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돌아가다
다음 날 아침.
인터넷 검색을 하던 원모가 소리쳤다.
"대표님! 떴습니다."
원모의 컴퓨터 화면 속 기사 제목은 '천하제일 그룹 임원인사'였다.
"명단에 있어?"
"네. 조윤경 전무 부대표로 승진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주사 사업 담당 됐는데요? 그리고 이것도 좀 보세요."
원모가 기사 하단을 가리켰다.
보직변경 명단에 '경영전략담당 최동욱'이라고 적혀있었다.
김철수이사도 기사를 훑더니, 한마디 했다.
"조전무 승진했네. 그럼 최동욱은 밀려나기라도 한 건가?"
"아니요. 그 반대에요."
"경영전략담당? 처음 들어보는데? 그냥 고문처럼 한직으로 밀려난 거 아닌가?"
정말 밀려났으면 어제 안가 보고자리에 참석도 못 했을 거다.
그리고 며칠 전 기세등등하게 임원들을 거느리고 안치홍 장례식장에도 행차하지 않았을 테고.
"제 생각에는 마음대로 신규사업 추진해보라고 전권을 준 거 같아요."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가면서 말이지?"
"네. 조윤경이 기존사업 운영관리를 맡고 최동욱은 신규사업을 총괄하라는 의미 같은데요?"
"그래도 엄연히 지주사 대표가 있고 이번에 연임까지 한 거 같은데 이 둘이 힘이 있을까?"
"어차피 지주사 대표는 허수아비잖아요. 안가 회의에도 참석 못 하는데요. 의사결정은 조회장이 막후에서 다하고 있었는데 이제부터 이 두 사람한테 슬슬 맡겨보겠다는 거죠."
"둘이 실세가 됐구만."
"그런 셈이죠."
김철수이사가 매우 안타까운 듯 물었다.
"그럼 우리 조성환님께선 어떻게 되는 거야?"
"낙동강 오리알 됐죠. 뭐."
어느새 사무실에 쓰윽하고 나타난 성환이가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내가 출근할 때는 본 척도 안 하는 사람들이 성환이한테는 걱정스러운 듯 앞다퉈서 인사를 건넸다.
성환이는 아직 술이 덜 깬 듯 비틀거리다 의자에 철푸덕 몸을 던졌다.
"뭐야 그 몰골은? 2층 약국이라도 들러서 견디셔나 한 병 하고 오지 그래?"
원모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제가 사 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술 땜에 그런 거 아니니깐요."
성환이 만류했지만, 원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었을 뿐 발걸음을 떼진 않았다.
"안가고 뭐해? 네가 사 온다며?"
"제가 사 온다고 했지, 산다고까진 안 했는데요?"
"허!"
헛웃음뿐이 나오질 않았다.
조용히 지갑을 꺼내 열었지만, 오늘따라 노란 율곡 선생님은 안 계시고 파란 세종대왕님만 계셨다.
세종대왕님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저기……."
한마디 하려는데 원모가 막아 세우고는 선수 쳤다.
"당근 거스름돈은 필요 없으시지 말입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이 돈으로 실컷 부자 돼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원모가 만 원짜리 한 장을 자기 지갑에 넣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잠시만요."
원모가 자기 책상 맨 밑 서랍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 성환이에게 건넸다.
환하게 웃으며.
"여기 있지 말입니다. 견디셔."
정말 영롱한 녹색병 바로 그 음료였다.
이 자식 내가 모르는 능력이라도 있나?
내가 회귀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상하기 힘든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뭐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사놓기라도 했다는 거야?"
원모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따로 산 건 아니구요. 이럴 줄 알고 지난번 회식 때 제 거 안 마시고 넣어놨었습니다."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하나?
전생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 선생님이 환생한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네 말대로 사 온 건 아니니깐 만원은 돌려주지, 그래?"
"네? 대표님이 항상 하신 말씀을 기억 못 하십니까?"
"뭔 개소리야?"
"남의 지갑에 들어간 돈 빼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구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종종 내뱉은 말이 맞으니깐.
따악.
성환이 견디셔를 따고는 벌컥 들이켰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입속에 탈탈 털어 넣었다.
"뭐야? 왜 효과가 없는 거야?"
"방금 마셨거든? 설마 먹자마자 술이 깨겠냐?"
"먹자마자 안 깨면 뭐 하러 사서 마셔? 냅 둬도 어차피 깰 건데."
그러고 보니 심각하게 고민해보진 않았었다.
그냥 마시면 한결 나아진다고 막연히 믿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효과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 동안 회사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술도 안 깬 놈이 뭐 하러 일찍 왔어? 괜히 내 돈 만 원만 썼잖아. 아니지, 어제 택시비까지 하면 얼마야 도대체?"
견디셔 효과라도 왔는지 성환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제법 단호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을 꺼냈다.
"할 말이 있어서요."
"뭔데?"
성환이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답했다.
"제안 하나 하려구요."
지금 이 상황이 나한텐 가장 좋은데 쓸데없이 웬 제안?
"듣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김철수이사나 원모는 달랐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나게 뜨고는 성환이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에 식사하면서 회장님께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고 궁금하지도 않거든?"
하지만 김철수이사가 제지했다.
"천대표 가만히 좀 있어 봐. 조성환님께서 말씀하시잖아. 들어는 봐야지."
성환이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께 내가 천하제일로 돌아가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뭐하러 또 물어봐? 분명히 지난번엔 회장님이 안 된다고 하셨잖아."
"그거야 대표님한테 먼저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요."
김철수이사가 매우 놀란 듯했다.
"뭐라고? 회장님께서 천대표한테 돌아오라고 했다고?"
"네.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왜 거절했어?"
"전 다시는 그런 생활 안 합니다. 제가 지금 천하태평 대푠데 거기 들어가서 다시 월급쟁이를 하라고요? 몇 년 있으면 천하제일 지분 몽땅 사서 아무나 회장 자리에 앉힐 수도 있는데 굳이 뭐 하러요?"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찼다.
"아! 참. 천대표 지금 여기서 할 일이 없잖아. 우리도 마찬가지고."
본심이 나왔다.
내가 들어가면 자기들도 같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왜 할 일이 없습니까? 주간업무 회의 때까지 할 일 찾아보기로 했잖아요."
"금요일까지 갈 거 없잖아. 어차피 다들 출근했는데 지금 얘기해보자고."
"아직 제 얘기 안 끝났거든요?"
성환이 나무라듯 한마디 꺼내자 김이사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결론은 회장님께서 저보고 들어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귀찮기만 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조윤경에 대한 복수도 지금보다는 성환이가 천하제일에서 자리 잡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그래? 알았어. 잘 가라. 어차피 별로 역할도 없는데 네 자리나 찾아가라. 여기 천하태평은 내가 잘 이끌어볼게. 나중에 배당은 지분율대로 꼬박꼬박 챙겨줄 테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런 건 걱정 안 하거든요? 얼마나 된다고."
그래.
앞날을 모르고 그렇게 신경 안 쓰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럼 그냥 가면 되지 제안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회장님이 조건을 걸어서요."
"조건? 뭔데?"
"대표님하고 같이 오는 거요. 지난번에 회장님이 제안하신 자리로요."
"재무팀장? 안 가. 절대 안 간다니깐."
제법 단호한 태도를 보였지만 성환이도 지지 않았다.
"조건도 조건이지만 제가 혼자 갈 순 없어요. 내 편이 한 명도 없는 마당에 가서 뭐 하라고요."
"네가 힘을 키우면 너한테 붙을 거야."
별 위로는 안 된 듯했다.
훽하고 노려봤다.
"다들 자기 자리보전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인데 나한테 붙는다고 한들 믿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 같으면 몰라도요."
도와달라는 듯 김철수이사와 원모를 쓰윽하고 둘러봤다.
나름 성공한 듯.
다들 감동의 표정으로 두 손 모아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았다.
자기들도 데려가달라는 거다.
어차피 여기서 할 것도 없이 투잡 뛸 바엔 아예 천하제일로 돌아가는 게 나을 테니.
이럴 땐 조금의 여지도 줄 필요가 없다.
"절대 안 돼. 나도 내 인생의 길이 있어.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들러리 같은 거 설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성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까지 내비쳤다.
"끝까지 들어보시라니깐요."
"귀찮으니깐 빨리 말해."
"내가 천하제일엔터 대주주인 건 아시죠?"
"몇 년 전에 회장님 개인 지분 30% 증여받았잖아. 지금 몇천억 됐다고 자랑하는 거야?"
"자랑은요. 그거 조금 팔아서 500억 출자할게요."
다들 성환이의 폭탄 발언에 당황했다.
"뭐라고? 우리 천하태평에 500억을 출자한다고?"
"네. 그 출자금 대표님이 마음대로 굴리십시오. 암호화폐를 사든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든 맘대로요."
하지만 누구 좋은 일이라고, 전혀 당기지 않았다.
"됐어. 어차피 네 지분만 늘 텐데 그게 우리한테 무슨 도움이 되지? 난 최대 주주 뺏길 생각 추호도 없거든?"
"출자는 하되 지분비율은 유지하겠습니다."
"어떻게 가능하지?"
"내가 돈 빌려주는 걸로 하면 되잖아요."
"빌려준다고? 난 50%지분이니깐 250억을 빌려주겠다는 거야?"
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분들은 5%니까 25억씩 빌려드리는 셈 칠게요. 이자는 최소한으로 하고 나중에 투자수익 나눌 때 정산받기로 하는 거죠."
거의 공짜로 돈을 빌려줘서 천하태평을 몇 배로 키워주겠다니.
말 그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500억을 모두 암호화폐에 투자한다면 지금 백억 투자한 거의 다섯 배란 얘긴데.
도대체 얼마가 된다는 걸까.
정말 흥분돼서 하마터면 끄악하고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김철수이사가 걱정이 앞선 듯 어두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다가 투자가 실패라도 하면 어쩌죠? 저희 능력으로는 이자는커녕 원금도 갚을 수가 없을 텐데요."
미래를 모르니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
"투자 실패할 경우에는 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면 각서라도 써드리죠."
"다 날리면 한 푼도 안 갚아도 된다고요?"
"네. 한 푼도요."
전혀 리스크 없이 거금을 빌려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김철수이사와 원모가 동시에 '이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 역시 따라 지를 뻔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어딨다고 괜히 김칫국부터 마셨다.
"뭔데? 말해 봐."
"다들 천하제일로 합류해서 제가 회장이 되도록 돕는 겁니다."
"뭐라고?"
"말 그대로 제가 천하제일의 회장이 되어야 손실이 나더라도 안 갚으셔도 된다고요."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투자손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냥 500억을 맘껏 투자하라고 싸게 빌려주겠다는 건데.
이 정도면 고민할 것도 없다.
나중에 빌게이츠랑 워렌버핏 재산을 합쳐봐야 내 재산의 반도 안 될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천하제일로 돌아간다?
다시 월급쟁이의 삶으로?
하지 뭐.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더군다나 그 미래가 더욱 커진데다 앞당겨지기까지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차피 천하태평이야 매일 트레이딩 할 것도 아니고 암호화폐 사놓고 쭈욱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깐 방해될 것도 없다.
하지만 김철수이사는 탐탁지 않은 듯.
"회장이 안 되시고 투자까지 말아먹으면 갚아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역시 예리하다.
성환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이사님과 원모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리 없을 거니깐요. 각고의 노력을 해주셨는데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김이사 안심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조건이 있어."
"뭔데요?"
"내 직급이 너보단 항상 높아야 해."
"네?"
"네가 나보다 직급이 올라가는 순간 바로 그만둔다고. 물론 네가 천하제일 회장이 되면 난 나와야겠지. 너 밑에선 단 하루도 싫어."
성환이 손을 내밀었다.
"Deal done."
김이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는?"
"제가 회장님께 제안받은 자리가 재무팀장입니다. 이사님께선 IR파트장을 맡아주세요."
"고마워."
"그리고 원모는 경리파트로 간다."
"네? 경리파트장이요?"
"아니 파트장이라고는 안 했는데? 이사님은 IR파트장 경험 있으시니깐 용인이 될 텐데 너까지 갑자기 부장 자리로 갈 순 없어. 반발만 살 테니깐."
실망하지는 않은 듯 바로 웃어 보였다.
"네. 대표님. 이해합니다."
투잡으로 알바 뛸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