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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63화 (163/191)

163화 뒤집어씌우기

대표이사실을 나왔다.

한 시간도 안 돼서 인사는 물론이고 업무보고까지 한 방에 끝냈다.

"어때? 한 명씩 한 명씩 네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조금 분위기만 타면 실장은 물론이고 대표이사까지 네 쪽으로 붙을 거 같은데?"

"대표가 힘이 있어야 말이죠."

"허수아비긴 하지만 명목상 대푠데 네 편이 된다고 나쁠 건 없잖아."

"내 편이요? 그런 게 있습니까? 어차피 다들 눈치나 보고 있으면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거뿐인데."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능력이야. 그 능력이 출중하니깐 경쟁사로 옮겨 대표까지 오른 거지. 네 사람이 되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야."

"내 사람이 있습니까? 쫓겨나면 바로 등 돌릴 텐데. 이미 겪어봐서 알아요. 등에 칼만 안 꽂으면 다행이지. 원모님이나 김철수부장님 정도면 몰라도."

마약 사건 때 쫓겨난 걸 얘기한 거다.

물론 거짓 누명을 쓴 것도 억울했겠지만, 그보다도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훨씬 컸을 거다.

누나가 시나리오에 감독까지 맡고, 유학 시절 친구가 주연배우를 맡았으니.

그전까지는 굽신굽신 따르던 많은 임직원들이 역성 한 번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싸늘하게 돌아섰을 때 많은 것을 깨달았을 거다.

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 직장생활에서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산전수전을 같이 겪어야만 전우애 같은 감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겉으로라도 네 편인 게 어디야?"

"네?"

"근로계약이나 위임계약된 범위 안에서 업무에만 충실하면 되지 그들의 마음속 지지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한 거야. 어떤 계기가 있기까진 생기기 어려울뿐더러 생겼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깐."

"그럼 어떻게 합니까?"

"기대치를 낮춰."

"네?"

"조금 손해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줄 생각을 먼저 해. 그래야 맘이 편해."

하지만 성환은 내 말의 뜻을 전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오는데.

대표이사실 반대편 쪽에 경영전략 담당 최동욱과 사업 담당 조윤경의 집무실이 있었다.

사무실의 위치가 그 두 사람의 위상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성환이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난 언제 여기로 올라오죠?"

"여기 올 필요 없잖아."

"네?"

"바로 21층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 아냐?"

21층은 회장실.

조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지금은 비워놨지만, 후계자가 정해지면 다시 문이 열릴 것이다.

21층이란 말에 행복회로라도 돌린 듯 금세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죠. 20층을 굳이 들렀다 갈 필요는 없죠. 바로 가버리면 되는데."

* * *

L호텔 중식당.

조윤경 일행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11시도 되기 전에 미리 도착해서 자리를 안내받았다.

매니저가 내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한 건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십니다. 손님."

"네.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네며 두 손을 내밀었지만, 매니저가 자리 안내만 해주고는 돌아섰다.

"저기. 잠시만요. 메뉴판은요?"

매니저가 성환이를 바라보며 답했다

"손님께서 미리 주문을 해주셔서요. 음식은 준비되는 대로 바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시켰어요. 우린 빨리 먹고 할 일이 있잖아요."

"뭐 시켰는데?"

"중국집에서 뭘 시키다뇨? 당근 짜장이지."

"뭐? 짜장면? 너 설마 룸에서는 코스나 일품요리 시켜야 하는 거 몰라?"

"네? 설마. 내가 얼마나 자주 오는데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매니저님 맞는 말이에요?"

놀라며 매니저를 쳐다보자.

"아닙니다. 저희 업장에선 그런 제한은 없습니다."

"아니, 분명히 지난번엔……."

음.

대강 상황 파악이 됐다.

성환이 같은 손님한테는 짜장 하나 시켰다고 룸에서 나가라고는 차마 하지 못했을 거다.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내가 주방장님께 특별히 주문한 거니깐 기대해보시죠."

"맛없기만 해 봐."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성환이 말대로 세상이 맛없는 짜장이 있을 순 없다.

더군다나 오성급 특급호텔에서의 몇만 원짜리 짜장면인데.

잠시 후.

매니저가 내온 음식을 보고는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마치 눈코 뜰 새 없이 가장 바쁜 토요일 점심시간, 주문 밀린 동네 중국집에서 배달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불어 터진 면발은 쓱쓱 비벼지기는커녕 젓가락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의천검이나 엑스칼리버라도 된 것처럼 바위에 검을 꽂듯 젓가락을 쑤셔 넣었다.

온 힘을 다해 비비며 흘깃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죄송한데요. 사람이 이걸 어떻게 먹습니까?"

"네. 손님. 그게 아니라……."

성환이 나서서 막아 세웠다.

"내가 특별히 십오 분간 시어링해 달라고 부탁한 거거든요."

"시어링? 이게 스테이크냐?"

"랩에 씌워 15분. 짜장이 출발해서 식탁까지 도착하는 시간. 이 정돈해야 배달 느낌이 난다니깐. 한번 드셔보시죠."

한 젓가락 들어 올리자 면발이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뭉텅이 채 딸려 올라왔다.

"미친놈. 내가 몇 번을 말해. 난 갓 끓여낸 꼬들꼬들한 면발이 좋다고. 이게 뭐냐? 죽도 아니고."

"죽 같으면 숟가락을 쓰시죠."

하지만 그때쯤 옆 방에서 한 명씩 도착하는 소리가 나는 듯해 다시 주문할 수도 없고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맛없는 짜장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불어 터진 짜장은 음식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걸.

다 먹고 나서도 배가 아닌 가슴을 두드렸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앉은 듯 주먹을 쳐봐야 내려가기는커녕 갑갑함이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옆 방.

끼이익.

바닥에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높은 사람이 도착했는지 먼저 온 일행들이 일어서서 맞이하는 소리다.

"오셨습니까! 부대표님."

"앉으세요. 뭐하러 일어나셔서."

배려심 넘치는 상냥한 말투.

최동욱의 목소리다.

잠시 후.

조윤경도 도착했는지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나요?"

'설마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은 없는 거지'라고 물은 거다.

"네. 모두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들었던 목소리다.

경영지원실장도 참석했다.

사장단 오찬모임에 낄만한 직책은 아닌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성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얘기를 안 해 줘요?"

"할 게 없어. 먹기만 하거든."

더도 덜도 아닌 말 그대로 오찬모임.

먹는 데만 열중한 것처럼 쩝쩝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긴장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둘이 힘을 합치겠다는 걸 믿을 수 있는 건지.

언젠간 갈라설 텐데 그땐 누구한테 붙어야 할지 등등을 재느라고 눈치만 살피고 있을 거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듯 슬슬 회사 얘기가 나왔다.

대부분 신규 임원인사나 보직 관련한 얘기였다.

그러다 잠시 후.

조윤경이 지나가는 식으로 경영지원실장에게 물었다.

"성환이는 적응 잘하죠?"

"네. 지난주부터 출근해서 잘 적응하고 계십니다."

"참! 그리고 천태평상무라고 출근했다던데?"

"네. 오늘 아침에 인사한다고 찾아왔었습니다."

"그놈한텐 중요한 일 같은 거 맡기진 말고 알아서 잘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회장님께서 성환이나 천상무를 찾는다거나 무슨 일을 맡기시는 거 같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고."

"네. 그렇지 않아도 믿을만한 놈 하나를 붙여 놨습니다."

실장이 재무팀에 정보원 하나를 심어 놨다는 건데.

파트가 세 개나 되는 데다 부서원만 수십 명인데 이 중에서 골라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선은 가능한 한 조심할 수밖에.

"자 식사들 끝나셨으면 이제 들어들 가셔서 일 보시죠. 최동욱 부대표는 저랑 잠시 얘기 좀 하시구요."

조윤경 한마디에 모두들 바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이제 둘만 남은 듯.

최동욱이 먼저 말을 꺼냈다.

"천대표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무슨 소리야?"

"그저 조성환님 보좌하라는 거 아닐까요? 예전처럼 같은 부서에다가 붙여놨잖아요. 업무 가르치라는 거겠죠."

"아냐.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냐."

"그럼요?"

"성환이 옆으로 부른 게 아니라 그 반대야. 회장님께서 그놈한테 먼저 오라고 하셨어. 그것도 재무팀장에다가."

지하 벙커에서 나눴던 얘기를 꺼낸 거다.

조윤경 말대로 조회장이 나한테 먼저 돌아오라는 말을 꺼내긴 했었다.

"……."

"재무팀장이 어떤 자리야? 아무나 앉히는 자리가 아니잖아. 예전에 우리 남편이 있었던 자리라고. 바로 그 자리를 그때 그놈이 밀어내고 지금 차지했다고."

말투에선 증오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네. 그렇군요. 참! 장례는 잘 치르셨습니까?"

"덕분에."

"네. 힘드시겠지만 훌훌 털고 힘차게 일어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

못 보던 사이 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은 듯.

오랜 외유를 끝낸 조성환이 천하제일로 돌아왔으니 다시 바로 1순위에 등극했을 것이다.

이제 2, 3순위로 밀린 둘이 힘을 합쳐서 1순위를 몰아내려는 거다.

성환이 장자인데다 가장 유리한 포지션이니 조윤경이 성환이랑 손잡고 최동욱을 몰아내면 결국 조성환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란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탁하신 거는 제가 좀 알아봤습니다."

"사고 얘기야?"

"단순 교통사고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해서요."

안치홍 얘기다.

"도로가 좁아서 시야 확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시내에서 그런 속도로 달린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그 큰 대로변에서 대형세단을 발견 못 하고 밀어버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어요."

"일부러 사고를 냈단 얘기야?"

"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가 봐요. 교통사고 낸 남자 집이 최근에 이사했다고 하더라구요."

"도망간 거야?"

"아니요. 조그만 아파트로 옮겼답니다. 그전에는 온 식구가 단칸방 같은 데서 모여 살다가 이번에 옮겼다는 겁니다."

"뭐야? 그럼 돈이라도 생겼다는 거야?"

"네. 그런 거 같아요."

"그자 통해서 알아본 거라도 있어?"

"저희가 변호사 통해서 회유 해볼라고 노력했는데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네요. 어차피 전방 주시의무 소홀로 형이 길지 않을 거 같으니깐 그런 거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아무래도 옆에 조력자가 있나 봅니다."

"누군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

"몇 달 전에 조성환님하고 천대표가 상해에 갔나 봐요."

지난번 수만이와 안치홍의 계약으로 육가공회사 지분인수 했다가 그림자 공장 이슈로 완전히 날려버린 건을 말한 거다.

"일이 있었겠지."

"그 일이 안치홍님과 관련된 일이었다는데요?"

"뭐라고? 남편이랑 그놈들이 만난 거야?"

"네. 원래 안치홍님이 다닌 동방에서 매입하려는 회사를 자기들이 낚아채 갔는데 수십억 손해났다고 호텔에서 한바탕 난리 쳤나 보더라구요."

"그럼 그놈들이 원한이라도 가졌다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그 얘기잖아."

"그런가요? 아무튼 천태평 그자가 예전에 중국 파견 경험도 있어서 지역전문가 소리를 들었나 보더라구요. 아직까지 중국에 아는 사람이 많겠죠."

"자금은 있을까?"

"사업도 그럭저럭 잘나간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옆에 조성환님이 있잖아요."

이런 교활한 놈.

최동욱 이자는 불확실하다고 하면서도 교묘하게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끔 유도했다.

가뜩이나 안치홍이 천하제일에서 쫓겨난 게 우리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죽음의 배후로까지 의심하게 하다니.

만약 믿게 된다면 철천지원수로 여길 게 분명하다.

성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

"뭐래요?"

대강 들은 얘기를 전해줬다.

"최동욱 정말 나쁜 놈이다."

"네?"

"안치홍 죽음까지 나한테 덮어씌우려는데? 아니지. 지금 당장 가서 뒤집어 놔야지."

문을 박차고 나갈 듯 하자 성환이 만류했다.

"지금 가서 뭐 하게요? 귀 밝다고 실토라도 하게요? 설령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 해도 믿기나 하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

"범인이 있다면 잡아야죠. 뭐."

"내가 형사냐? 그런 것까지 하게?"

"최동욱 말이 맞다면 고의 살인이라는 얘긴데. 범인이면 당연히 우리가 아는 사람 아니겠어요?"

"그러면 누구란 얘기야?"

"왜, 항상 영화 같은 거 보면 '누가 누가 범인이래' 하면서 말해주는 사람이 결국 범인이잖아요."

"뭐? 그럼 최동욱? 에이 설마."

"방금 정말 나쁜 놈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게 있을지."

성환이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듯.

특히 영화 얘기를 빌리니 더더욱 그럴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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