진작에 이놈한테 답하라고 할 걸 그랬다.
대회의실로 들어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방향을 보자 역시 조윤경이 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 오늘은 들어왔네.' 하고 쳐다본 거다.
최동욱 역시 미리 와서 의장석에 자리했다.
경영전략본부에서 주관하는 회의이기 때문이다.
회의가 시작되자 각 부처 임원들은 열심히 자기 부서가 하고 있는 일을 나불거렸다.
마치 회사 일은 자기들이 다 하고 있는 것인 양.
대표이사는 역시 자리만 가운데 상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 회의 도중엔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어쩌면 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의장인 최동욱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재무팀에서는 의견이나 안건 내실 게 있으십니까?"
"네. 재무팀 조부장이 대신 설명드릴 겁니다."
성환이에게 나서라고 턱짓하자 마지못한 듯 일어났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네, 저희 재무팀은…… 음……. 이슈 없습니다."
웃음 또는 최소한 피식거림이라도 한 번 나올 법했지만, 엄숙한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역시 성환이다.
어떠한 것에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는.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최동욱의 핸드폰이 울렸다.
회의 시간에 벨 소리라니.
이럴 사람이 아닌데.
최동욱이 번호를 보고는 당황한 듯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전화라서 잠시만."
바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귀를 기울이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머니가요?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
"네.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어찌나 급했는지 회의실로 돌아오지도 않고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