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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74화 (174/191)

174화 조회장

용역계약 체결 건이면 몰라도 M&A 건을 전자결재에 안 태우고 서면으로 할 순 없었을 거다.

성환이와 원모에게 합의 참조로 공유했다.

바로 확인했는지 밖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게?"

성환이 노크도 없이 불쑥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뭐에요 이거? 아무 설명도 없이 왜 나한테 보냈지?"

"말 그대로 합의 참조잖아."

"그러니깐 참조가 뭐냐구요?"

이런 식으로 받자마자 토스하는 걸 처음 겪어본 모양이다.

"내가 합의 버튼을 누를지 반려할지 결정할 수 있게 내용 파악해서 보고하란 얘기잖아. 꼭 말해야 알아?"

"네? 보고요?"

"그래. 그게 네 역할이야. 꼬우면 네가 재무팀장하든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네. 보고……. 해드리죠."

"그래. 내일 아침까지. 구두로 오케이?"

살짝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긴 채 답했다.

"네네."

성환이는 방문을 나가자마자 원모를 불렀다.

성환이 역시 바로 토스하려나 보다.

다음 날.

성환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오늘까지 보고하라면서요."

"결론이 뭐야? 합의해? 아님 하지 마?"

"합의하시죠."

"이유는?"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습니다."

"하자가 없으면 인수해도 된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첨부된 실사보고서 보니깐 세금 꼬박 잘 내서 이슈도 없고 우발부채나 부외부채도 없대요."

"없는 게 아니라 발견하지 못했다 일 걸 아마?"

"그게 그거 아닌가?"

"완전 다르지. 예전 상해회사 인수할 때 우발부채로 날린 걸 생각해 봐."

"아니. 그때야 작은 로컬회계법인에서 실사받아서 그렇지, 우리는 지금 제일 큰 회계법인에서 받았잖아요?"

"큰 데라고 확신까지 주진 않아. 아무튼 이슈 없으면 끝이야? 달라는 대로 그냥 다 주는 거야? 중요한 건 가격이잖아."

"평가보고서 보니깐 적정 가격인 거 같은데요 뭘."

"그거야 결론을 먼저 내놓고 나중에 숫자를 맞춘 거니까 그렇지. 인수한 후에 예상 실적 그대로 안 나오면 누가 책임질 건데?"

"책임?"

"당근이지. 1,000원 가치라고 평가해놓고 실제 100원짜리밖에 안 되면 회사가 900원 손해 보는 거잖아. 그 책임을 누가 질 거냐고?"

"음……."

역시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맞아. 아무도 책임 안 져. 그때쯤이면 여기 결재한 사람 중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걸?"

"그럼 책임질 사람을 정하잔 겁니까?"

"아니. 책임질 상황을 아예 만들지 말자는 거야. 제대로 파악하자고. 첫째 인수를 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한지? 둘째 가격은 적정한지? 판단 후에 다시 보고해."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며 답했다.

"네."

오후에 다시 찾아온 성환이는 뭔가 해답이라도 찾은 듯 자신 있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상무님! 합의하지 마시죠."

이제는 자연스럽게 두괄식으로 말할 줄 알게 됐다.

"이유는?"

"인수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요. 꼭 이 회사를 통해야만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인수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아요. 추정손익을 얼토당토않게 부풀려 놨더라구요."

제대로 파악했다.

내가 보기에도 평가보고서가 뻥튀기돼 있었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매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걸로 해놔서 보고서만 보면 아주 좋은 회사를 헐값에 사는 것처럼 생각할 정도다.

"살 필요도 없는데 값까지 비싸단 말이지?"

"네."

"오케이. 수고했어."

전자결재 창을 열고 반려 버튼을 눌렀다.

지주사 재무팀은 필수 합의 부서이기 때문에 반려할 경우 그냥 빠꾸다.

무시하고 최종 결재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네. 실장님."

"당신 뭐야? 말 한마디도 없이 갑자기 반려 처리해 버리면 어떻게 해? 이거 관계사 간 다 합의 끝난 일이란 거 몰라? 조부대표님이랑 최부대표님도 이미 합의한 건이라고."

조윤경과 최동욱이 합의한 걸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반려했냐고 따지는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솓구쳤는지 차마 욕은 못 하겠고 짜증을 마구마구 쏟아냈다.

"구리다네요."

"구리다니? 전문가들이 다 문제없다잖아."

"우리 파트장인 조성환부장이 구리다고 반려하라잖아요."

"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마지못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 돼. 이번엔 어쩔 수 없어. 그냥 합의해."

성환이 핑계까지 안 먹히고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조회장의 의중이라는 얘긴데.

"그럼 이렇게 하자고."

"네?"

"기안부서랑 합의 부서들 다 불러다가 회의 한번 하지."

일대 다수로 다구리하겠다는 건데.

꿍꿍이를 알고 있는 이상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러죠. 장소 시간 결정되면 공유해 주세요."

"팍……."

뚜뚜뚜뚜.

수화기를 세게 던져버리듯 끊었다.

자기 기분 나쁘다고 이렇게 티 팍팍 내는 사람들 어딜 가나 꼭 있다.

* * *

지주사 대회의실.

천하제일화학에선 담당자는 물론 대표이사까지 참석했고 우리는 합의부서장인 조윤경, 최동욱, 경영지원실장과 내가 자리했다.

물론 조성환을 달고 갔다.

먼저 기안부서인 천하제일화학 담당자가 일어나서 발표했다.

사실 발표라기보단 오히려 '불러서 오긴 했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식으로 투정 부리는 데 가까웠다.

더 들을 필요도 없어 손을 들었다.

"주저리주저리 필요 없고 이 회사를 사야만 하는 이유가 뭐죠?"

"네.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입니다."

"이 회사를 통하지 않으면 원료 확보가 안 되나요?"

"그건 아니지만, 물량 확보나 거래비용 절감 등 확실히 도움은 됩니다. 이슈도 없고 이익률도 좋아 금상첨환데요. 왜 이걸 안 사죠?"

"그러면 진작 사면되지 왜 십 년간 거래비용만 이렇게 뜯겼죠?"

곤란한 표정으로.

"거기까진 저도. 기획팀 맡은 지 일 년도 안 돼서요."

"숫자만 놓고 보면, 지난 십 년간 실컷 뽑아먹다가 이제는 아예 백 년 치를 한꺼번에 땡기려는 거네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주주는 아주 좋겠어요. 아주 노났네, 아주."

살짝 빈정대자 듣고만 있던 조윤경이 나섰다.

"그래서 뭐가 문제야?"

"금액이 터무니없잖아요."

"보고서 숫자 보면 적정한 가격이라잖아. 그리고 십 년간 사업 키우느라고 고생한 주주가 목돈 좀 챙겨서 Exit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 회사 주주가 키운 겁니까? 우리가 키워준 거지?"

"그게 무슨 말인데?"

"이 회사의 매출 대부분이 우리와의 거래잖아요."

조윤경이 할 말이 없는 듯 씩씩거리기만 하자 화학 대표가 나섰다.

"그러니깐 우리가 인수하자는 거죠. 수수료라도 아껴보자고."

"동종업계보다 마진율이 너무 높잖아요. 전 천하제일화학이 비싸게 사준다는 걸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데요?"

"그래서?"

"여기 말고 다른 업체에서 샀으면 더 싸게 살 수 있었을 거라구요. 아무 위험 없이 중개만 하는데 마진율이 10%가 넘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동종업계는 1~2%도 어렵다는데."

"그만큼 경쟁력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만큼 우리가 챙겨줬다는 얘기잖아요. 당신들이 비싸게 사주는 바람에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막말한다고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만 몰아쉬었다.

"여기랑 계약 끊고 다른 업체 통해 구매하는 거랑 M&A 하는 거랑 그룹 차원에서 뭐가 유리한지 파악하고 보고서에 첨부하세요. 그거 보고 나서 후자가 유리하면 그때 가서 합의 누를 테니깐요."

쐐기를 박았다.

틀린 말 하나도 없으니 모두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입을 닫고 있었다.

최동욱이 마지못한 듯 웃으며 나섰다.

"천상무 말씀이 맞습니다. 비교하려면 여러 안중에서 최고안을 찾아야죠. 화학에서 팔로업 해주세요. 저도 일단 합의한 거 철회하고 보고서 확인한 다음에 합의 여부 다시 결정하겠습니다."

최동욱이 내 편을 들다니?

뭔가 수상하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바로 다음 날 알게 됐다.

출근해서 신문을 넘기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최동욱이다.

"천상무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성환이한테 말씀 주시면 되지. 왜 최부대표께서."

"개인적인 게 아니라 업무상 말씀 나누시려는 거라서요."

"그럼 성환이 빼고 혼자 오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지금 회사 정문에 차량 대기하고 있으니깐 타고 오시면 됩니다."

회사 정문엔 정말 검은색 두꺼운 세단 한 대가 이름처럼 유령같이 음습한 기운을 풍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반대 방향으로 뒷문이 열렸다.

자리에 앉자 왜 좋은 차를 타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호화스럽고 장인정신이 넘치는 최상급의 공간.

단순히 이동 수단이나 기계라기보다는 집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서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삶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드는 게 왜 집값만큼 비싼지 이해가 갔다.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응접실로 가자 조회장이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편하게 오셨는가?"

"네. 회장님 덕분에요. 안가가 가까워서 아쉽더라구요."

"그럼 회사로 들어갈 땐 좀 돌아가시게나. 내가 얘기해놓겠네."

이런 건 또 사양 안 한다.

"네. 감사합니다."

조회장이 고개를 돌려 최동욱을 쳐다봤다.

눈치 빠른 최동욱이 바로 자리를 피했다.

"그래. 논쟁이 좀 있었다고?"

"네."

"싱가포르 M&A건에 반대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네."

"네 맞습니다. 그룹에 이익이 되지 않아서요."

온화한 표정을 거두고는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자네가 회사를 위하는 마음 잘 알겠네. 하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네?"

"그 회사 사실 내 깐부일세."

"네? 깐부라뇨?"

전혀 몰랐다는 듯 과도하게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말 그대로 같은 편, 동반자라는 얘길세."

"정말이십니까? 아니 왜요?"

"상속 때문일세. 이제 나이도 있는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가기라도 해봐. 상속세 마련하려면 천하제일 지분 절반을 팔 수밖에 없잖나. 그럼 외국계 펀드들로부터 바로 경영권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네."

"네. 상속세율이 50%니깐요."

"우리 아버님이 조그만 가게 창업한 후로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이만큼 키워놨는지 아나? 내가 그냥 넋 놓고 이 천하제일을 뺏기게 놔둘 거 같은가?"

"네. 그럼?"

"그 회사 매각한 자금을 애들 종잣돈으로 해서 나중에 세금 낼 수 있게 해야지."

아니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회장님. 저한테 그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어떤 건지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지 말야."

"네?"

"하나같이 다들 겉으로는 슬슬 기면서 밸밸 꼬아가며 충성맹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딴 주머니 챙길 생각만 하지. 하지만 자넨 좀 달라."

"진심으로 충성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그 반대야. 그냥 객관적으로 대하는 거 같아서. 성환이랑 교감 같은 게 있는 것도 같고 말야. 자네라면 등에 칼은 꽂을 거 같지 않거든."

뭐 100% 다 믿을 순 없겠지만.

조회장 역시 자식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다 까놓고 얘기하는데 차마 반대할 수도 없고.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구색은 갖춘 후에 합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다른 친구들은 너무 나이브해서 말야.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하지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 없어."

"그럼 최동욱 부대표는요?"

훅 들어가는 바람에 충분히 당황할 법도 하지만 역시 노련한 조회장.

놀란 기색 없이 태연하게 답했다.

"글쎄, 그 친구라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냐만은."

보통 사람들 같으면 말투에서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지만 조회장은 결이 다르다.

절대 들고 있는 패를 남에게 보여줄 사람이 아니다.

며칠 후.

대회의실에 들어가자 조윤경이 심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다지 화목하지 않은 분위기에 가벼운 목례조차 나누지 않고 바로 안건으로 들어갔다.

화학 담당자가 내가 얘기한 대로 다른 업체와 거래했을 경우와 인수하는 경우를 비교한 보고자료를 발표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결국 M&A가 유리하다는 결론에 맞춰서 데이터를 뽑아놓았다.

사실 조건이나 가정 하나하나 파보면 문제가 튀어나올 거고 얼마든지 빠꾸시킬 수 있었지만, 조회장 얘기도 있고 해서 못이기는 척 가만있었다.

어쨌든 난 합의부서장일 뿐 결재자도 아닌데다 보완요청도 하는 등 최소한의 리스크 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니 할 만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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