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알력 싸움
"혹시 그 트럭 기사 가족들은 연락됐어?"
"야반도주했는지 완전히 종적을 감췄대요. 며칠 전에도 분명 면회 왔다고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예 연락이 안 된다고 하나 봐요."
가족의 장례 절차조차 치르지 않고 사라졌다니.
설마 마치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럼 둘 중 하나겠구나."
"네?"
"누군가 네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다 큰 걸 제안했거나, 아님 협박을 받은 거겠지. 거절할 경우 모든 걸 잃게 될 수도 있는 그런 협박 말야."
"그럼 둘 다겠네. 만약 첫 번째였다면 나한테 먼저 연락이 왔겠죠. 좀 더 챙겨달라고."
성환이 말이 옳다.
조회장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완전한 증거인멸.
즉, 자기의 삶과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매력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한들, 거부할 경우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세상에 자기의 삶을 그렇게 버릴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세상에 자기의 삶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있다는 건가?
인생의 목적과 수단이 바뀐 현실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성환이에게 옆방에서 들은 걸 알려 줄까?
알려 준다고 하면 믿을까?
그럼 성환이가 조회장에게 대놓고 물어볼지 모른다.
만약 그러면 조회장이 어떻게 나올지 머릿속에서 떠올려봤다.
답은 정해졌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그냥 모른 척 넘기는 거다.
나중에 확실한 게 생겼을 때 파헤쳐도 늦지 않다.
"성환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허……. 네."
"이제 그만해라. 파면 팔수록 피해 보는 사람만 생길 거야."
"아니, 거의 다 잡았는데 바로 눈앞에서 놓쳤잖아요. 근데 포기하라고요?"
"맞아. 하지만 네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어."
성환이 눈엔 쌍심지를 켠 듯 핏발이 서 있었다.
"무슨 말? 최동욱이 아니라고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게 하다니, 상대가 만만치 않은 것만은 확실하잖아. 이쯤에서 덮자. 밝혀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생각에 분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으……."
성환이 한동안 씩씩거리더니 포기한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 * *
며칠 후.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면서 원모가 살짝 얼굴을 내밀면서 물었다.
"상무님! 식사하시겠습니까?"
"사 달라는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설마 점심 사주겠다고?"
원모는 온 얼굴을 근육을 실룩거리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제가요? 설마 그럴 리가요. 그냥 상무님 약속 없으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상관 밥 챙기는 문화다.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부서장이 나가지 않는 경우에는 약속이 없다는 뜻이니 부서원들이 통상 이렇게 물어보는 게 관행이다.
약속 없는 부서장이 먼저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기 뻘쭘할까 봐 나름 배려하는 거다.
행여나 약속 없는 부서장을 안 챙기고 자기들끼리 밥 먹고 왔다가는 부서장이 혼밥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혼밥이야 사실 별건 아니지만.
부서장을 왕따시킨다고 다른 부서에서 수군거릴 수도 있고.
부서장의 팀 내 장악력이 부족하다고 다른 부서에서 흉보는 등 오만가지 말들이 다 들러붙는다.
어찌어찌해서 부서장의 면이 안 서고 결국 부서원의 갈굼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밥 챙기는 문화가 지속되는 거다.
"원모야!"
"네. 상무님."
"네가 내 밥 당번이냐?"
대놓고 대답하기가 약간 어색한지 쭈뼛거렸다.
"아. 그게……."
"앞으론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지 마."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나 밥 안 챙겨도 된다고. 약속이 있던 말던 배고플 때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거니깐."
"아니. 그래도 약속 없으시면 저희랑."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됐다고. 너희만 불편한 거 아니거든? 나도 불편하니깐 신경 쓰지 마. 다른 얘들한테도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면 이만."
문밖으로 나가는 거 같더니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었다.
"저……. 상무님."
"왜? 밥 먹으러 가라니깐? 꺼지라고 해야 갈 거냐?"
"그게 아니라 카드 좀……."
"너도 법카 있잖아. 단무지도 법카로 긁는 놈이."
원모가 사람 좋게 헤헤 웃어 보이며.
"한도 때문에 그러지 말입니다. 오랜만에 애들 데리고 맛있는 것 좀 먹을라고요."
"네가 왜?"
"제가 주무과장이잖아요."
"그러니깐 내 말이. 네가 주무과장이라며? 어떻게 경리파트 주무과장이 한도를 따지냐고? 그냥 쓰고 올리면 되지. 도대체 재무팀이 한도가 어딨다고?"
"아니. 안 그래도 지난달에 경영관리팀에서 엄청 갈구더라구요. 우리 재무팀만 무슨 용가리 통뼈냐고, 예산 무시하고 막 쓰냐고요."
원모 자식.
짬밥 좀 먹었다고 고단수 다됐다.
자기네들 편해지려고 나보고 나서달라고 꼬드긴 거다.
자존심 살살 긁어가면서.
"그래?"
"네. 경영관리팀 애들 손 좀 볼 때가 된 거 같습니다."
아예 대놓고 등 떠밀었다.
하지만 난 안 넘어간다.
부서 간 알력 싸움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는 데다 귀찮기만 하다.
어차피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가지고.
"원모야."
"네. 상무님."
"내가 나서리?"
"아닙니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알아서 좀 해라. 그리고 경영관리파트장이 이승재부장인가?"
"네. 맞습니다."
"지금 당장 이부장 법카 막아버려."
"네? 경영관리파트장 카드를요?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라고요?"
회사 전체 예산을 담당하는 부서장 카드를 막으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나 보다.
"왜? 못해? 재무팀이 법카 담당이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분이 있어야지 말입니다."
손짓으로 원모를 불렀다.
쭈뼛쭈뼛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댔다.
두 손으로 셔츠 매무새를 고쳐주며 말했다.
"감히 경리파트 주무과장한테 이래라저래라했다며? 그게 명분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명분이야. 알아들어?"
자신 없는 말투로 고개를 숙인 채.
"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 너 자리에 앉아있을 땐 아무도 날 안 건드렸거든? 그 어떤 누구도."
"아. 네…… 상무님."
"자신감을 가져. 감히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천하제일에서 나밖에 없어. 알아들어?"
이제야 자신감이 생긴 듯 구부정한 어깨를 곧게 폈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그래. 가서 네 법카로 애들하고 맘껏 비싼 거 사 먹어. 사적으로 유용만 안 하면 돼. 팀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묻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쓰라고."
"넵."
경쾌한 답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문을 나섰다.
원모는 나가자마자 법카 담당 직원을 불렀다.
"미경씨"
"네. 과장님."
"지금 당장 경영관리파트장 이승재부장 법카 정지시켜 버려요."
"네? 누구요?"
"못 들었어요? 이승재부장이요. 점심 계산하기 전에 빨리요."
"아니 그래도 어떻게 그분 카드를."
"으흠……. 그냥하라니깐요. 뒷일은 내가 책임질 거니깐. 경영관리팀이 자기들이 예산 쥐고 있다고 지들만 빠방하게 쓰고 다니는 거 더는 못 봐주겠으니깐."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음.
원모가 이제야 제법 재무팀 주무과장다워졌다.
예전 내 별명인 독사로 불리기까진 어렵겠지만 필요할 땐 세게 나갈 필요가 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김없이 배꼽시계가 아우성이다.
허기를 달래려 멀리 나가기도 뭐하고 그냥 지하 구내식당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안면이 있거나 날 아는 사람들이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게 누구야? 재무팀장 천상무 아냐? 왜 혼자 먹지? 궁상맞게."
"맞네. 왕따구만. 왕따."
"재무팀 막 나가는데? 아무리 그래도 지네 임원을 안 챙기고?"
"그러게. 참 나. 무늬만 상무지 저 팀에 조성환님도 계신데, 누가 제대로 챙기기나 하겠어?"
"크크. 그렇긴 그래."
신경 안 쓸라고 해도 내 이름이 거론되니 자연스럽게 주의가 기울여졌다.
심히 난감하다.
가서 아니라고 난 그냥 혼자 밥 먹는 게 습관 돼서 편하다고 말해줄 수도 없고.
귀찮은데 내일부턴 그냥 혼자 먹더라도 나가서 먹어야겠다.
오늘의 구내식당 점심 메뉴는 감자탕.
하지만 숟가락으로 식판 위 국그릇을 휘저어봤지만 감자는 어디 숨었는지 통 보이질 않았다.
붕어빵도 아니고.
감자도 없는데 감히 감자탕이라고 하다니.
게다가 숟가락으로 건져진 뼈는 누가 이미 발골을 끝내놓기라도 한 듯 앙상한 자태를 드러냈다.
내가 설마?
훽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퇴식구가 아닌 배식대에서 가져온 게 분명했다.
앞으론 감자탕이 아닌 뼈해장국, 아니 뼈 온리 해장국으로 메뉴 이름 바꾸라고 나갈 때 영양사한테 한마디 해야겠다.
그래도 한 숟갈 떠서 입에 대니 국물은 괜찮았다.
고향의 맛 조미료를 아낌없이 투입한 모양이다.
몇 숟가락 뜨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앞에 잠시 앉을게요."
익숙한 목소리.
올려다보니 최동욱이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네. 편하실 대로요."
최동욱이 자리하자 뒤에 쫓아오던 사람들이 난감한 듯 서성거리는데, 최동욱이 눈짓을 보내자 다들 다른 곳으로 흩어져 앉았다.
식판을 내려놓으며.
"오랜만입니다. 천상무님. 재입사하시고 처음 뵙네요."
말 속에 뼈가 있는 듯.
마치 직속상관은 아니지만, 유관부서인데다 자기가 서열도 높은데 인사도 안 왔냐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뭐 내가 사과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출근한 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경영지원실장이 붙인 직원을 통해서 일거수일투족을 공유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자리는 처음이죠?"
회귀 후에 말은 몇 마디 나눠봤어도 식사하기는 처음이다.
물론 약속된 오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귀 전에는 조회장의 비자금 관리총책인 비서실 우전무 밑에 있으면서 제법 교류하긴 했었다.
물론 출생의 비밀은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 그러네요. 그런데 구내식당에선 자주 드십니까?"
"네. 맛있어서요."
어이가 없어서 숟가락으로 앙상한 뼈를 드러내며 되물었다.
"네? 이게 맛있어요?"
"네. 전 맛있는데요."
이게 맛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역시 조크루지.
자기 핏줄이라 보살펴 준다면서도 식비 하나 제대로 지원 안 해준 모양이다.
하지만 최동욱이 국물을 뜨자 왜 맛있다고 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최동욱의 숟가락에 올라온 뼈에는 큼지막하고 토실토실한 고기가 가득 붙어있었다.
심지어 동그랗고 예쁜 감자알까지 떠다녔다.
이건 분명 구내식당에서 차별한 거다.
겨우 국그릇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다니.
내일부턴 반드시 나가서 먹어야겠다.
아무도 수군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즐거운 점심을 만끽해야겠다.
한참을 말없이 숟가락질만 하다 최동욱이 지나가듯 물었다.
"일은 어떠십니까?"
"네?"
"재무팀 경험이 많으시니, 따로 적응할 필요는 없으시겠네요."
최동욱의 입에서 밥풀이 하나 튀어 올라 내 식판 안으로 살포시 떨어졌다.
다행히 밥그릇이나 국그릇 안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정말 역겹기 그지없다.
역시 밥은 좁은 데서 서로 마주 보고 먹으면 절대 안 된다.
사육장에서 일렬로 서서 고개 박고 풀 뜯어 먹는 소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전 밥 먹을 때 공장 얘기 잘 안 해서요. 소화가 잘 안 돼가지고."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또 밥풀이 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하지만 입을 다물 생각이 없는지 또 물었다.
"그럼 차 마실 땐 가능하신가요?"
밥 먹고 차 한잔하자는 얘긴데.
같이 지원부서 임원인데다 특별히 거절할 명분이 없다.
더군다나 승낙하지 않으면 더 나불댄다고 밥풀이 튈 수지도 모르고.
그냥 알았다고 하는 게 입 닥치게 하는 거다.
"네. 그러시죠. 식사나 먼저 하시죠."
어서 먹으라고 손짓하자 이제야 고개를 처박고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