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누굴까
볼펜 통에 넣으니 너무나 완벽한 은폐 엄폐.
아주 평범한 볼펜처럼 생겨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겠다.
최대한 시야 확보가 가능하게끔 각 맞춰서 꽂아놓으니 문에서부터 책상까지 한 화면에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진작에 설치해 놓을걸.
퇴근할 무렵이 되자 가방을 챙기고 나와 일부러 부서원들 다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성환이를 불렀다.
"조부장. 나 중요한 약속 있어서 먼저 간다."
"뭐지? 웬 인사?"
성환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저 손만 뻗어 흔들어댔다.
팀원들 모두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괜히 안 하던 짓 했나 보다.
복도로 나오는데 뒤에서 원모가 종알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무님 오늘 왜 그러시죠? 좋은 일 있으신가요?"
"소개팅이라도 하나 보죠."
"에이. 소개팅은 무슨. 아무리 잘나가도 성격이 저 모양인데 누가 소개를 시켜주겠습니까? 철천지원수라면 모를까."
"모르죠. 또. 맞는 사람이 있을지. 물론 희박하겠지만."
"크크. 그러게요. 하여간 내일 엄청 히스테리 부리겠네요."
원모 자식.
내일 히스테리가 어떤 건지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볼펜을 뽑아 촬영된 녹화분부터 확인했다.
어제 내가 나간 지 얼마 안 된 시각에 누군가 내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경리 막내 여직원이었다.
아니! 저 어린 친구가 설마?
하지만 다행히 내 책상을 뒤지거나 컴퓨터를 열어보는 게 아니라 그저 자리만 정리할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비서일 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저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른 경리직원들이 시킨 모양이다.
어쩐지 내 사무실이 깨끗하더라니.
막연히 아침에 청소 아주머니께서 수고해 주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음에 기회 봐서 못 하게 해야겠다.
뒷부분으로 한참을 돌렸다.
퇴근 시간도 훌쩍 지나고 밤 깊은 시각.
누군가 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게 화면에 잡혔다.
역시 동규다.
두리번거리며 방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들어와서 바로 냉장고를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과주스 한 병을 까고는 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모금 삼키며.
"캬! 좋다 이 맛이야."
미친놈인가?
이상하다 못해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물건을 뒤지거나 컴퓨터를 켜보지는 않았다.
그저 앉아서 쉬다가 서서 창밖 야경도 감상하다가 신문도 봤다가 그냥 휴게실처럼 쓸 뿐이었다.
한 30분 정도를 그렇게 빈둥거리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한참을 뒤로 돌리니 어느새 녹화 분량이 끝났다.
이 몰카의 단점이 긴 시간 촬영은 안 된다는 점이었다.
동규 이놈은 그저 이상한 놈일 뿐 스파이는 아니다.
그냥 역할 체험이 하고 싶었나 보다.
임원의 달콤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살짝 체험해봄으로써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려는 듯 보였다.
사람마다 동기부여의 동인이 다르니 이해할 수 있지만 안타까운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없는 시간에, 내 방에 이렇게 여러 명이 들락날락하다니.
나름 충격이다.
회귀 전에도 꽤 오랫동안 임원 자리에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내 방문을 훽 열어젖히자 저 멀리 원모와 눈이 마주쳤다.
귀신같은 놈.
혹시 내 방에 저놈도 몰카 설치해 놓은 거 아냐?
"원모야!"
큰 소리로 부르자 원모가 인상 쓰며 푹 고개를 수그린 채 중얼거렸다.
"아 씨. 뭐야. 또 저 히스테리. 맞네. 맞아. 어제 소개팅해서 아주 제대로 밟혔구만."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새 표정은 확 바뀌어 있었다.
희미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면서 뛰어왔다.
"네. 상무님."
이 놈 올해는 기필코 C 줄 거다.
"왜 인상 쓰고 그래? 내가 못 봤을 거 같아?"
"네? 뭐가 말입니까?"
태연한 척했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걸 감추진 못했다.
"왜? 내가 설마 어제 소개팅해서 애프터도 까이고 너한테 지금 화풀이하는 거 같아?"
"헉! 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뭐 하는 거야?"
"말풍선 뜨나 본 겁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라고?"
당황한 듯 두 손을 저어가며.
"아닙니다. 상무님. 농담입니다. 근데 용건이?"
"동규랑 점심 먹으러 가자."
"네? 지금요? 아직 점심시간 안됐는데요?"
"점심시간이 어딨어? 내가 배고프면 그게 점심시간이지."
"네. 알겠습니다."
"동규한테 가서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봐봐."
"넵."
자리로 돌아간 원모가 바로 동규를 불렀다.
"동규야. 컴온!"
"네 과장님."
"오늘 상무님께서 점심 같이하자고 하시네. 약속 없겠지?"
"네. 그런데 왜요?"
"왜긴? 배고프니까 밥 먹자는 거지 달리 이유가 있겠어?"
"아. 네."
"동규야. 그런데 내가 보니깐 너 아무래도 점심 메뉴로 김치찌개에 계란말이가 땡기는 거 같은데. 맞아?"
"글쎄요. 별생각 없는데요."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원모가 버럭 했다.
"뭐라고? 내가 보기엔 너 지금 딱 김치찌개가 땡기는 얼굴인데 설마 아니야?"
"아! 맞습니다. 김치찌개가 땡깁니다. 계란말이도요."
"그래. 역시 내 느낌이 맞았군. 음…… 그래. 지금 전화 넣어 세 명 간다고."
"네. 과장님."
잠시 후 원모가 노크했다.
"상무님 지금 나가시죠. 주문도 해놨습니다."
"그래 가자. 혹시 점심 메뉴 김치찌개 맞아?"
"헉! 네? 아니 어떻게?"
"내가 딱 보아하니 너 지금 김치찌개에 계란말이가 땡기는 것처럼 보여서 말야. 아니야?"
매우 놀란 듯 입을 틀어막으며.
"네. 맞습니다."
"그래 가자."
내가 앞장서자 원모가 뒤따르며 동규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네가 말했냐?"
"아니요."
"근데 어떻게 상무님이 알지?"
"글쎄 말입니다. 저도."
"내 얼굴에 그렇게 써 있냐?"
"네? 아니요. 그냥 낙서 같기도 하고."
얼굴에 낙서질해 놨냐고 돌려 깐 건가.
"뭐라고? 낙서?"
"아……. 아닙니다. 과장님."
광화문의 유명한 김치찌개 집.
워낙 손님이 많아 회전율이 빨라도 기본 30분은 줄 서는 맛집이라 그런가?
점심 먹기엔 꽤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가게 안엔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주문해 놓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상에 올랐다.
"이 집 오랜만이네. 네가 산다고 데려온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물론 그땐 계란말이는 안 시켜줬었지만."
"헐. 상무님 그걸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당근이지. 네가 산 날이잖아. 그걸 어떻게 까먹냐? 내 평생에 달랑 한 번뿐이었는데."
원모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후후. 아닌데요."
"맞거든? 너 그거 말고 한 번도 산적 없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계산이요. 그때 간이영수증 받아서 청구했는데요."
"뭐라고?"
갑자기 밀려오는 배신감.
자판기 커피에 동전 하나도 안 넣는 이놈한테 무려 밥 한 끼나 얻어먹어 봤다고 자부했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니.
큰 충격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은 하얗게 세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야 이놈아! 어차피 청구할 거면 그때 계란말이 시켜줬어도 됐잖아."
"그때 계란말이까지 시켰으면 3만 원 넘었거든요. 간이영수증 3만 원 초과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으이그."
대화를 듣고만 있던 동규가 계란말이 앞에서 차마 젓가락질을 못 하고 멈칫거렸다.
"동규야. 그냥 먹어. 뭘 먹는데 눈치를 봐. 상무님 건 하나 더 시켜드리면 돼."
원모가 나를 쳐다보며.
"법카는 3만 원 한도 같은 거 없잖아요."
"알았어. 많이 먹어라. 아예 두당 하나씩 시키지 그래."
"네. 상무님. 여기요 이모~!"
말 끝나기 무섭게 두 개를 추가했다.
기름 가득 머금은 폭신폭신 노란색 계란말이.
대충 썬 듯, 모양은 안 이쁘지만 고소한 맛에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하지만 반 접시쯤 비워가자 물려서 더 이상 젓가락질을 하기 힘들었는데.
원모가 물끄러미 보며 한마디 했다.
"안 드시면 제가 먹겠습니다."
"그러던지. 그런데 넌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 안 물려?"
"무슨 맛이긴요. 얻어먹는 맛으로 먹는 거죠. 물릴 거면 애초에 손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배부르다고 남겨봐야 내일 후회만 할 텐데요."
우문현답이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동규는 뭔가 불안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콕 집어서 자기랑 밥 먹자고 한 걸 보니 분명 내 방에 몰래 들어오는 걸 들켰다고 생각했나 보다.
"동규야. 요즘 자주 마주치는데 나한테 할 말이라고 있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상무님은 꿈을 이뤘습니까?"
아니 내가 설마 천하제일 임원이 꿈일라고?
"아직. 이루는 중이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시죠?"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글쎄다. 그런데 넌 임원이 좋아 보이냐?
"당근이죠. 상무님은 안 좋으세요?"
"응. 별로. 그리고 너나 나나 다를 게 없어."
"다를 게 없다뇨?"
"우린 둘 다 정해진 보수를 받고 여기 천하제일에 자기 시간을 파는 거잖아. 이정도 보수에 소중한 자기 시간을 판다는 게 아깝지 않아?"
"네? 그럼 얼마나 더 벌어야 하는데요?"
"아니. 그 소리가 아니잖아."
아직은 경험도 부족하고 이해할 나이가 아니다.
지금은 그저 이 생활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을 때다.
초딩부터 고딩 때 학교 끝나자마자 밤늦게까지 학원 차에 올라 뺑뺑이를 돌면서 어렵게 어렵게 대학교에 들어가고 또 그 높은 경쟁률까지 뚫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걸 알기에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나도 예전엔 그랬다.
"동규야!"
"네. 상무님."
"내가 정답은 아냐."
"네?"
"난 너의 롤모델이 될 수 없다고. 넌 누구처럼 돼야지 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아."
갑자기 동규의 귀가 새빨개졌다.
자기가 몰래 내 방에 들어온 걸 들켰다고 확신했나 보다.
"널 탓하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상무님."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곧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거다.
각자 시기만 다를 뿐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춘기가 온다.
청소년 시절 쳇바퀴 돌아가는 삶을 살던 사람은 너무 바쁜 나머지 사춘기마저 피해갔지만 삼사십 대가 되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맞이하게 된다.
* * *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카메라에 동규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야근 한 번 안 하고 일찍 퇴근한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녹화분을 빠르게 돌려보고 있었는데 화면 속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왔다.
화면을 멈추자 얼굴이 보였다.
수진이다.
한 손에 음료수 박스를 들고는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기특한 녀석.
나 몰래 음료수라도 채워놓으려나 보다.
하지만 냉장고 문만 열어놓은 채 음료는 단 한 개도 채워 넣지 않고 그저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뭔가를 꺼내 서랍을 열었다.
갑자기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뒷골이 지끈거렸다.
수진이가 내 책상 열쇠를 가지고 있다니.
음료수를 채워 넣으려는 건 페이크였다.
혹시 누가 들어왔을 때 음료 넣는 척하려고 가져온 거다.
스파이는 동규가 아닌 수진이었다.
아마 내가 재무팀장으로 발령 났을 때부터 미리 열쇠 복사본을 준비해놨을 거다.
수진이가 서랍 속에서 꺼낸 것은 도장.
경리파트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선물한 거라고 수진이가 웃으며 나에게 건넨 바로 그 도장이다.
수진이가 들고 온 몇 장의 서류에 재빨리 도장을 찍고는 다시 책상 속에 집어넣었다.
너무나 능숙한 손놀림.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다.
작업을 끝낸 후 가져온 음료 박스를 들고 유유히 내 방을 빠져나갔다.
독한 놈.
한 병이라도 채워주지.
회귀 전에도 분명히 이런 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최동욱과 나눈 말이 떠올랐다.
내가 원칙대로 하고 불법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런 간계를 부린 거다.
도장을 넘겨주고는 그걸로 몰래 자기들이 찍어버리는.
결국 이상한 의사결정에 참여 정도가 아닌 최종 결재한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