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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68화 (168/191)

168화 스파이

어쩐지 비자금 관리라는 중책을 맡기더라니.

집안 내부에서도 최동욱이 아들로서 승계 구도의 한 축을 맡을 거라며 공식화한 거다.

성환이의 지금 이 상실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천하제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승계 1순위로 복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잠재적인 위협일 뿐이었던 최동욱이 갑자기 가장 큰 위협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조윤경은 뭐래?"

"누나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룹 내 돌아가는 분위기 보고 눈치챈 거겠죠."

"반대하지 않았어?"

"네. 일단은 회장님 면전에서 반대는 안 했어요."

"외부적으로 공표된 건 아니니까 아직은 안심하고 있겠지."

"네. 어차피 엄마 진짜 자식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할 테니깐."

일부러 낙마시키거나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 한 천하제일 가풍상 장자 승계의 법칙을 거스르긴 쉽지 않을 텐데.

조윤경 나름대로 일대일로 붙으면 최동욱한테는 자신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니 최동욱과 손잡고 먼저 성환이를 쳐내려고 하지.

성환이 짐짓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좀 있으면 최동욱이 상무님께 손을 뻗칠 거에요."

"그렇지 않아도 좀 아까 만나서 밥 먹고 차 한잔했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네? 벌써요? 그자가 뭐래요?"

"경영권 승계작업 본격화할 거라고 나보고 도와달라는데?"

"뭐라고요? 자기 편으로 넘어오라고? 이런……. 결정되자마자 손을 뻗치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요?"

"관재파트를 재무팀 산하로 받아달래. 그리고 승계 작업하는 데 조언해 달라는 거지."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뭐라고 하긴. 알겠다고 했지."

"음……."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왜, 기분 나빠? 내가 도와준다니깐?"

"아니요. 그 반대에요. 상무님이 거기라도 들어가야지, 안 그러면 자기들끼리 다 해 처먹을 텐데?"

"그런데 너무 기대는 마. 나한테 의사 결정권을 줄 리는 없을 테니깐."

"권한 없이 책임만 지라고?"

"아니. 내가 그걸 받을 사람이냐? 당연히 책임도 없지."

"그러면 어떡해요? 권한이 있어야 저놈들 맘대로 해 먹는 걸 막을 수 있는데."

"나한테 권한을 달라고 한들 주겠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단 지켜봐. 우선 관재파트 애들을 재무팀 안으로 들여놔야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냐. 이걸 한번 믿어보라고."

두 손으로 양 귀를 가리키자 성환이 손뼉 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 그러면 되겠네요."

* * *

바로 다음 날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사무실 안에 따로 방을 필요하다고 해서 내 방을 쪼개줄 수도 없고.

회의실 두 개를 개조해서 사무실로 바꾸는 중이다.

원모가 무슨 영문인지 궁금했는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상무님. 조성환님 방으로 들어가십니까?"

"부장한테 무슨 방을 줘?"

"그게 아니면 왜 우리 팀 회의실을 사무실로 바꾸죠? 우리 팀에 임원은 오직 상무님 한 분뿐인데요."

대놓고 딸랑딸랑, 부담스럽다.

"닥쳐. 그냥 올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거니깐."

"네? 누구요?"

"관재파트."

"네? 관재파트가 왜 우리 팀에?"

원모도 재무팀 짬밥을 꽤 먹은 만큼 당근 그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

"조직 개편상 일단 그렇게 됐어. 애들한테 자세히 알리지는 마라."

"네. 그래도 곧 다 알 텐데요 뭐."

"그래도 그냥 모른 척하라고 해."

"회식 같은 것도 같이 안 합니까? 한 팀인데?"

"그냥 소속만 재무팀이지 완전히 다른 팀이라고 생각해. 결재나 합의는 물론이고 공유할 것도 없으니깐. 그냥 군대 있을 때 옆 중대 아저씨라고 생각해."

"네. 알겠습니다."

오후가 되자 김철수부장도 자리에 찾아왔다.

"천상무! 관재파트 온다며?"

원모 이 자식.

입다물라고 하니깐 벌써 사무실에 소문 다 퍼트렸나 보다.

"그렇게 됐어요."

"하긴. 업무로 보면 재무팀 성격하고 맞으니 우리한테 있어야겠지."

"재무팀이긴 한데 경영전략본부 최동욱 직보라인이니깐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도 업무협조 같은 게 많이 올 텐데? 예전에 구조조정본부나 회장실 산하에 있었을 때도 엄청 귀찮게 했잖아."

"적당히 거리 두면서 리스크 없는 수준에서만 협조해 주세요."

"알았어. 걱정 마."

김철수부장이 방을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왔다.

"또 왜요?"

문 쪽으로 고개를 올려봤지만 김부장이 아니었다.

과도한 포마드 사용으로 기름져 보이는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헛기침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흠흠."

"누구신지……?"

"안녕하십니까? 다음 주에 합류하게 될 이병헌이라고 합니다."

"네?"

머쓱했는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다들 그런 반응이십니다. 하지만 이병헌이 맞습니다."

"아. 네. 전 그런 의미가 아니라 처음 뵙는 거라 당황해서요. 관재파트장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악수를 청하자 가까이 다가오며 손을 마주 잡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까끌까끌한 손의 감촉마저, 스마트하고 지적이며 도회적인 그 직책의 이미지와는 생판 다른 돌쇠 스타일의 남자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무님."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이병헌 이사님."

예상과는 다르게 기 싸움을 걸어오진 않았다.

오히려 출근하기도 전에 인사까지 오고 꽤 호의적인 게 뭔 꿍꿍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다음 주부터 천천히 알아봐야겠다.

"공사하는 거 보러 오셨군요?"

"네. 이것저것 확인 좀 하려구요."

"주말까진 잘 마무리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래야죠."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둘러보다 창밖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이 방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마치 '언제까지 이방을 지키나 보자'라고 비꼬는 듯.

뭐지?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가?

이병헌 이사는 수더분한 인상과는 달리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상대일 것 같다.

* * *

늦은 오후.

긴 하루가 지나고 붉은 석양이 질 때쯤이면 창밖을 보고 차 한잔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해가 짧아진 탓인지 차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어느새 붉은 해는 자취를 감췄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리는 이미 어둠에 싸였다.

옛 궁궐에선 그윽한 조명이, 주변 건물에서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지기 시작하는데.

조선 시대와 최첨단이 공존하는 광화문 거리.

멈춰있는 것과 빠르게 변화하는 것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재미있는 동네다.

내 방 넘어 사무실에선 딸그락딸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팀원들이 야근모드로 전환하는 거다.

'상무님 안 가네.'

'불금인데 오늘도 일찍 가긴 글렀다. 밥이나 먹고 오자.'

라고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시간 되면 알아서 퇴근하라고 해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상사가 퇴근해야 비로소 직원들이 마음 놓고 퇴근할 수 있는 이런 후진 문화는 언제나 없어질런지.

퇴근 시간 맞춰서 나가봐야 차만 막히고 힘만 드는데, 괜히 팀원들 불편할까 봐 억지로 일찍 퇴근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오늘은 강제로라도 퇴근시켜야겠다.

방을 나가려는데 노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어머! 상무님. 가시게요."

경리파트 수진이.

"퇴근 인사 안 해도 된다니까 그러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요."

눈앞에 조그만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상무님 그동안 사인하시느라고 힘드셨죠? 지난번 팀장님 거보단 엄청 좋은 걸로 만들었어요."

"뭔데 그래?"

박스 포장을 뜯자 조그만 가죽 케이스가 나왔다.

그 안엔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도장이 들어있었다.

"새로 팀장님 부임하시면 저희 경리파트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십시일반해서 쌔끈한 도장 하나 만들어드리거든요."

"누가 이런 이상한 문화를 만들어놨데?"

기뻐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의외였는지 입술을 뽀로통하게 내밀었다.

"미안! 싫다는 게 아니라 부담 줄까 봐 그런 거지. 잘 됐다. 사인하기 엄청 힘들었는데 편해지겠네."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맛있는 거 사주시면 돼요."

"그래. 알았어."

말 끝났는데 나가질 않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 사라는 얘긴가보다.

"오늘 먹자고?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회식 같은 거 질색하지 않았나?"

"제가 언제요?"

"일일이 적어놨어야 했나? 암튼 지금?"

"네. 벌써 경리파트 싹 돌면서 물어봤는데 네 명 시간된다고 해요."

네 명이라.

적은 인원이라 싸게 먹혀서 좋다고 해야 할지.

나랑 간다는데 아무리 당일이라고 해도 그거밖에 안 되냐고 서운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괜히 내가 끼면 테이블도 두 개나 잡아야 하고.

이젠 대장 놀이가 재밌지도 않을뿐더러 애들이 각 잡고 먹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불편하다.

"굳이 내가 낄 필요가 있나? 얘만 가면 되지."

지갑에서 법카를 뽑아 들자 수진이가 낚아챌 듯 손을 뻗었다.

"잠깐!"

손을 뻗어 막아 세우고는 카드 앞면을 살펴봤다.

천하제일이라고 적혀있는 게 법카가 맞았다.

"왜요? 혹시 개카일까 봐 확인하신 거예요?"

"예전에 가끔 실수해서 말이지. 그리고 너 옛날에 커피 한잔 산다고 개카 줬다가 팀원들 다 돌렸던 거 기억 안 나?"

"그걸 기억하시네요. 그땐 조성환님께서."

"알아. 농담이야. 아무튼 나 대신 얘가 참석하는 거니깐 마음껏 먹어."

카드를 흔들거리자 확 낚아채 갔다.

"예산은요? 상무님?"

"No limit!"

"감사합니다. 상무님."

내가 빠진다고 하니 어째 얼굴이 더 펴지는 거 같다.

수진이가 나가더니 옆자리 홍과장을 찾았다.

"과장님. 이게 뭐게요?"

"뭔데?"

"상무님 법카요."

"뭐? 상무님 안 가신데?"

"네. 맘껏 쓰라는데요?"

"뭐라고? 그럼 나도 갈래."

홍과장 오늘 제대로 찍혔다.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동규도 끼어들었다.

"정말이야? 오늘 상무님 안 가신데?"

"네. 약속 있으신가 본데요. 이 카드만 줬어요."

"잘됐다. 나도 가자."

"오늘 약속 있다고 하신 거 아니에요?"

"그거야 상무님 같이 간다고 했으니깐 그런 거지. 약속은 무슨 약속.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돌면서 싹 다 다시 물어봐봐."

이런 씨댕.

동규 저놈 올해 성과평가 무조건 C다.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상한 기분은 가시질 않는데.

수진이가 여기저기 물으러 다니다가 원모한테까지 갔다.

"과장님."

"왜?"

"상무님 오늘 약속 있으시다고 카드 주시는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 그래?"

갑자기 화색이 도는 말투로

"송차장님은?"

자기가 주무긴 하지만 파트에 자기보다 짬밥 많은 선배가 있으니 가는지 물어본 거다.

"약속 있으시대요."

"그래? 그럼 나도 간다."

개자식.

나도 그렇고 선배까지 안 간다니 오늘 왕고노릇 제대로 해 보겠다는 건데.

저녁마다 소주 한잔하자고 데리고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원모 그새 많이 컸다.

방문을 뻥 차듯 활짝 열어제꼈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거나 자리를 정리하던 팀원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됐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거 같다는 공포감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 들리게 큰 소리로.

"수진아!"

"네. 상무님."

"나 어쩌면 오늘 시간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묻긴 수진이한테 물었는데 첫 반응은 원모가 보였다.

"헉. 네……?"

이어서 고개 수그리고 안타까워하는 몇 명의 얼굴들.

기억해뒀다.

"상무님, 정말이요?"

다들 똥 밟았다는 표정을 숨기느라 바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렇게 싫어하던 꼰대 상사짓을 똑같이 하는 거 같아 살짝 부끄러워졌다.

"농담이야. 놀라긴. 이거나 받아."

예전 임원 행사 때 받아놓은 백화점 상품권 몇 장을 건넸다.

"도장도 받았는데 답례는 해야지. 이걸로 너네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

"네. 감사합니다."

안 간다는 게 고맙다는 건지 상품권이 고맙다는 건지.

조용히 원모에게 손짓했다.

방으로 들어오자 뒤따라 들어왔다.

"네. 상무님."

"너도 가냐?"

뒷머리를 긁적이며.

"네? 마침 방금 선약이 취소됐는데 수진이가 같이 가자고 엄청 꼬드겨서요."

"나도 너 왕고노릇 말릴 생각 없거든? 회식하면서 혹시 나에 대해 많이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지나 봐 봐."

"네? 왜요?"

경영지원실장이 나 감시하라고 우리 팀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는 말을 해 줄 순 없었다.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어."

뭔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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