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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61화 (161/191)

161화 화려한 복귀

천하제일 출근길.

성환이와 함께 천하제일엔터로 발령 난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바깥은 어둑어둑 해가 뜨기 전.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서 출근해야 한다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몇 년 뒤 수십, 수백 배로 불어날 암호화폐만을 떠올리며 간신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임원이라 법인차량 지원을 받아 더 이상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차를 몰아 천하제일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니 살짝 시간이 늦었는지 이미 만차였다.

뱅글뱅글 돌다 보니, 전용 주차공간에 딱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벽 쪽에 붙어있는 차량번호가 왠지 익숙한데.

바로 조성환 자리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내 자리다.

차를 박아놓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18층을 눌렀다.

회귀 전 임원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 왠지 익숙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18층에 내려 회전문을 통과하자 무거운 공기가 먼저 콧속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었지만 역시나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최대한 온화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개선장군처럼 기세등등 목을 빳빳이 세우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회귀 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같이 월급 받는 처지에 높은 자리에 좀 앉았다고 지위로 찍어누르고 상전 행세하는 건 더 이상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원들 월급엔 상사에게 받는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대가까지 포함되어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카운터가 나왔다.

출납직원이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꼿꼿하게 서서 허리를 숙였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예전에 안치홍의 뒷조사를 시켰을 때 마지막이라고 흘기던 표정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지만 바로 풀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나도 그랬을 테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론 제가 출근할 때마다 일어서서 인사하지 마세요."

"네?"

"일하시는 데 번거롭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십 년간의 일상이 바뀌는 게 잘 실감이 안 났기 때문일 거다.

출납직원 오른편 내 방인 재무팀장실.

보통의 다른 상무급 방보다는 훨씬 크고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회귀하는 날까지 쓰던 방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첫 출근이라고 부서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돌면서 한 명씩 악수했다.

여길 떠날 때도 주무를 맡고 있어서였는지 나보다 연차 많은 선배는 몇 명 없었지만, 그래도 살짝 어색했다.

"오랜만입니다. 상무님."

"그래, 학형아. 오랜만이다. 대리였던가?"

"과장입니다."

"그래? 벌써 그렇게 됐나?"

학형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수다.

내가 차장에서 상무가 될 동안 겨우 한 계단 승진한 것뿐이었는데.

"미안. 열심히 해. 승진시켜줄게."

"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수진이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사이 결혼이라도 했는지 배가 산처럼 불러있었다.

"어이구. 앉아있지, 불편하게. 결혼했나 보네?"

"네. 조금 됐어요."

"축하해.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참석했을 텐데 아쉽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상무님 부담스러우실까 봐 청첩장도 못 드렸었어요."

"그래. 고마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네?"

"아니. 회사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아, 네."

지난주부터 먼저 출근하기 시작한 원모가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상무님! 어서 오십시오. 금의환향 축하드립니다."

딸랑딸랑.

며칠 만에 벌써 적응했는지 옛날 천하제일에서의 버릇이 돌아왔다.

"금의환향은 개뿔. 넌 회사가 좋냐?"

"당연하지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놈이다.

김철수부장이 맡고 있는 IR파트는 물론 자금파트까지 돌아가며 부서원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딱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원모야. 조부장 아직 안 왔어?"

"조성환님이요? 아직이요."

말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안으로 누군가 툴툴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성환이 이제야 출근한 거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팀원들 대부분이 곁눈질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때 서열정리 확실히 해줘야 한다.

"뭐야? 조부장. 지금이 몇 신데 출근이야?"

제법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이자 성환이 바로 고개를 수그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들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일찍일찍 좀 다녀라."

"네……. 그런데."

"뭔데?"

"사실 오늘 일찍 오긴 했는데 누가 내 자리에 차를 대놨더라구요. 전화번호도 안 붙어있어서 빼달라고도 못하고 다른데 대고 오느라고요."

"거기 오늘부터 내 자리다. 넌 딴 데 새로 만들어."

"네? 그게 상무님 차라고요?"

"어. 왜?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조용한 목소리로.

"나 주차장에 자리 없으면 회사 못 다닐 거 같은데 어떡하지?"

"네네. 그냥 쓰십시오."

"그래. 일 봐."

하며 성환이 등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놀랐는지 수군거렸다.

그중에서도 자금파트의 연차 많은 선배 둘이 뒷담화를 해댔다.

"아무리 부하직원이라곤 해도 그래도 회장님 하나뿐인 아들인데 너무한 거 아냐?"

"그러게 말야. 지금은 부장이라고 해도 곧 초고속 승진할 텐데.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할라고?"

"냅 둬. 저러다 잘리겠지."

귓속말로 속삭이는 게 다 들렸다.

'그럴 일 없을 거다.'

'천하제일에 있는 동안 이놈이 내 상관이 될 가능성은 제로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저 지긋이 쳐다만 봤다.

그러자 이상했는지.

"잠깐만! 혹시 들은 거 아냐?"

"누구? 천태평? 이 소리를 어떻게 들어?"

"쉿! 쳐다보잖아."

"걱정 마. 안 들려."

"그래도 상문데 이름을 부르면 어떡해?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새파란 후밴데. 난 도저히 못 하겠다."

귓속말하면서도 걱정은 되었는지, 내 쪽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내가 괜찮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귀신이야 뭐야? 정말 들은 거야?"

"뭐야, 무섭게? 아무튼 조심하자고."

드디어 내 방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대감은 곧장 탄성으로 바뀌었다.

통창 너머 한가득 펼쳐진 빌딩 숲 사이로 경복궁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는 눈을 감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찬란한 미래와 복수심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가능하면 빨리 성환이 이놈을 회장 자리에 앉혀야 한다.

조윤경은?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잘근잘근 밟아줄 거다.

그리고는 천하제일을 다시 떠나는 거다.

천하태평으로 돌아가되 내가 회귀하던 그 날.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린 그 날까지는 암호화폐를 쭉 들고 있을 거다.

갑자기 가격이 고꾸라져서 십 원짜리 동전 가치가 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회귀하던 그날까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전까진 전부 팔아서 현금화한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자금으로 세계적인 기업들을 하나씩 사서 모으는 거다.

굳이 직접 물건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없다.

그런 건 잘하는 사람한테 맡기면 그만이다.

난 그저 잘하는 사람이나 기업을 찾아서 투자도 하고 도움을 줌으로써 과실을 나눠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천하태평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날 거고 난 말 그대로 마이더스의 손, 경영의 신이 되어 있을 거다.

잠시 후.

톡톡.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눈을 뜨자 성환이 아니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꿈 꿨나 봐요. 어떻게 회사에서 낮잠을 잘 수가 있지? 그것도 부임한 첫날에?"

"둘째 날부터는 자도 되냐?"

"네?"

"남이사 내 방에서 잠을 자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노크도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

"노크했거든요? 뭐야. 설마 이제 안 들리기 시작한 거야? 그 능력 없어진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들리면 어떻게 사냐? 집중해야 들리는 거지."

"그럼 이따가 집중 좀 하러 가시죠."

"뭔 소리?"

"오늘 누나랑 최동욱 오찬모임 있데요. 계열사 사장단 모임이라는데."

"난 사장 아닌데?"

"아니. 거기 끼라는 게 아니라 옆 방으로 가자고요."

"내가 왜?"

"무슨 수작 부리는지는 들어봐야죠."

이런 씨댕.

잘못 걸려들었다.

임원인데다 아무리 이놈 직속상관이면 뭐해?

이놈이 이렇게 막 시켜 먹어도 거부할 수가 없는데.

안 한다고 하면 출자하라고 빌려준 돈 그냥 빼가겠다고 할 테니.

"아, 도대체 넌 왜 괜히 우리 부서로 와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냐?"

"그럼 어디로 가요?"

"널린 게 부서잖아."

"내가 영업할 것도 아니고 스텝부서 밖에 못 가는데. 다른 데 가면 누나나 최동욱 밑에 있는 꼴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알았어. 어딘데?"

"L호텔 중식당이요."

"불도장 거기?"

"네."

"네가 사는 거다."

"임원도 됐는데 한번 좀 사면 안 됩니까?"

"미쳤냐? 회장 아들한테 밥을 사게?"

"알았으니깐 이따 같이 가요. 안 마주치려면 미리 가 있어야죠."

"부임 첫날인데 실장님이 같이 먹자고 하면 어떡하지?"

"오늘만 날인가? 약속 있다고 하면 되잖나?"

그렇지.

이놈과의 약속은 프리패스다.

"알았어. 그래도 부임 첫날인데 실장님하고 대표님한테 인사는 해야지. 직속상관들인데."

"지금 그 사람들 인사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찍히면 어떡할라고?"

"안 잘리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회장님께서 콕 집어서 넣어주신 자린데 감히 누가 자른다고?"

"잘리는 거 걱정하는 거 아니다. 피곤할까 봐 그런 거지."

성환이 말대로 어떻게 해도 잘릴 일이 없으니 막 나가도 된다는 얘긴데.

꽃놀이패를 들고 있는 거다.

보너스 세 장 들고 고스톱 치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도 쉽다.

"네. 그래도 열한 시 전에는 출발하는 걸로 하시죠."

"알았어. 예의상 그냥 인사만 하고 올게."

똑똑!

누가 왔는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앳된 얼굴의 직원 한 명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잔뜩 주눅 들어있는 게 임원 앞이라고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저기……. 상무님."

"네. 뭐 보고할 거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무슨 일이죠?"

"아침에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출근하셨을 때 바로 드릴까요? 아님 요청해 주실 때 드릴까요?"

"비서예요? 이상하네. 상무는 비서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시죠? 설마 업무기술서에 재무팀장 차 타오라고 써 있어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원래 그래서……."

딱 보아하니 경리 여직원 중 막내다.

부서원 중 누군가 한 명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차도 대접하고 개인 잡무도 처리해주는 등 비서 역할을 하는 게 오랜 관행이었기 때문일 거다.

지금껏 재무팀장 자리에 앉은 어느 누구라도 모두 이렇게 대접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회귀 전의 나도 당연히 그랬었다.

뭔가 대단한 자리에라도 앉아있는 양 부서원들에게는 어떤 모멸감이나 굴욕을 주더라도 그럴 만한 마땅한 이유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는 법.

"차는 내가 알아서 타 마시면 됩니다. 그리고 손님 오시면 내가 따로 부탁할 테니깐 그 외에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네? 아니 그래도……."

"괜찮데두요. 맡은 업무에만 충실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총총걸음으로 돌아나갔다.

"뭐지? 왜 갑자기 착한 척을 하는 거지?"

"저 친구 월급에 내 수발들라는 거까지 포함된 거 아니거든?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 다른 직원들 부려 먹지 마라."

"내가 언제 그랬다고요?"

"언제긴 언제야? 지난 생에서지."

"엥? 지난 뭐?"

말이 헛나왔다.

하마터면 천기누설할 뻔.

"아니……. 몇 년 전 재무팀 있었을 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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