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적들
"누가 그래? 벌써부터 안 좋은 것만 배워 가지고."
"팀원들이 그러던데요. 전임 파트장들도 다들 그렇게 했다고."
대표이사가 영입한 후로 자기 안위 때문에 시킨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 볼 게 없으니 경영지원실장이고 재무팀장이고 파트장들이고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을 거다.
전형적인 대리인문제(Agent problem : 주주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경영인이 주주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며 발생하는 문제)다.
"넌 오너라며?"
"네?"
"오너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그건 대표이사가 걱정할 문제잖아."
"나도 물론 그건 알지만. 일단은 지금 시장 상황도 안 좋고 마침 내가 회사로 복귀한 이후에 실적이 안 좋아졌다고 뉴스라도 뜨면 어쩌려구요."
"네가 영업부서장도 아니고 실적이랑 무슨 상관인데?"
김철수부장이 성환이 대리인이라도 대는 듯 나섰다.
"물론 그렇지만 기사는 실제와 다르게 나갈 수 있는 거잖아. 우리가 관리하고 있지 않은 언론사에서 얼마든지 씹어댈 수 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조회수만 높일 수 있다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다.
"실적을 조정하겠다면 조윤경이랑 최동욱이 가만있을까?"
"누나는 사업 담당이니깐 사업부 실적이 높으면 좋은 거죠. 최동욱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실적 안 좋아서 행여나 자기 사람들이 내쳐지면 어쩌려구요."
"조성환님 말씀이 맞아. 따르는 사람들을 지켜줘야 자기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거니깐."
김철수부장까지 거드니 성환이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 핏대를 세웠다.
"매출을 건드리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비용 쪼금 자산으로 돌리거나 내년 비용으로 넘기자는 건데 그 정도도 못 합니까? 분식회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사지 좀 하자는 건데."
"분식회계가 다른 게 아냐. 외출할 때 화장하듯이 실적 발표할 때 예쁘게 보일라고 하는 게 바로 분식회계야. 분칠하다 할 때 '분'. 장식하다 할 때 '식'. 올해 비용을 내년으로 넘기면 결국 내년 손익이 까질 텐데 조삼모사 아닌가?"
"내년 실적은 내년에 신경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내년에도 안 좋으면?"
"네?"
"아니면 내년에 살짝 좋아지는데 올해 넘긴 비용 때문에 안 좋게 보이면? 그럼 내년에 또 분식하자고 할거잖아."
성환이 할 말을 잃은 듯 우두커니 있었다.
원칙을 따지고 드는 사람 앞에서는 반박이 불가한 법이다.
지위로 찍어누르거나 인간적인 호소 그런 거밖에 없다.
하지만 성환이 이놈은 나한테 그런 건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있다.
"실장하고 대표한테도 그렇게 보고하실 거예요? 가만 안 있을 텐데?"
자기가 나서지 않겠다고 선 긋기 한 거다.
나름 최대치의 반항.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내가 얘기해보지 뭐."
* * *
경영지원실장 집무실.
미리 언질이라도 들었는지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천상무! 대책 마련하자는 걸 왜 거부하는 거지?"
마침 자기와 성환이 의견이 일치하겠다, 직속상관 행세라도 하려는 듯 제법 강압적으로 나왔다.
"거부라뇨? 원칙대로 하자는 건데."
"그럼 결산보고에 사인 안 하겠다는 건가?"
파트장인 성환이 기안하고 내가 1차 결재, 그다음 실장과 대표이사의 결재가 필요한데 내가 안 하면 나중에 문제 발생 시 자기가 뒤집어쓸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네."
이 핑계 저 핑계 없이 간결한 답변에 어이가 없었는지 할 말을 잃은 듯.
"헛. 참……."
지위로 찍어눌러 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를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튈 심정일 거다.
"그럼 회장님께 의견을 물어보는 건 어떤가?"
"네? 회장님께요?"
"그렇네."
회장한테 물어보겠다는 말은 직접적인 지시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묵시적 합의 정도는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대리인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네. 좋습니다."
"그럼. 1안은 실적 그대로. 2안은 마사지 한 걸로 해서 가져오게. 보고드리면서 의사결정 받도록 하지."
"그러죠."
조회장이 2안을 선택한다면 난 사인 안 하면 그만이다.
자르면 자르는 거고, 내 의사로 그만둔 건 아니니 성환이가 뭐라 할 상황도 아니다.
암호화폐에 몽땅 들어간 돈 돌려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내 방으로 돌아오자 성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며.
"하기로 했죠?"
"아니."
"네?"
실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해줬다.
"각 안 별로 보고자료 만들어 봐. 주저리주저리 필요 없고 한 장짜리로."
"네. 어차피 보고서 잘 보지도 않으실걸요. 요즘 눈도 안 좋으신 거 같은데. 근데 회장님이 2안으로 결정하면요?"
"그럼 난 결재 안 할 거야."
"네? 어떻게? 그러다가……."
"잘리면 할 수 없지."
답답한지 한숨을 섞어가며.
"아니. 왜요? 조금만 숙이면 되는데?"
회귀 전과는 완전히 바뀐 내 생각에 나도 살짝 놀랐다.
회귀 전에는 성환이 말대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맘대로 하게 냅 두면서 난 그저 높은 자리에서 누리기만 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사인하고 넘겼었는데, 그게 내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작은 불씨를 넘겼다가 강풍이라도 불면 걷잡을 수 없이 큰 불길로 번져 온 산을 대 태울 수도 있음을 그땐 몰랐었다.
"안 숙일 거야. 그게 옳으니깐."
"아니. 그래도. 에이 관두시죠."
* * *
며칠 뒤 안가.
주차장에 차를 대니 마침 성환이도 막 도착했는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본채로 데려가는데 옆으로 빠졌다.
"어디 가세요?"
"내 그림 잘 있는지는 봐야 할 거 아냐."
"도난방지 시스템 완벽하다니깐. 그리고 도둑이 들었어도 설마 그 그림을 가져가겠어요?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난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아무것도 안 믿어. 아니 내 눈으로 확인해도 100% 확신할 순 없지. 그때 컨디션이 안 좋았을 수도 있으니깐."
"네네. 어지간히 하시죠."
지하에 내려가서 확인해보니 정말 내 그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지하엔 다른 누군가도 있었다.
최동욱이었다.
이제 가족회의 일원이 된데다 여기 지하 벙커에의 출입 권한까지 부여받았나 보다.
성환이가 매우 놀란 듯.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아. 회장님께서 선물해 주신 게 있어서."
"뭘요?"
최동욱이 손을 뻗어 가리킨 건 양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긴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화였다.
억 소리 나게 아름다울뿐더러 비싸 보이는 그야말로 진품명품.
가장 조명을 잘 받는 위치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게 누가 봐도 제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아니 저걸? 저건 회장님께서 정말 아끼시는 건데."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그래서 우리 집에서 보관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여기 놓으라고 하셔서."
지난번 조회장과 여기서 마주쳤을 때 예술품은 모두 자기 거고 자기가 팔건 누구한테 주건 맘대로 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성환이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기 걸 하나씩 뺏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거다.
최동욱이 날 쳐다보며 물었다.
"올라갈까요? 오늘 회장님께 보고 있으시다면서요."
이런 보고에까지 최동욱이 배석하다니.
정말 최측근이다.
안내받은 손님 응대실은 한옥 느낌의 인테리어를 한 아늑한 방으로, 한가운데 키 낮은 탁자 위엔 찻잔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는데.
조윤경 역시 실장과 함께 먼저 와서 자리하고 있었다.
본척만척 고개를 훽하고 돌리자 실장이 눈인사를 건넸다.
결국 최종결재자인 대표이사만 제외하고 기안자인 조성환, 1차 결재자 나, 2차 결재자 실장, 그리고 합의부서장인 경영전략담당과 사업 담당이 모두 자리했다.
먼저 실장의 현안 보고가 이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고만 있던 회장이 갑자기 눈을 뜨고 보고서에 물음표 하나를 적었다.
"이게 뭐지?"
"네? 아, 이거 말씀이십니까?"
다시 물어볼 용기는 안 나고 그냥 아는 척 답하는 게 티 났다.
"그래."
"자세히 파악해서 내일까지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담당 부서 비상이다.
회장이 뭐가 궁금한 건지 묻지도 않고 그냥 다 파악하겠다고 했으니 A부터 Z까지 다 준비하라고 닦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리 차례가 되자 갑자기 실장이 눈짓을 보냈다.
나보고 보고하라는 건데.
바로 성환이를 돌아봤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의견이 다르니 나설 수 없다는 거다.
모두가 외면하니 할 수 없이 1안, 2안에 대해 조회장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조회장이 눈을 뜨더니 대뜸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1안입니다."
"그런데 2안까지 들고 온 이유는?"
"담당자들끼리 의견 일치가 안 되어서입니다."
"자네가 1안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원칙대로 하자는 겁니다. 게다가 내년에는 실적이 반등할 거라는 예상도 있어서요. 안 좋을 때 확 아까지(적자) 나고 내년에 크게 반등 주면 그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조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으음. 나가리하고 배판으로 가자는 거구만."
역시 고스톱에 비유했다.
이번 판이 나가리 판이면 다음 판은 두 배가 된다는 건데.
딱 맞지는 않더라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와 닿았다.
"정확합니다."
"그렇게 하지."
참석자들이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한마디 건넬 용기는 없었는지 묵묵부답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끝났다.
오너 입장에서야 단기 실적은 무관하고 장기적으로 큰 그림만을 따진다.
게다가 재무 쪽에 밝아 사정을 아는 거다.
실제와 발표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면 내부적으로 그 차이를 소명하고 내역을 관리해야 하는데, 차이는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하다가 손쓰지 못할 지경까지 될 거라는걸.
그러다 분식회계 사고가 터지고 많은 기업들이 공중분해 되는 걸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다.
보고가 끝나고 나오는 길.
성환이 주차장까지 마중 나왔다.
"좋습니까? 회장님이 편들어주시니까?"
"이게 편이냐? 회장님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그럼 나는요?"
자기 조인한 후에 실적 깨졌다는 기사라도 나올까 봐 걱정한 거다.
"걱정 마. 김철수부장님을 믿어."
"네?"
"어차피 경기가 안 좋은 거뿐이잖아. 그리고 너 조인한 이후에 관리리스크도 줄고 안정 찾고 있다고 좋은 기사도 나올 거야."
"네……. 그런데 집으로 가십니까?"
"아니. 가방 놓고 와서 들어갈라고."
"내일 가면 되잖아요."
"금요일이잖아. 휴일엔 회사 안 나간다."
"네. 들어가세요."
회사로 돌아오자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퇴근 시간도 훌쩍 넘어버렸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회전문을 통과하는데 이미 대부분 퇴근했는지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데, 삐거덕 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빠른 걸음으로 내 방앞에 다다르자 마침 어정쩡하게 서 있던 동규와 마주쳤다.
"왜? 무슨 일 있어?"
동규는 마치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사람인 양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뻘쭘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
"네. 상무님. 아니……. 아닙니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봐."
"아니요. 혹시 자리에 계시면 인사드리고 퇴근하려구요."
내 방에는 불도 켜있지 않은데다 동규는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딱 봐도 거짓말.
자기도 뻘쭘했는지 꾸벅 인사를 하고 복도로 나갔다.
"퇴근하겠습니다. 상무님."
"동규야!"
불러세우자 살짝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돌아봤다.
"옷 안 입고 가? 춥다."
"네? 아 맞다. 제정신 좀 봐. 감사합니다."
급하게 자리 쪽으로 가더니 외투를 걸치고 나갔다.
갑자기 지난번 원모가 내 방에서 동규가 나오는 걸 봤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놈이다.
경영지원실장이 붙여놨다는 스파이가 바로 이놈이다.
한편, 우리 사무실 안에는 동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무슨 소리가 나는 거 같아 돌아보자 관재파트가 자리한 방 안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몇 명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밖에 소리 나는 거 보니깐 천상무 온 거 같아."
관재파트장 이병헌의 목소리다.
"네? 아까 일찍 퇴근했다는데요? 더군다나 밤에 들어올 리가 없는데요."
"눈치챈 거 아닐까요?"
분명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다는 얘긴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문 열고 살짝 볼까요?"
"아니 됐어. 기다려봐. 조금만 있다가 천상무 나가는 소리 나면 가자고."
"네. 알겠습니다."
내부는 물론이고 주위에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