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무섭다
며칠 후.
성환이 눈을 마주치자 바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보고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보고서라뇨?"
"출장을 다녀왔으면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기억 안 나? 예전에 청돈가 어디 첫 출장 갔다 와서 김병국부장이랑 임상무한테 보고했던 거?"
이제야 떠오른 듯 표정이 환해졌다.
"아, 그거요? 그거면 쓸 수 있죠."
"뭐. 한 장짜리 일기라도 쓸라고?"
"형식이 중요한가? 내용이 중요하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말로 그냥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늘 습관처럼 내뱉던 말이 자충수가 될 줄이야.
내가 변한 건가?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라도 한단 말인가?
혼란스럽다.
"알았어. 그럼 말로 해 봐."
'크흐흠'
헛기침과 함께.
"내가 첫날에 상해 공항에 도착해서요."
역시나 초등학생 일기장이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일기 쓰냐? 그런 건 아무도 관심 없거든? 보고는 상대방이 뭘 궁금하는지를 해결해 주는 게 중요해. 휘몰아치는 서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서스펜스 그딴 거 하나도 필요 없거든?"
"그럼요?"
"결론부터 말해봐. 아니 그냥 결론만 말해도 충분해. 주저리주저리는 듣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어. 길면 길수록 화만 돋울 뿐이지."
내 오랜 직장생활에서 체득한 정수를 전해줬다.
나름 옆에서 지켜본 게 있어서 깨달은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해결했어요."
"어떻게?"
"앞으로 일정 금액 이상 계약은 수의계약 없이 경쟁입찰 하기로요. 그리고 실제 용역이 필요한 법인이 업무 범위 협의부터 네고까지 다 하고 상해법인에서는 검토만 하기로."
뭔가 해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개인 일만 보러 간 게 아니라, 정말 겸사겸사 일까지 하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왜요? 내부통제 절차를 강화했으면 잘한 거 아닌가?"
"잘못 생각한 게 하나 있어."
"뭐가 잘못이라는 거죠? 그룹 전체적으로 세금 효과는 동일하고 리스크만 줄였는데?"
"하나만 알고 다른 건 모르는 거야."
"다른 거라뇨?"
"큰 리스크는 무시하고 눈앞의 이익만 쫓으면 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서 회사의 존립 자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어."
"큰 리스크라면?"
"계열사 부당 지원 이슈."
"……."
"용역으로 편익을 얻는 계열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원칙인데, 상해법인이 부담하면 수익자부담원칙에서 어긋나잖아. 결국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한 꼴이 되지. 그룹 전체적으로 세금을 부당하게 줄인 거야."
"그럼 뭐가 문젠데요?"
"탈세잖아. 경영진이야 어차피 몇 년 뒤엔 자기가 없을 테니깐 당장의 실적만을 쫓아 뒷사람한테 떠넘긴 거지. 난 모르겠다. 배 째라. 뭐 이런 거랄까."
"그럼 가정이 잘못됐다?"
"맞아. 네가 가서 한 건 리스크가 큰 편법에 대한 내부통제를 갖춘 거야. 애초에 리스크 있는 편법을 문제 삼고 고치는 게 먼전데 말야.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네."
당연히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적당히 풀어줄 필요는 있을 듯.
"아무튼 수고는 했어. 그렇게 뭔가 해결하려는 노력은 높이 사주마."
"넵."
"그리고 그 건은 어떻게 됐어?"
"그 건이라뇨?"
"네가 출장 간 진짜 목적."
"뭔 소리래?"
눈을 동그랗게 말고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김철수부장한테 다 들었거든? 가해자 측하고 만난다고 했다면서?"
"아니, 그걸 어떻게? 부장님 입 무거울 줄 알았더만."
"그런 거 아냐. 내 꾀에 넘어간 거지. 그리고 네가 단지 회사 일 때문에 출장 간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포기한 듯 마지못해 답했다.
"결론만 말하면……. 해결했어요."
"뭘 주기로 했는데?"
"그 트럭 기사 아들이 하나 있는데 한국으로 유학 보내주기로 했어요. 지금 초등학생인데 대학 졸업할 때까지 교육비 일체, 생활비 등등. 그리고 대학 졸업하면 취업까지."
"뭐? 천하제일? 어떻게?"
"그때쯤이면 회장일 텐데 그쯤이야."
"됐고. 넘어왔어?"
"당연하죠. 교육열이 한국 못지않던데요?"
한 자녀 정책으로 친가 외가 합쳐 네 명의 조부모 밑에 유일한 손주.
소황제처럼 키우는 중국의 교육열은 정말 한국 못지않다. 아니. 한국보다 훨씬 치열하다.
형편이 넉넉한 집안은 물론이고 깡촌에서조차 예전 60~70년대 한국에서 논이고 소고 다 팔아서 자식 뒷바라지했던 것처럼 자녀에게 올인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배후가 누군지는 말했어?"
"아직요. 세팅 다 끝내면 알려준대요. 누구는 물론이고 사주받았다는 증거까지 싹 다 넘기기로."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왜 이렇게 파는 거야?"
힐끔 쳐다보며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최동욱 짓이 분명하니깐. 그걸 밝히면 완전히 아웃시킬 수 있잖아요. 예전에 같이 병원 뒤따라갔을 때 들었다면서요. 우리 집안에 원한 있는 거 같다고."
"안치홍의 죽음으로 최동욱이 덕 볼 게 있나? 가장 덕 보는 사람이 범인일 텐데? 그런 의미에선 최동욱이 아닐 거 같은데."
"그럼 누가 덕 본다는 거지? 나? 상무님?"
"그걸 말이라고. 암튼 사고일 수도 있잖아. 괜히 색안경 끼고 보지 말자고."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최동욱밖에 없어."
"알았어. 난 너네 가정사에 빠진다."
"네. 내일이니깐요. 그리고 어차피 얼마 뒤면 알게 될 텐데."
***
며칠 뒤.
18층 회전문을 들어서 사무실로 방향을 틀자 성환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뿐사뿐 발걸음을 내디디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왜 이래? 설마 넌 회사가 좋냐?"
"그럼 상무님은 안 좋습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게 좋은 얼굴로 보이냐?"
"네네. 회장님 때문에요."
"회장님이 왜?"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요즘 무슨 일 하냐고 물어보시길래 말씀드렸죠. 상해법인 부당지원 이슈 해결했다고. 흐흐흐."
"뭐야? 그거 내가 해준 말이잖아."
"상무님은 아이디어만 제공해준 거 아닌가? 실행한 건 나고?"
성과 스틸.
오랜만이다.
단, 예전과는 좀 달라졌다.
통상 팀장이 팀원들의 성과를 가로채는데 이번엔 어찌 된 게 반대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여기서 대표까지 승승장구할 것도 아닌데.
"알았어. 실컷 가져가라."
"뭘요?"
"네가 다 해드시라고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무튼 회장님께서 상해 출장으로 고생 많았다고 한마디 해주시더라구요."
"아무 관심 없으시다며 네가 출장 다녀온 줄은 아셨나 보네. 평상시 대화를 좀 하는가 보군."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비서실 통해서 보고 받으셨겠죠. 어쩐지 상해법인에서 의전해 준다고 공항까지 나와 있더라구요."
로열패밀리이니 예전처럼 그림자 의전이 시작된 모양이다.
"한 턱 쏴라."
"네? 갑자기 무슨 맥락이지?"
"기분 좋으니깐 쏘라고."
"그러죠. 뭐. 어차피 약속도 없는데."
대답과 동시에 누군가 탕비실에서 튀어나왔다.
원모였다.
"중국집 어떠십니까?"
쥐 죽은 듯 엿듣고 있다가 한 턱 쏜다니 튀어나온 거다.
"난 짜장 안 먹을 거거든?"
"짬뽕 드시지 말입니다. 군만두랑 같이요."
생각만 해도 좋은지 침을 질질 흘렸다.
"5만 원짜리 군만두? 알았다. 가자."
어이가 없다는 듯 성환이 끼어들었다.
"뭐지? 산다고 하는 사람은 놔두고 자기들끼리."
"가기 싫으면 카드만 주던지."
"왜요? 일가친척이랑 아는 사람 다 불러서 송년회라도 하게? 절대 안 되지. 같이 가죠."
이 자식이 날 완전히 간파한 듯.
오랜만에 세 명이서 함께한 중식당.
주문 후 원모가 검은 봉지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컴팩트한 사각 용기 안에 가지런히 놓인 노란빛 영롱한 단무지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핑계라도 대려는지.
"여긴 단무지 안 나오잖습니까? 단무지 없는 짜장면은 팥 없는 단팥빵이죠."
기억력도 좋은 놈.
잠깐 어디 들렀다 온다더니, 편의점에서 하나 사왔나 보다.
"단무지 살 돈은 안 아깝나 보지?"
"법카로 긁었는데요. 뭐."
"뭐? 기껏해야 천 원짜리를?"
"네.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 말입니다."
"규정은 없지만 내가 승인 안 해주면 그만이거든."
"에이 상무님 단무지 하나 가지고 치사하시게."
원모가 능글맞게 웃어넘기자 성환이 맞장구쳤다.
"괜찮습니다. 원모님."
"뭐가 괜찮아? 회삿돈이 네 돈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경비는 파트장인 내가 결재하거든요?"
"알았어. 대신 밥값은 네 개카로 하는 거다."
"맘껏 드시죠."
정말 예산 제한 없이 마음껏 시켰다.
산해진미가 올라오는 족족 걸신이라도 들었는지 게눈감추듯 사라졌다.
잠시 후 밖에서 누군가 분주하게 안내하는 소리가 나더니 드르륵 하고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스으스윽 끌리는 느릿한 발걸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는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불도장으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요."
차분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
조회장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주 수요일.
50% 할인된 가격으로 조회장이 불도장 먹는 바로 그 날이다.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성환이 눈치라도 챘는지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괜히 배를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답했다.
"아니야. 오랜만에 많이 먹었더니 소화가 안 돼서."
하지만 더 이상 음식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을 옆방에서 나오는 소리에 기울였다.
'깊은 산속 옹달샘.'
조회장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직도 옹달샘을 쓰는 사람이 있다니.
"전화 받았네."
"……."
"그래 해결했다고? 어젯밤에 말이지?"
"……."
"알았네. 수고했어."
뭘 해결했다는 건지 굉장히 궁금했다.
하지만 옆방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다른 말을 더 하나 유심히 들어봤지만 바로 끊었는지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이어서 우리 룸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
'깊은 산속 옹달샘…….'
성환이 전화다.
"뭐야? 왜 같아?"
"네? 같다뇨?"
"아니 그냥. 내 옛날 벨 소리랑 같다고."
"뭐야 싱겁게."
눈을 살짝 흘기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
"네? 뭐라고요?"
큰일이라도 생겼는지 얼굴이 반사색이 된 채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떻게요?"
"……."
"어젯밤에 말입니까?"
"……."
"그럼 가족들은요?"
"……."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시구요."
무거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뭔 일이라도 생겼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상해에서 매형 들이받았던 그 트럭 기사요."
"왜? 결심 바꿨대? 사주받은 증거 안 넘기겠다고 한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죽었답니다. 어젯밤에 화장실에서 그만 목을 매고……."
"아니 왜? 단순 과실에 형도 짧겠다 자식 앞날도 보장됐겠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게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허탈하고 무거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인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방금 전 조회장의 말과 연관이라도 있는 듯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안치홍의 부재를 바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바로 조회장.
지난번 안가에서 고스톱 치던 날.
관상가 선생이 조회장에게 누군가가 조윤경에게 빌붙어서 앞길을 막는다는 취지의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안치홍의 장례식장에서도 조회장이 관상가 선생한테 물었었다.
거머리같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게 떨어져서 이제 조윤경의 인상이 조금 좋아졌냐고.
그리고 방금 통화에서 어젯밤에 해결됐다는 말.
모든 정황이 조회장을 지목했다.
자기 비자금을 빼돌린데다 자기 딸한테 붙어서 피만 쪽쪽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존재를 분명 떼놓고 싶었을 거다.
게다가 상해에서 의전 수행하면서 성환이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 받았을 테니 성환이가 그 사건을 쑤시고 다니는 것을 알아챘을 거고.
자꾸 파내고 있으니 그냥 묻어버린 거다.
아무리 달리 생각해보려고 이리저리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봤지만 그럴수록 점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만 했다.
조회장.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