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71화 (171/191)

171화 성장

일부러 전화하는 척 큰 소리를 냈다.

"그래. 지금 나가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내려갈 테니깐."

사원증을 대자 회전문이 쓰윽 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일 분이나 지났을까?

관재파트 방 안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쯤이면 천상무 갔겠죠?"

"아무 소리 안 나지?"

"네."

"서류는 짬 시켰나?"

"네. 다 갈아 버렸습니다."

"도장 찍은 건?"

"내일 아침에 내려보내면 됩니다."

"그래? 그럼 나가자고."

이상한 말들을 주고받고는 관재파트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코너를 돌아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귀신이라도 본 것인 양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병헌이사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침착함을 유지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퇴근 안 하셨군요."

"네. 방에 놓고 간 게 있어서요. 관재파트는 항상 야근이 많으신가 봐요. 아니면 밤에만 해야 할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이병헌이사가 애써 태연한 척 답했다.

"아닙니다. 회의가 좀 늦게 끝나서요. 저녁이나 할까 하고 같이 나가는 중입니다."

"그러셨구나."

"참, 상무님. 식사 안 하셨으면 저희랑 같이하시겠습니까?"

세상 불편한 자리.

사양한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방금 저녁을 먹고 와서."

꼬르르륵.

하필이면 이때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저녁을 떠올리자 몸속에서 조건반사처럼 신호를 보낸 것이다.

"방금 안 좋은 걸 먹었나 배가 살살 아프네요. 자자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맛있게 드십시오."

두 손을 뻗어 어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네. 그럼 저흰 이만."

사무실을 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소리까지 확인했다.

서류? 도장?

궁금한 마음에 참을 수 없어 관재파트 방문 손잡이를 돌렸으나 역시나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서류를 몽땅 갈아엎었다니.

분명 뭔가가 있다.

* * *

그 후로도 며칠간 탕비실 주위에 차 마시는 척 서성대며 귀를 기울여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업무 특성은 물론이고 구성원들 성격까지 워낙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아서일 거다.

점심 식사 후 창밖을 보며 광화문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저흽니다. 상무님!"

원모가 성환이와 김철수 부장까지 대동하고 찾아왔다.

불길한 마음이 엄습했다.

"뭐야? 뭔 사고가 난 거야?"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아닙니다. 사고는요. 그냥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일단은 다행이다.

"빨리 말해. 본론만."

"네. 지금 한참 회계감사 중인데 감사인들이 엄청 까다롭게 하는데요?"

조회장에게 의사결정 받은 대로 1안 즉, 실제 실적 기준으로 재무제표가 작성되고 며칠 전부터 회계감사를 시작했었다.

"까다롭게 한다고? 점심 맛있는 거 안 사줬어?"

"아니요. 을지로까지 맛집 탐방 제대로 하고 다닙니다."

"그럼 저녁때 술 한잔도 안 하냐?"

"야뇨.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견디셔 몇 박스 사다 놓은 것도 다 떨어져 가구요."

"그런데 왜? 갑자기 뭐가 문젠데?"

"실적 안 좋은 해외법인들 다 까야 한다고 해서요."

"까다니?"

"한꺼번에 손실 반영한다고요."

내가 옛날 생각만 했다.

회계법인에서 그냥 재무제표가 맞다고 도장만 찍어주던 시절에서 갈수록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엄격해지고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그래? 그럼 손실 그냥 반영하면 되잖아. 어차피 영업외비용이니깐 상관없지 않나?"

회사 실적을 볼 때 영업이익을 가장 중시한다.

영업외손익은 말 그대로 영업활동과 무관한 것으로서 비경상적으로 발생하는 항목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인 말대로 손실 다 반영하면 당기순손실로 바뀝니다."

"뭐라고? 아깐 별일 아니라며!"

버럭하자 원모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영업이익이 중요하다는 건 최종적으로 맨 말단의 당기순이익을 가정했을 때다.

당기순손실이라면 완전 다른 얘기다.

예를 들어

영업이익 (+)100원, 당기순이익 (+)1원이면

영업이익에 비해 당기순이익이 매우 적지만 어쨌든 (+)니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영업외비용을 2원 추가로 반영한다면

영업이익 (+)100원, 당기순손실 (-)1원이 된다.

비용이 2원밖에 증가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손실로 전환되므로 큰 문제다.

김철수부장도 나섰다.

"이건 뭐 단순히 어닝쇼크 차원이 아니야. 적자 전환이면 우리도 손 못써."

"음……."

"적자는 IMF 이후로 처음이라 뉴스로 도배될 거라고. 난 막을 자신 없어."

마냥 엄살이라고만은 볼 수 없었다.

성환이도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거 봐. 내가 뭐랬어요. 그냥 마사지 좀 했으면 손실 다 반영해도 이익 날 텐데."

"상무님……."

원모가 마치 도와달라는 듯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해봤지만, 어차피 결론은 하나.

내가 나서봐야 귀찮기만 할 뿐 조직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정석대로 하자."

"잉? 상무님이 나서주면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성환이 말에 김철수부장도 거들었다.

"맞아. 내년부터 감사 계약 안 할 거냐고 협박도 좀 하고 술 한잔 사주면서 살살 구슬려도 보고 하면 못 이기는 척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봐달라고 하기 시작하면 계속 끌려다녀서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회계법인을 상대로 어떻게?"

"정면 돌파해야죠……. 원모야!"

"네."

자신 없는 말투로 힘없이 돌아봤다.

"회계사들 상대로 숫자로 싸울 줄도 알아야 해. 당신들이 전문가시니까 다 맞습니다. 네네 그러세요. 그러니깐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이럴 거야? 매번 쪽팔리지도 않아?"

말해 놓고도 살짝 민망했다.

사실 까놓고 보면 내가 주무과장 때 하던 짓이었기 때문이다.

"네?"

"우리 주장 한 번도 못 해 보고 끌려다니기만 할 거냐고?"

"아닙니다. 상무님."

"천하제일 재무팀 주무과장이 겨우 이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결정타.

자존심에 흠집을 내자 결연한 의지를 보이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우렁차게 답했다.

"아닙니다! 상무님."

"그래. 나가봐. 숫자 뽑아서 설득해 봐."

"네. 알겠습니다."

원모가 내 방에서 나가자마자 몇 명을 불렀다.

"회계 쪽 다 모여봐."

학형이를 포함한 몇이 대답하며 모여들었다.

"애들아. 지금 회계법인에서 이슈 삼는 회사가 세 개잖아, 한 사람씩 추정손익계산서 만들어 봐."

"네? 저희가요?"

"그럼 너희가 하지. 누가 하냐?"

"과장님! 좀 아깐 상무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얘들아. 언제까지 그렇게 기대기만 할래? 이젠 우리가 논리를 가지고 대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냥 될 대로 해주세요 하고 목만 내밀고 있을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새 배운 건가.

제법 단호한 말투에 다들 긴장했는지 큰 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과장님."

"그래. 숫자 뽑아서 와."

"네. 과장님."

원모는 이제 제법 재무팀 주무과장다워졌다.

다음 날부터 회계감사를 받고 있는 회의실에서는 간혹 고성이 들려왔다.

숫자 가지고 이게 맞냐 도대체 실행 가능한 숫자냐 등 논쟁이 한참 벌어졌다.

"과장님. 적자가 이렇게 심한데 당장 내년부터 흑자전환 한다고요?"

"네. 지금 원자재 값이 일시적으로 폭등해서 그런거고 곧 안정 찾을 거리니깐요."

"그걸 어떻게 알죠?"

"여기 올해 세계기상 예측 자료 좀 보세요. K사 인공위성에서 예측한 건데 이 날씨면 작황이 좋을 겁니다."

원모 말대로 세계적인 곡물 기업은 자체 인공위성까지 갖고 있다.

워낙 기후변화에 민감해 작황 예측을 정확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모 말은 뻥.

인공위성까지 띄워서 뽑은 자료를 유출하다니 말도 안 된다.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며칠 후.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원모와 성환이가 같이 들어왔다.

상기된 원모의 표정엔 스스로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상무님!"

"알았어."

"네?"

"뭔 말인지 알겠다고. 수고했어."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원모야! 너 혹시 감사인들한테 구라라도 깐 거 아냐?"

"구라라뇨? 양념만 좀 쳤습니다."

"그래. 이제야 아주 살짝 파트장하고 주무과장 같긴 하네."

내 입에서 이정도 나오면 최상급 칭찬인 걸 알기에 원모 얼굴이 밝아졌다.

성환이 역시 헤죽거리며.

"전 안 나섰어요. 원모님이 다……."

회장 아들이 나서는 순간 바로 해결일 텐데.

물론 본인이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싫었겠지만, 나서 봤자 장기적으론 팀 역량에 하등 도움이 안 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일 거다.

"알아. 너도 수고했어."

지갑에서 법카를 뽑아 원모에게 건넸다.

"애들한테 이거 갖고 가서 뒤풀이 실컷 하라고 해. 업종 불문이고 한도는 없다."

원모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저는요?"

"네가 끼면 회식이잖아. 기껏 고생한 애들이 불편할 거 아냐."

"전혀요. 아마 같이 가달라고 사정할걸요?"

"왜? 왕고노릇 할라고?"

"그래도 제가 주무과장인데 체면이 있죠. 제가 사주는 걸로 하면 더 그림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 카드로 생색은 네가 내시겠다?"

"꼭 그런 게 아니고요."

"알았어. 너도 가라. 적당할 때 눈치껏 빠지고."

"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원모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수진이가 학형이에게 묻는 소리가 났다.

"과장님, 아직 출근 안 하셨어요?"

"응. 오전 반차 내신다고 방금 문자 왔어."

"아니 왜요? 생전 안 그러시는 분이?"

"어제 자기가 쏜다고 새벽 세 시가 넘도록 붙잡고 안 놔주시더라고. 완전 꽐라돼서 뻗으셨나 보지, 뭐."

그러면 그렇지.

절대 중간에 눈치껏 빠질 놈이 아니다.

"에이……. 설마요?"

"정말이야. 4차까지 갔다니깐."

"아니 그게 아니라 과장님이 정말 자기가 쏜다고 했다고요?"

"그렇다니깐."

"말도 안 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계산할 때 슬쩍 보니깐 블랙카드인 게 상무님 법카더라고."

"에이.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람은 한 번에 확 바뀌면 안 된다.

서사를 부여하며 천천히 바뀌어야 평판도 따라붙는 법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침 그때 동규가 또 내 방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지난번 밤늦게 내 방 앞에서 마주친 후로는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졌다.

비록 스파이란 증거를 찾진 못했지만 꺼림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동규야 내 방 앞에서 뭐 해?"

"아닙니다. 상무님."

"뭐가 아냐? 뭔데 그래?"

서류를 들고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표 올리려고요."

"저기 데스크에 다 올려놓으면 되잖아."

"아. 네. 알겠습니다."

전표를 출납직원 데스크에 올려놓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뭔가 어정쩡하다.

일정 금액 이상의 전표는 담당자와 파트장을 거쳐 내가 최종 결재한다.

사실 알아서 잘했겠거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도장만 찍으면 그만이지만, 동규가 건넨 전표는 왠지 불안했다.

더욱 유심히 살펴봤지만 평범한 전표일 뿐 전혀 이상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오랜만에 건환이와의 저녁 식사.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건환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

"네. 상무님. 그런데 상무님이라고 하니깐 좀 이상하네요."

"천하태평은 대표 아직 맞거든?"

"네네. 대표님."

식사 도중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똥 마려운 강아지인 양 안절부절못했다.

"말해 봐. 뭔데?"

"저 그게……. 경영전략본부에서 오라고 해서요."

"뭐라고? 최동욱이?"

"네. 하지만 상무님께서 불러주시면 재무팀으로 가겠습니다.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죠."

말과는 다르게 마지못한 표정이다.

"아니. 아무리 쪼그만 손자회사라고 해도 대표씩이나 했는데 여길 어떻게 와? 재무팀에 부장급 남는 T.O는 없어. 그냥 경영전략본부로 가. 거긴 T.O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깐."

"그럴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한 게 이미 맘속으로 정해놓고 온 티가 역력했다.

"그래. 그래도 뭔 일 생기면 꼭 알려주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거요."

건환이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예전에 지하철에서 한번 써먹었던 볼펜 몰카다.

"아무것도 없는 거지? 설마 람지랑 막막…… 이상한 거 있는 건 아니지?"

건환이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했다.

"우리 그렇게 이상한 커플 아니거든요?"

"난 그 말한 거 아닌데? 이상하네."

"저도 그 말한 거 아니거든요."

한마디 질 생각을 안 한다.

초점 없이 먼 산 바라보듯 눈만 깜박이던 예전의 건환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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