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73화 (173/191)

173화 물밑작업

"저게 누구야?"

"수진이 아니에요?"

화면을 보여주자 성환이와 원모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어. 니들 선물이 트로이 목마일 줄이야."

원모가 제 발이라도 저린 듯.

"아니 이런 우라질. 내가 그딴 선물 절대 필요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었구만. 어쩐지 부득부득 산다고 우기더라니……."

"설마 네가? 선물 필요 없다고 했겠지."

"당근이죠. 직장 상사한테 주는 게 선물입니까? 뇌물이죠."

"듣고 보니 그러네. 그냥 버리면 되니깐 너무 화내지 마."

"어떻게 화를 안 냅니까? 내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요."

세상을 다 잃은 듯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얼만데 그래?"

"만 원이요."

"뭐라고? 배춧잎 한 장?"

"네. 천 원도 아니고 만 원이라고요."

분이 안 풀린 듯 씩씩거렸다.

수진이에게 속았다기보단 돈 만 원이 아까워서라니.

성환이는 분개하면서도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누굴까요? 누나? 아니면 최동욱?"

"둘 다겠지. 예전에 경영지원실장이 조윤경한테 재무팀에 한 명 심어놨다고 했었어. 거기다 얼마 전에 최동욱 제안을 내가 거부했었잖아. 결국 둘이 이렇게 작업하는 거겠지."

"음. 그럼 어쩌죠?"

"우선 수진이 불러서 캐 봐야겠지?"

"그래서 뭐 하게요? 괜히 그놈들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우리만 알고 있으면 되지."

"그래도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수진이가 나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지 아니면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수진이가 곧이곧대로 알려주겠어요?"

"그러겠지?"

"당근이죠. 차라리 역이용하는 게 낫지."

"역이용?"

성환이 도장을 집어 올리고는 흔들어댔다.

"이거요. 이거랑 비슷하게 생긴 페이크 도장 하나를 파서 책상 속에 넣어두는 거예요. 실제 쓰는 도장은 들고 다니면서."

"페이크 도장?"

"네. 같은 재질에 글자 모양만 살짝 다르게 해서 외관상 티 안 나게."

"가짜도장으로 수진이가 계속 찍게 하자고?"

"그래야 나중에 문제 생겨도 다른 사람이 가짜로 찍은 거라고 빠져나갈 수 있죠."

아하!

벌떡 일어서서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이미 찍어 놓은 건?"

"증거자료 있으니깐 설명될 거예요. 그리고 더 파다 보면 나중에 이것저것 증거들이 더 튀어나올 수도 있고."

"그러자."

"원모야! 수진이가 어느 부서 쪽 전표 맡지?"

"네. 주로 구매 쪽 맡습니다."

"구매? 그럼 매입가액 부풀려서 비자금 조성하고 있다는 건가?"

"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요."

비자금 조성 방법은 사실 생각보다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비용을 부풀리거나 수익을 축소시켜서 그 차액을 빼돌리는 구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설 현장에서 실제로 100명이 일하고 있으면 마치 200명이 일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서 100명분의 노임을 빼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제조업 회사도 매출채권, 즉 판매대금을 실제로 회수해 놓고는 못 받았다고 해서 손실로 처리해놓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돈은 사주의 주머니로 직행했다.

하지만 국세청 등 감독기관의 적발 능력이 향상되고, 그에 따라 기업도 점점 투명해지면서 이런 단순한 방법은 사라지고 고도의 방법으로 진화해갔다.

예를 들어 해외 거래처로부터 원료를 매입할 때 시가 200원짜리를 300원 주고 사는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차액 100원을 빼돌리거나.

필요도 없는 해외 거래처를 하나 껴서 중개수수료를 지급하거나.

수익성이 아주 낮은 해외회사를 비싼 값에 인수하면서 그 차액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등 방법이 점점 다양해지고 교묘해지고 있었다.

성환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지주사가 아무리 직접 사업을 한다고 해도 규모도 얼마 안 될 텐데 왜 지주사에서 그런 작업을 하지?"

"그러게. 차라리 식품이나 화학 같은 자회사들이 훨씬 원료 구매액이 클 텐데."

원모가 뭔가가 떠오른 듯.

"혹시 계열사 서류까지 도장 찍는 거 아닐까요?"

"계열사가 기안한 거면 전자결재 태우잖아."

"아니에요. 상무님. 전자결재는 필수가 아니잖아요."

기억을 떠올려보니 원모 말대로 회귀 전에도 계열사 서류에 가끔 사인했었다.

전자결재로 태우는 순간 나중에 혹시 검찰 조사라도 받게 되면 클릭 몇 번에 싹 다 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감추고는 싶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언제든지 내밀 수 있도록 서면 결재로 준비해 놓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갑자기 며칠 전 관재파트 방에서 엿들은 말이 떠올랐다.

도장 찍은 서류를 내려보낸다는 말.

지금 이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원모……."

"넵."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부르기도 전에 답부터 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제가 증거 모아보겠습니다. 수진이가 사인한 서류가 어떤 건지 그리고 어디서 받아서 어디다 전달하는지 등등이요."

내가 할 말을 다 해버렸다.

"그런데 권한이……."

"권한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주무니깐 정보 접근 권한이 상무님하고 비슷할 겁니다. 웬만한 임원들보다 훨씬 파워풀하니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필요하면 상무님께 요청하겠습니다."

내 생각을 읽었나?

시키기 전에 알아서 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고개를 돌려 성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왜요? 나한테 또 뭘 시킬려고?"

"시키기 전에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봐."

"쳇. 생각은 무슨 생각……."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는 게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티가 났다.

"난 관재파트 사람들이 무슨 작업하고 있는지 알아볼게요."

"다들 최동욱 수하일 텐데 어떻게? 거기다 낮이나 밤이나 문도 잠가 놓고 자기들끼리만 속닥속닥하는데."

"그 친구들 일이 원래 우리 가족들 일 봐주는 거잖아요. 방법이야 있겠죠."

"그런가? 알았어. 한번 캐 봐."

성환이 역시 툴툴대면서도 알아서 나설 줄도 알게 됐다.

* * *

며칠 뒤.

원모와 성환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원모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전표 사본이었다.

"상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수진이가 1차 결재하고 상무님이 최종 결재한 구매팀 전표에서 이상한 게 좀 있습니다."

"이상하다니?"

"기간별로 단가가 너무 들쭉날쭉한데다 타 매입처랑 비교해도 금액 차이가 상당하더라구요. 게다가 원료구매에 뭔 도움을 받았다고 중개수수료까지 지급하는 건도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자료를 보니 원모 말이 맞았다.

"음. 할라면 잘 숨기면서 하지 이렇게 티 나게. 하여간 아마추어들……."

성환이 의아한 듯 말했다.

"어? 그런데 난 결재한 기억이 없는데?"

"네. 파트장님 결재를 생략한 겁니다. 수상한 전표들 모두 조성환님 사인 없이 상무님 도장만 찍혀 있더라구요."

"그럼 최종 결재한 내가 다 책임진다는 의미네?"

"네. 맞습니다."

이런 씨댕.

이렇게 비자금 조성 작업에서 성환이가 쏙 빠지고 내가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구나.

성환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미안할 거 없어. 네가 알고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원모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상무님. 이거요."

도장이다.

외견상으론 선물로 받은 도장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

인주를 묻히고 종이에 찍어봤지만 역시나 뚫어지게 쳐다봐야지만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흡사했다.

"애초에 복제 불가능한 도장이어서요. 이거로 찍으면 위조로 판명될 겁니다."

"그래? 전혀 티 안 나네."

엄지와 검지로 비벼가며 말했다.

"네. 게다가 제가 사용감 있게 할라고 꽤 많이 만지고 찍어도 봤으니깐 수진이도 눈치 못 챌 겁니다."

"뭐라고? 그 손으로 만졌다고?"

"네. 완전히 똑같이 생겼죠?"

해맑게 웃으며 딸랑딸랑.

더럽지만 칭찬을 갈구하는 저 뜨거운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잘했어. 원모야. 많이 컸어."

"다 상무님 덕분입니다."

"그래."

말을 끝맺었지만 뭔가 더 남았는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질 않았다.

"뭔데 그래? 뭘 기대하는 건데?"

카드를 뽑아 들었다.

"법카 빌려줄까?"

"법카라면 저도 있습니다. 한도도 세구요."

"그럼 뭔데?"

"곧 있으면 성과평가 기간이잖습니까?"

히죽거리는 게 영 재수 없다.

"알았어. A 줄게. 됐냐?"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대꾸했다.

"네? 재무팀 주무과장은 원래 S 받는 거 아니에요?"

"그건 내가 주무할 때 얘기지. 올핸 그룹 실적이 별로라 우리 팀에 S가 몇 개 나올지 몰라. 딸랑 하나 나왔는데 네가 받아버리면 딴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떻게 생각하긴요. 나도 꼭 주무과장 달아서 S 받아야지 생각하겠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알았어. 노력은 해 볼게."

원모가 눈을 부릅뜨고는.

"헉. 그 말인즉슨 안 할 거라는 말씀 아닌가요? 상무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런 말 젤 싫어한다고. No면 그냥 No라고 하지. 뭐하러 기대하게 하냐고."

딴 건 다 까먹더니 꼭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역시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오케이. 내 걸 빼서라도 너한테 보태주마. 됐냐?"

"네. S입니다."

"알았다니깐 그러네."

"꼭 입니다."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성환이 넌 왜?"

"관재파트 알아봤는데요."

"그래? 어떻게?"

"탕비실에서 관재파트 막내랑 우연히 마주쳐 가지고요. 최동욱이랑 공유하는 것처럼 살짝 흘려주고 물어보니깐 바로 불더라구요."

이병헌이사였으면 안 넘어갔을 텐데 막내니깐 경험이 없어서 넘어간 거다.

넋 놓고 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오면 당황해서 불게 되어있다.

"그래서 지금 작업하는 게 뭐래?"

"싱가포르 회사 하나 인수한대요."

"그래? 난 못 들어봤는데?"

"곧 천하제일 화학에서 인수할 거라는데 아직 그룹 내 공유는 안 했나 봐요. 지금 실사 중이니깐 끝나면 바로 인수가격 협상 들어간대요."

보아하니 M&A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거다.

물론 싱가포르 회사의 주주는 차명이겠지만 조회장 본인일 테고.

싼 회사를 비싼 값에 팔아서 그 차액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려는 거다.

"혹시 그 막내 직원이 관재파트장한테 가서 너한테 불었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이제 못 써먹나?"

"제가 누굽니까? 바로 얘기했죠. 넌 나한테 당한 거라고. 약점 잡고 있는 데다 어차피 우리 집안을 위해서 일 할 거면 나한테 줄 서라고 했어요."

"그러겠대?"

"물론이죠. 달리 방법이 있겠어요? 손해 볼 것도 아닌데."

"잘했어. 틈틈이 정보 뽑아내 봐. 그렇다고 너무 믿진 말고."

"네. 아무도 안 믿어요.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요. 아니 눈으로 확인했어도."

내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인데.

"주주가 누군지는 물어봤어?"

"네.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라고만 알고 있답니다."

"그러겠지. 이병헌이사랑 최동욱 정도만 알 거야. 하지만 위로 올라가다 보면 결국 가장 꼭대기 주주는 회장님일 거야."

"음……. 그러겠죠."

자기만 배제되어 있다고 서운한 건지 성환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자금 조성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그 돈을 어디에 쓰냐는 건데.

지분승계를 위해서는 결국 그 돈이 조회장 자녀들에게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당사자가 모르고 있으니 아직 구획정리가 안 됐나 보다.

아니면 설마 성환이가 승계 구도에서 배제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조회장이 끝까지 자기가 쥐고 있겠다는 건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며칠 뒤.

띠링!

사내 인트라넷에 전자결재 문서가 도착했다는 알림창이 떴다.

클릭하자 결재화면으로 넘어가는데.

제목은 '싱가포르 C사 지분 100% 인수에 대한 건'

역시 성환이가 말한 대로 싱가포르 회사 M&A건에 대한 합의요청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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