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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62화 (162/191)

162화 업무보고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버튼을 눌렀다.

"네. 경영지원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부임한 재무팀장 천태평이라고 하는데요. 실장님 지금 계십니까? 인사나 드릴까 하는데."

"네. 안녕하세요. 상무님. 잠시만요."

실장한테 직접 물어봤는지 몇 초 후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집무실에서 보고받고 계시는데, 금방 끝나신다고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성환이쪽을 돌아봤다.

"같이 가자. 지금 실장님 시간 괜찮다는데?"

"잉? 난 인사했는데."

"언제? 벌써?"

"네. 어제 사무실로 왔던데요?"

"뭐라고? 실장님이 인사하러 왔다고?"

"네. 그럼 내가 갑니까? 아 참! 이것도 직원들 부려 먹는 건가?"

"임원은 괜찮아. 직원이 아니잖아."

회장 아들이 회사로 복귀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몇 년간 쭈구리로 있었지만, 어쨌든 차기 회장 1순위인데 소홀히 할 순 없었을 거다.

비록 지금은 다른 쪽에 줄 서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갈아탈 수 있도록 관계 유지는 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님한테도 인사했나?"

"네. 어제 같이 왔던데요."

"헐. 알았어. 나만 금방 갔다 오지 뭐."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올라 경영지원실장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 비서가 앉아있었다.

"실장님 계시죠?"

"네. 안녕하세요. 천상무님이시죠?"

"네."

"잠시만요."

인터폰을 들고는 말을 건넸다.

"실장님. 재무팀장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

하지만 수화기를 들고 있던 비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네?"

들리지 않게 입을 가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깐 실장님께서 올라오라고 하셨잖아요?"

수화기 건너편이 아닌 실장실 안에서 살짝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라고 하라니깐. 지금 중요한 보고받는 자린지 몰라?"

귀가 밝아서 들린 건지 아니면 들으라고 일부러 소리쳐서 들린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비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저기……. 상무님, 죄송하지만 지금 중요한 보고받는 자리라고 하셔서요."

"기다리라고요?"

"네. 잠시만 기다리시면 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기다리면 되죠."

기선 제압하려는 티가 너무 났다.

옛날 스타일 임원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들에게 직급 차이를 실감케 해준다.

피곤하다.

이런 알력 싸움이 뭐가 중하다고.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나중에 더 피곤해진다.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문자 하나를 남겼다.

잠시 후.

세상만사 다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성환이 나타났다.

조성환을 발견하고는 실장 비서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J3……. 아니, 회장님……. 아니……. 조성환부장님."

당황한 듯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주저리주저리 한 거다.

성환에게 손짓하며 소파로 불렀다.

"조부장. 일로 와서 앉아."

"아니, 왜 불러 가지고 피곤하게."

"네가 파트장이니까 같이 인사드려야지. 실장님 지금 중요한 보고 받고 계신다니깐 여기 와서 앉아. 같이 기다리자고."

비서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서 말씀……."

"괜찮아요. 우린 시간 많으니깐요. 공사다망하신 실장님 소중한 시간을 저희가 감히 뺏을 순 없죠."

"아닙니다."

급했는지 노크도 없이 실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안에서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재무팀장님하고 조……."

"기다리라고 하라니깐. 지금 보고받고 있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조성환님께서 방금 오셔서 같이 기다리고 계셔서요."

"뭐라고? 조성환님께서? 아이 씨! 이게 뭐야."

분명 욕했다.

성환이가 아닌 나한테 한 거지만.

급했는지 헐레벌떡 뛰어나온 실장은 슬리퍼 차림이었다.

두 손을 활짝 벌리며 안면에 웃음을 띠었다.

분명 방금까진 욕설을 내뱉었었는데, 그새 표정을 싹 바꿨다.

역시 저런 처세술이니 실장까지 오르지.

"아이고. 조성환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들어오시지 왜 여기에 앉아계셔서……."

역시 난 안중에도 없다.

"오늘 부임한 재무팀장 천태평이라고 합니다. 인사드립니다."

인사를 건네자 이제야 내 쪽을 쳐다봤다.

뭔데 하는 뚱한 표정으로.

"아 그렇군. 반갑네. 얘기 많이 들었어. 재무팀 에이스였다고."

"에이스는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중요한 보고 받으신다고 하셔서 조부장이랑 여기서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릴라고 했는데……. 비서분께서 극구 알려주셨네요."

실장이 두 손을 펴서 휘저었다

"중요한 보고라니. 이보다 중요한 게 더 어딨다고. 조성환님께서 오셨는데."

실장 옆에 낯익은 얼굴의 한 명이 눈치 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예전 경영관리팀 주무였던 이승재 차장이다.

성환이 처음 재무팀으로 발령 났을 때 짐 옮기는 걸로 기싸움 했었던.

"아니, 이게 누구야! 이승재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악수를 청했지만,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상무님."

"아. 맞다. 이제 차장님 아니시겠구나. 부장님이신가요?"

"네. 얼마 전에 승진했습니다, 상무님."

"축하합니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조부장이 예전에 재무팀 발령 났을 때 이삿짐 가져가라고 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요."

"네? 아……. 그때 말씀이십니까? 상무님."

"에이. 말끝마다 상무님이라뇨. 그냥 예전처럼 말 편하게 해주세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답했다.

"아닙니다. 상무님."

경영지원실장이 조성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화 주시면 제가 갔을 텐데요."

"상무님께서……."

"오늘 제가 부임한 첫날이라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조부장이 굳이 같이 인사드린다고 해서 데리고 왔구요."

"인사는 무슨. 어차피 자주 볼 텐데."

"네. 조만간 업무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네. 경리파트장인 조부장이 지금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깐 빠르면 내일까진 보고드릴 수 있을 겁니다."

"네? 조성환님께서요?"

실장이 놀란 듯 입을 벌리고는 다물지 못했다.

괜히 성환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아직까지 안 한 거야? 실장님께 보고한다고 준비하라고 한 게 언젠데?"

황당한 표정의 성환이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네? 언제요?"

"아하 내가 말 안 했었나? 지금 하면 되지. 내일까지 PPT로 싹 정리해서 갖고 와. 제대로 보고드릴 수 있게."

실장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보고는 무슨 보고요."

"방금 받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차마 버럭 하진 못하겠고,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아니요! 재무팀이 무슨 일을 하는진 잘 알고 있으니깐 따로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조부장이 보고서 잘 쓰는데요?"

"정말 괜찮대도."

"네. 정 그러하시다면요."

됐다.

업무보고 스킵했다.

귀찮기만 한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론 실제로 본인들의 업무를 상기시켜주면서 일정 관리도 하게끔 해주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사실상 보고를 위한 보고일 뿐.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는 선 긋는 자리임과 동시에 점령군 행세할 수 있는 수단만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 저흰 이만."

인사를 건넸지만, 본체만체 성환이만 바라보며 목례했다.

"네. 살펴 가십시오. 무슨 일 있으시면 전화 주십시오."

실장이 굳이 엘리베이터 잡아주겠다며 하행 버튼을 눌러줬다.

"아니요. 저희는 올라가는데요."

"잉? 위로? 20층?"

"네. 부임 첫날인데 대표님께도 인사드려야죠. 직속상관이신데."

실장이 비서를 살짝 돌아보고 턱짓했다.

대표이사실에 전화 넣으라는 거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안 들리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전데요. 지금 J3님 가십니다."

J3.

통상 그룹사마다 로열패밀리에게 붙이는 이니셜이 있다.

매번 회장님, 대표님, 뭐님 이렇게 직책을 부르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또 승진이 워낙 빨라 계속 바뀌니 다른 임직원들과 구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은 J를 쓰며 당연히 J1은 조회장이다.

조성환이 J3, 조씨가문의 세 번째니 그렇다면 조윤경이 J2라는 얘긴데.

회귀 전에는 조성환이 J2로 불렸었는데 상황이 많이 바뀐 듯했다.

조윤경이 성환보다 승계 구도에서 앞선다기보단 성환이 한참 동안 회사 밖을 돌았으니 그랬을 거다.

성환이 돌아왔다고 해서 당장 호칭을 바꿀 것도 아니고.

조회장이 은퇴하고 누가 J1이 되느냐가 중요하지 지금 누가 J2냐 하는 건 큰 의미 없다.

어쩌면 최동욱이 J1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위층 20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내리지 않고 18층 버튼을 다시 눌렀다.

"안 내려요? 대표한테 인사하러 간다면서?"

"내 방 가서 차나 한잔 마시고 가자."

"지금 올라간다고 전화했을 건데."

"그러니깐 천천히 가자고."

"네? 왜요?"

"기분 좀 안 좋게 해야지 성격이 나올 거 아냐. 대표님 성격이 어떤지 한번 보자고."

내 방에 잠시 들려 음료 한 잔씩 한 다음 20층으로 올라갔다.

대표이사실에 도착하자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표이사 역시 집무실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에 한줄기 땀이 흐르는 게 아까 온다는 전화 받고 바로 나와서 한참 동안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꽤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불같은 성격은 아닌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재무팀장 천태평입니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인사를 받기는커녕 조성환을 향해 굽신굽신 다가갔다.

"어이쿠. 전화를 주시지 뭐하러 직접 오셨습니까?"

"네, 저희 팀장님이 대표님께 인사드린다고 해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성환의 반응에 당황한 듯.

"네? 아. 네……."

면전에서 높여주니 이제야 눈에 들어온 듯 나를 쳐다봤다.

"천태평상무라고 했나?"

경영쇄신 차원에서 외견상으론 조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한 사람이었다.

난 오늘 처음 봤다.

"네. 그렇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네. 예전 재무팀에서 조성환님을 잘 보필했었다고."

"네? 제가요?"

분명 같은 팀이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텐데 저렇게 받아들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눈치 빠른 성환이 끼어들었다.

"제가 보필했었죠. 지금도 그렇구요."

"아. 그렇군요. 허허."

겉으론 반갑게 웃고 있지만, 속으론 아마 미칠 거다.

조회장이나 조윤경 눈치만 보면 됐을 텐데, 이제 조성환까지 가세했으니 어떻게 처세를 해야 할지 고민 꽤나 될 거다.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판세를 지켜보다 승기를 잡은 쪽에 철썩 달라붙어 마치 개국공신이라도 된 양 행세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네. 부임한 날이니깐 대표님께 인사도 드리고 업무보고 일정도 여쭤보려구요."

"업무보고?"

"네. 저도 그렇지만 조성환부장이 경리파트장이 되었으니깐 업무 파악 쭉 해서 보고할 수 있게 준비해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조성환님께서 보고서를 준비하신다고요?"

"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성환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어때? 잘 되고 있지?"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야근해서 내일 아침까지는 꼭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밤을 새든지 해서라도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에 올려놔."

"네."

대표이사가 사색이 된 채 성환이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네?"

"절대 아닙니다. 팀이 생긴 것도 아니고 팀장이 바뀐 것뿐인데 업무연속성이 있으니깐 괜찮습니다. 업무보고는 무슨 보곱니까?"

대표이사를 향해 두 손을 벌리고는 말했다.

"그래도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니 괜찮대두. 정말 괜찮습니다. 조성환님. 업무는 제가 알아서 잘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업무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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