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69화 (169/191)

169화 마사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마주친 원모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아들었는지 사무실로 따라 들어왔다.

"어제 어땠어? 이상한 거 묻는 애들 없었어?"

"네? 아하."

이제야 생각났는지.

"상무님 뒷담화 까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뒷담화 말고. 나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 없었냐니깐?"

"네? 글쎄요? 그다지."

둔한 놈.

"알았어. 그리고 술자리에선 상사 뒷담화도 좀 까고 그러는 거야. 그래야 서로서로 친해지지."

"그렇긴 한데. 다들 저랑 상무님이 친한 거 아니깐 조심하는 거 같더라고요. 내가 욕해도 따라붙는 애들이 없더라구요."

"뭐라고? 이 자식아! 네가 깠냐 내 뒷담화?"

어이가 없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언젠 또 해도 된다면서요."

"아니. 내 말은 해도 되는데 굳이 내 앞에서 했다고 할 필요가 있냐고."

"뭐가 다릅니까?"

말문이 막혔다.

"음……. 알았다 됐다. 아무튼 나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나 염탐하는 사람 있는지 유심히 살펴봐 봐."

"네. 아! 맞다."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기며.

"지난번에 밤늦게 동규가 상무님 방에서 나오던데요?"

"왜? 뭐하냐고 물어봤었어?"

"네. 그냥 상무님이 시키신 거 갖다 놓았다고 하던데요?"

"그래? 동규한테 시킨 게 없는데……."

뭔가 수상하다.

우선 용의자 1순위로 올려놔야 할 듯.

"그리고 상무님. 오늘 관재파트 애들 출근한 거 아십니까?"

"그래? 몇 명이나?"

"세 명인 거 같던데요? 재무팀 소속인데 설마 상무님한테 인사도 안 했습니까? 아까 조성환님한테는 인사하던데요."

"됐어. 어차피 성환이 일 봐주는 사람들이니깐 그러겠지.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에 파트장이 인사 왔었어."

"그래도 그렇지 첫 출근 날인데 빠져 가지고."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좀 거리 두고 지낼 거니깐."

"네."

* * *

별다른 사고나 이슈 없이 시간이 흘렀다.

몽땅 쏟아부은 암호화폐는 현재 시세는커녕 관련 뉴스 하나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결말을 알고 있는 마당에 굳이 조바심 낼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부장급이었던 성환은 그룹 내에서 입지를 서서히 다져갔다.

다 내 덕분에.

여기저기 임원 회의 때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업무를 파악하게 했을뿐더러 임원들과 자꾸 마주침으로써 그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켜줬기 때문이다.

대리로 재무팀에 처음 조인했을 때와는 매우 달라졌다.

배우려는 자세와 뭐든 빨아들이려는 의지.

목표가 명확해지고 경쟁자가 크게 부상한 효과를 제대로 실감했다.

물론 성환이가 로열패밀리이니 더욱 수월했을 거다.

보통의 직원들 같았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카운터파트를 찾는 데만 해도 엄청 시간이 걸릴뿐더러, 연락이 닿더라도 꼭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 외근이거나 휴가 중이다.

전화 몇 군데를 뱅뱅 돌려가며 대체인력을 겨우 찾으면 또 시간이 안 된다고 하고.

어렵게 시간 맞춰서 회의라도 한번 할라치면 바쁜데 왜 불렀냐는 듯이 똥 씹은 표정으로 틱틱대기만 할 뿐,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회사 일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힘든 건데, 이놈한텐 이런 게 없다.

그냥 부서장에게 전화해서 자기 이름만 말하면 끝이다.

아니 사실 이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내선에 번호가 뜨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 인트라넷 조직도에는 성환이의 사진은 물론 전화번호 같은 정보는 일절 적혀있지 않지만, 다들 군대에서 번호 외우듯이 성환이 내선 번호는 알고 있다.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 봐 그런 것일 거다.

성환이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비록 담당자가 아닐지라도, 그저 간단히 용건만 건네면 그 귀찮은 작업을 상대방이 알아서 다 해와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해결방안까지 마련해 온다.

지금도 사무실에선 그런 비슷한 상황인 듯.

"원모님. 아직 집계 안 됐어요?"

"네. 자꾸 전화해서 쪼고는 있는데 한군데가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다음 주는 돼야 줄 수 있을 거 같다고 하는데요."

"어딘데요?"

"천하제일 건설이요."

성환이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지주사 재무팀 조성환입니다."

"……."

"네. 대표님. 건설에서 예상실적 안 주신다는 거 아세요? 유독 건설 쪽만 늦네요."

건설사 재무팀장도 아니고 그냥 대표이사한테 바로 걸은 모양이다.

유독 건설만 늦다라니.

상대측 반응이 들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

"예상인데 결산 끝나고 주게요?"

"……."

"네. 오늘까지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바로 원모에게 말했다.

"퇴근 전엔 메일 올 거니깐 바로 합산작업 하시죠."

"네. 부장님."

조용히 성환이 자리로 전화를 걸었다.

"내 방으로 와라."

뒷짐이라도 지고 느릿느릿 오는지 한참 뒤에나 방문이 열렸다.

"왜요?"

"이리 앉아봐."

"아이. 바쁜데 왜 사람을 오라가라에요."

"그럼 내가 네 자리로 가서 깰까?"

"깨다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방금 통화한 거."

황당하다는 듯 흘겨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내 통화도 엿들어요? 최동욱이 시킵니까?"

"아. 자식. 되게 까칠하네. 그게 아니라 하나 잘못한 게 있어서 말해 줄라고."

"잘못하긴. 뭉그적거리는 계열사 하나 쫀 거뿐인데."

"대표한테 전화한 게 잘못한 거야. 건설사 재무팀이 비록 건설사 소속이긴 하지만 업무상으로는 우리 사람들인 거 몰라? 성과평가도 40%는 우리가 직접 주잖아."

"그래서요?"

"오늘 네가 대표한테 이르는 바람에 재무팀장이랑 담당자가 엄청 깨질 거 아냐. 그걸 생각했어야지. 일 편하게 할라고 적을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어."

"아하. 네……."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턴 웬만하면 담당자나 부서장한테 얘기해. 바로 대표 찾지 말고."

"네. 괜히 미안하네요."

"미안하면 건설 재무팀장한테 전화 한 통 넣어. 오해 말라고 하고."

"네. 바로 할게요."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성장하는 거다.

* * *

오후가 되자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경영지원실장이다.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겠나?"

"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이번엔 손님 왔다고 밖에 세워두진 않았다.

그랬으면 또 성환이를 부를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비서가 차를 내오자 바로 물었다.

"그룹 예상 실적 언제 나오지?"

보통 상장법인은 연결산을 마무리하면 회계감사를 받은 후 연간실적발표를 한다.

하지만 경영진의 관심은 그 전에 실적이 얼마나 나올지 예상하는 것.

임원 위촉 기간을 연장하느냐 아니면 바로 방을 빼느냐 곧, 자기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네. 지금 취합 중이니깐 집계 끝나면 다음 주에 바로 보여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놓는 게 좋다.

하지만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더 빨리는 안 되나?"

"아직 결산 마무리 할라면 한참 남았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대책 마련해야지."

"네? 대책이라뇨?"

결산에 대책이라니.

뭔 말인지.

"대표님께서도 각별히 신경 많이 쓰고 계시니깐 자네도 신경 좀 써주시게."

"네? 신경을 쓰라뇨?"

"마사지가 필요할지 몰라서 말야."

이런.

마사지라니.

예상실적이 안 좋으니 좋게 보이게끔 살짝 만지자는 얘긴데.

실적 부진은 바로 경영진 교체의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실장이나 대표 모두 지금의 이 달콤한 생활을 절대 뺏길 수 없다고 다짐했을 거다.

모든 일정은 비서가 다 알아서 척척 관리해주고 집이나 회사를 나서면 언제든지 삐까뻔쩍한 세단이 기다리고 있다.

기름을 넣기는커녕 고속도로 통행권 같은 걸 뽑거나 영수증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다.

상당한 한도의 법카를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친구들을 불러다 긁고 다니면서 실컷 폼 잡고 생색낼 수도 있고.

업그레이드된 좌석 덕분에 오히려 해외 출장이 기다릴 정도일 거다.

고위급 임원 자리가 주는 이 달콤함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굳이 지금부터 싸울 필요는 없다.

결과를 놓고 붙어도 늦지 않다.

"네. 실장님. 예상실적 나오면 그때 얘기하시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파트장들을 소집했다.

경리파트장 조성환, 자금파트장 이철재부장, IR파트장 김철수부장이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파트장들을 다 소집하는 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경리파트장인 성환이에게 물었다.

"예상실적 집계는 언제 되지?"

"건설이 오늘 보내준다니깐 내일이면 작업해서 바로 보여드릴 수 있어요."

"실제 실적 취합은?"

업무 파악을 끝냈는지 제법 강단 있는 말투로 자신 있게 답했다.

"지주사 자체 실적은 1월 중순쯤이고 계열사 다 집계하면 1월 말이요."

"그리고 회계감사 들어가고?"

"네. 1월 말에 시작해서 2월 중순에 끝납니다. 그때 실적발표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회계감사야 그냥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회계법인과 짝짜꿍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분식회계가 주요 사회문제로 이슈화가 되고 알만한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로 날아가는 등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는 추세였다.

조금만 있으면 아예 금감원에서 몇 년에 한 번씩 회계법인을 지정해줘서 지정받은 감사인이 인정사정없이 칼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질 거다.

물론 점점 기업의 투명성이 제고되기는 하지만 그만큼 융통성은 줄어든다는 얘기다.

"지금 분위기는 어때?"

"네. 식품이나 엔터는 호황인데 건설이랑 화학 쪽이 죽 쓰나봐요. 전체적으로 보면 안좋을거 같은데요. 성과급 때문에 직원들 분위기도 별로구요."

지주사의 성과는 그룹 전체 성과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전체 사업성과를 기준으로 지주사 조직성과를 배분받고 그걸 가지고 부서별/개인별 성과로 차등배분 받는다.

아무리 개인성과가 좋아도 그룹성과가 안좋으면 높은 성과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거다.

자금파트장 이부장에게 물었다.

"자금수지계획은 어때요? 문제 있어요?"

"다행히 자금은 잘 돌고 있고 기존 차입금 연장에도 무리 없습니다."

"조달계획은 따로 필요 없고요?"

"네. 다행히 사채를 더 발행하거나 땅 파는 건 안 해도 됩니다."

"그래요. 안 쓰는 땅이라도 몇 년 더 들고 있다가 팔죠."

몇 년 뒤 부동산 폭등장이 오면서 상업용 부동산까지 덩달아 뛰고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비사업용토지를 팔아제끼게 될 거다.

본사까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까지.

지금 급하게 파는 것보다 몇 년 기다리는 게 두 배 넘는 이익을 가져올 거다.

IR파트 김철수부장의 차례.

"시장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실적 나와봐야 알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선 시장 컨센서스를 맞추기 힘들 거 같아."

시장에서의 예측치보다 안 좋을 거라는 얘긴데.

"손익도 문젠데 매출 자체가 역신장할 거라는 우려도 있나 봐."

"말도 안 돼. 그렇게 분위기가 안 좋아요?"

"역신장까진 안 하겠지만, 그래도 매출 증가율이 물가 상승율보다 낮으면 시장 파장이 클 거야."

"주가 관리가 필요할 수 있겠네요."

"응. 지금 시나리오별로 대책 마련하고 있어."

"올해 주총 장난 아니겠는데요?"

"그러게."

"총회꾼 득실득실하겠구만."

김부장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기가 예전에 총회꾼으로 변신한 적이 있어서 부끄러웠나 보다.

"부장님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에이. 알아 천상무."

* * *

다음 날 오후.

점심을 먹고 들어오자 성환이와 김철수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내 방으로 찾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성환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많이 안 좋아요."

"예상 실적 얘기하는 거야?"

"네."

"얼마나 안 좋은데?"

"전년 대비 매출은 1%밖에 증가 안 했고 영업이익은 50%나 빠졌어요."

"그 정도면 완전 어닝쇼크 아냐?"

"네. 몇 년 만에 최악이래요. 이대로 나가면 안 되겠는데?"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대로 나가면 안 되다니?"

"마사지가 좀 필요하다고요."

"뭐? 마사지?"

오너 일가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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