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67화 (167/191)

167화 시작

식사 후 19층 경영전략본부 집무실.

부대표급이지만 지주사 서열 2~3위 자리로서 웬만한 계열사 대표 방보다도 훨씬 좋다.

어림잡아 내 사무실의 두 배는 돼 보이는데.

겨우 한층 높아졌을 뿐인데도 방이 넓어서 그런지 창문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수려하게 한눈에 펼쳐졌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블랙커피로 두 잔 부탁드릴게요. 따뜻한 걸로요."

친절한 말투와 표정.

역시 매너가 몸에 배어있다.

하지만 나한테 뭐 마실 건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마치 식후엔 당연히 따뜻한 커피 마신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어쩌면 생각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최동욱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대뜸 물었다.

"천상무님. CFO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직속 상사도 아니고 뜬금없이 뭔 소리?

설마 몰라서는 아닐 테고.

"그거야 결산해서 회계장부 작성하고 자금 조달해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게 하고 대외적으로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역할을 하죠."

우리 팀 세 파트의 롤로 간단히 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재무팀에 오래 계셔서 대충 아시겠지만, 저희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관재파트요. 지금은 기획조정실 조직 산하에 두고 있는데 아무래도 재무팀과 가장 연관이 높으니 재무팀에서 받아주실 수 있을지요?"

관재파트.

말 그대로 재산을 관리하는 부서인데.

여기서 말하는 재산이란 회사의 재산이 아닌 오너 일가의 개인적인 재산을 뜻한다.

오너 일가의 금융상품 및 부동산 관리는 물론, 개인적으로 은행 대출을 받을 때나 부동산 계약을 할 때 대리하는 등 오직 오너만을 위한 조직이다.

대기업 회장이 부동산 계약할 때 본인이 와서 사인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이유는 다 이런 관재파트 직원들이 대리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회사 일을 하는 게 아니니, 음성적인 조직으로 운영하되 각 기업들 상황에 따라 형식적으로는 구조조정본부, 회장실이나 재무팀 같은 부서에 편재한다.

서너 명 내외의 조직으로서 무늬만 팀원일 뿐, 방도 따로 쓰면서 다른 팀원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도 묻지도 않는다.

관재파트 직원을 뽑는 조건도 매우 까다롭다.

첫째,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으므로 입이 무거워야 한다.

흔히들 사주 일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다는 사실은 직장인들에게는 뽐내고 싶은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는 술김에 혹은 자랑삼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다가 언론에 노출되는 등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머리는 좋되 입은 무거운, 술버릇이 괜찮고 맡은 바 일에 그저 묵묵히 잘 따르는 사람들을 위주로 뽑는다.

둘째, 집안도 괜찮아야 한다.

괜찮다는 의미는 너무 어렵지도 너무 풍족하지도 않은 적당히 부족함 없는 집안 출신들을 선호한다는 거다.

너무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으면 부정이나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너무 풍족하게 자랐으면 조그만 어려움에서도 쉽게 때려쳐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물론 로열티다.

나가는 순간 입이 근질근질할 테니 이 사람들의 퇴직 자체가 회사로서는 리스크다.

따라서 관재파트 출신들은 정년은 물론 그 이후까지도 끝까지 책임지는 게 불문율.

절대 중간에 나가지 않을만한, 로열티 충만한 직원들 중에서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서 뽑는다.

물론 이직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두둑이 챙겨주는 건 기본이다.

그러나저러나 관재파트를 재무팀 밑에 두라니.

회귀 전과 비슷한 상황인데.

그 당시 안 좋은 사건으로 구조조정본부가 해체되면서 관재파트를 재무팀 산하에 놓게 되었는데.

무늬만 팀장인 내가 최종 사인을 하면서 결국 모든 걸 뒤집어쓰는 빌미를 제공했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최동욱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 회장님께서 본격적으로 경영권 승계작업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상속플랜부터 조직구조 개편까지 하실 텐데, 기획조정실 업무도 아닐뿐더러 역량도 안 되니 천상무께서 맡아주시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CFO, 아니 저희 재무팀 역할이 아닌데요?"

"네, 압니다. 물론 의사결정을 부탁드리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도 주시고 조언은 해주실 수 있을 거 같아서요. 형식적으로만 재무팀으로 편제하고 실제로는 비서실 직속으로 운영할 거니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의사결정에선 배제되고 책임만 지라?

교활한 놈.

절대 안 넘어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예전에 회장님 일선에서 물러나시면서 비서실도 해체하지 않았습니까?"

"네. 외부적으로는 해체했지만 실제로는 아직 운영 중입니다. 회장님께서 잠시 물러나 계신 것일 뿐, 아직까지 많은 의사결정에 조언을 주고 계시니 소규모로 운영 중입니다. 의전 같은 부속실 업무는 저희 경영전략담당 본부에 편제했고, 다른 업무들도 여러 부서에서 나눠져 있습니다."

조언은 개뿔.

아직도 일일이 지시하면서.

예전 은퇴 선언하면서 비서실을 해체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이름만 바꿔서 그대로 운영하는 건 무리였을 거다.

따라서 여기저기 부서에 기능을 조금씩 떼놓아 운영하고 있다는 건데.

어쩐지 성환이 중국 출장 갔을 때 의전팀이 나와 있었다니, 최동욱이 지시한 모양이다.

성환이는 물론 조윤경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면 내가 경영권 승계작업에서 완전히 배제될 순 없다.

그렇다고 위험한 일에 끼어들어 뒤집어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건 더더욱 안 되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네. 재무팀에서 받도록 하죠.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직을 밑에 두고 조언만 드릴뿐, 제가 의사결정 하는 건 아니니 결재라인에서는 빠지겠습니다."

최동욱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회장실 책임자분은 누구시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며.

"네. 제가 맡고 있습니다."

역시 실세 중의 실세.

수십 년을 곁에 두고 믿었던 우전무에게 뒤통수를 맞은 후 결국 조회장은 핏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아무리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이다 보니 딴 주머니 차고 뒤통수 때릴 수밖에 없다라고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 우전무의 역할을 최동욱이 하고 있다.

회귀 전에는 내가 재무팀장으로 비자금 조성에 관여했을 뿐 비자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건 모두 우전무의 몫이었다.

관재파트를 통해 사주 일가의 재산으로 빼돌리다가 들통이 나면서 조윤경과 이상현의 계략으로 내가 모두 뒤집어쓰고 동작대교에 뛰어내렸었다.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최동욱이 악수를 내밀었다.

"같이 잘해보시죠."

손을 마주 잡자 불끈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그러시죠."

* * *

18층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회전문을 통과하는데 사무실 안쪽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영관리파트장 이승재부장의 목소리다.

팀원들을 잔뜩 끌고 와서는 한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경영관리팀은 물론 우리 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특히 원모가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도와달라는 듯이.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이승재부장이 점심 먹고 카드를 내밀었는데 당연히 결제가 안 됐을 거고, 들어와서 물어보니 재무팀에서 정지시켰다고 해서 득달같이 달려왔을 거다.

마침 성환이나 나도 안 보이니 원모를 사정없이 찍어 누르고 있는 중일 거다.

원모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저 지그시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리곤 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이젠 홀로서기가 필요할 때다.

원모가 이 고비를 넘기면 언터쳐블이 될 거고 못 넘기면 경영관리팀의 밥이 되는 거다.

내가 모른 척 빠지자 더욱 기세등등한 이승재부장이 원모를 더욱 날카롭게 몰아세우는데.

"김과장, 너 미쳤어? 내가 한도를 넘긴 것도 아닌데 카드를 막아버렸다고? 내가 누군지 알고. 너 정말 미친 거야?"

원모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작심한 듯 내뱉었다.

"말이 좀 심하시네요."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말이 심하다고요. 내 월급엔 당신한테 욕 들어 먹는 대가는 없거든요?"

내가 하던 말을 이해했는지 써먹을 줄 알게 됐다.

"뭐……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 와서 행팹니까 행패는? 내가 그럴 만하니깐 그랬지."

"뭐라고?"

밖에 나가서 이부장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안 봐도 훤하기 때문이다.

"경영관리팀에서 예산 좀 쥐었다고 다른 부서는 다 짤라 버리고 자기들은 몽땅 받아 가는 거 모를 줄 아나? 그래도 같이 고생하니깐 그냥 좋게 좋게 넘겼었구만."

"예산은 우리 권한이야. 이게 어디서?"

"그렇죠. 하지만 결산은 우리 권한입니다."

"……."

"경영관리 애들이 흥청거리면서 쓰다가 50만 원 넘으면 여러 장 카드로 나눠서 긁고, 또 어떤 놈들은 집 근처에서 친구들 만나서 개인적으로 쓰는 거 모를 줄 압니까?"

"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다른 부서한테 규정 지키라고 갑질하기 전에 본인들부터 규정을 지키라고요."

"……."

"분할결제, 주말결제, 집 근처 사용……. 어디 제가 한번 파볼까요? 카드 회사에다가 뽑아달라고 하면 바론데. 일도 아니거든."

"뭐…… 뭐라고?"

이승재 부장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씩씩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원모가 이겼다.

준비 많이 했나 보다. 이놈.

때마침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왔는지.

"무슨 일이죠? 김과장님?"

성환이 목소리다.

아침부터 안 보이더니 이제야 출근한 모양이다.

"별거 아닙니다. 부장님."

"아니 그러지 말고. 뭔데요?"

"정말 별거 아닙니다. 경영관리에서 이상한 거 따진다고 와서 제가 혼쭐내고 해결했습니다."

"네."

시크한 한마디 대답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실 저게 원모를 도와주는 거다.

"으음……."

이승재부장 패거리들이 찍소리조차 못 하고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봐야 한다.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내밀자 이승재부장이 분을 못 참은 듯 온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개진 채 씩씩거리며 나가고 있었다.

회전문밖으로 사라지자 원모 쪽으로 돌아봤다.

원모는 지긋이 날 쳐다보며 뭔가 해냈다는 환희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굿잡!'

조용히 엄지척을 날려줬다.

오늘 일은 여러 부서에서 널리 회자될 거다.

어쩌면 원모에게 별명이라도 하나 생길지 모른다.

마냥 좋다좋다 해 봐야 피곤하기만 할 뿐 사실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원칙 따지고 뒤집어 놔 봐야 만만하다고 건드리는 놈들이 없게 된다.

물론 그것보다도 더 좋은 건 재무팀의 위상과 함께 재무팀 내에서의 본인의 위상도 높아졌다는 사실.

부서원들 전부 경외심 가득한 표정으로 원모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똑똑!

노크와 동시에 성환이 들어왔다.

한마디 하기도 전에 선수 쳤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라."

표정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방금 전 사무실에서는 원모를 위해서 일부러 안 낀 게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거다.

"뭔데? 무슨 일인데 지금 출근한 거야?"

"오늘 아침에 가족회의 했거든요."

"그래? 아침에? 보통은 저녁 먹을 때 하잖아."

"그러니깐요."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난 가족 아닌데."

뭔 소리 하냐는 듯 째려봤다.

"알았어. 들어는 볼게. 무슨 내용인데?"

"회장님께서 다짜고짜 경영권 승계작업 진행하시겠데요."

"그거야 애초부터 하고 있었을 거 아냐. 승계플랜 짜놓고 차근차근 시행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깐요. 갑자기 본격화하시겠다니깐 이상하잖아요."

"뭐. 그냥 선언적인 의미겠지."

"음.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선언을 하긴 하셨죠."

"뭘 선언하셨다는 건데?"

"다음 주부터 가족회의 할 때 한 명을 더 부르시겠답니다."

"누구? 친척이라도 부른다는 거야?"

성환이 상심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뇨."

"그럼 누구?"

"최동욱이요."

"뭐라고? 최동욱을 가족회의에?"

"네.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신 거죠."

올 게 온 것이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