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59화 (159/191)

159화 밀려나다

며칠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특별히 할 게 생기진 않았다.

배당하고 남은 투자금을 암호화폐에 몰빵한 후 천하태평엔 더 이상 여유자금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투자 물건을 탐색하지도 않고 그저 기존에 투자한 건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운 격이랄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료한 일상이었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오히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상황인데 미래를 모르는 다른 팀원들은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10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 근처에 도착했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기 하나 없이 차가운 공기만이 느껴졌다.

이젠 누구 하나 업무시간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성환이 역시 안치홍의 장례 이후로 아직까지 코빼기조차 안 보였다.

한 시간도 넘게 지나자 사무실 바깥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퉤퉤!

삐리리!

회사 문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

침 뱉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원모 놈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역겹다기보단 반가웠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밥 먹을 때 되니깐 기어들어 오냐?"

"먹고 왔는데 말입니다."

"뭐라고? 벌써?"

"네. 집에서 방금 먹고 출근한 건데요."

"지금이 몇 신데 출근이야?"

"네? 우리가 업무시간이 따로 있었습니까?"

웬일인지 오늘따라 따박따박 말대답이다.

확 그냥 뒤집어버릴까 했지만 틀린 말 한마디도 없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표님 솔직히 지금 회사에서 아무것도 못 하지 않습니까?"

원치 않는 암호화폐에 몽땅 투자했다고 시위라도 하나.

"그거야 다 배당해버렸으니까 그렇지."

"그럼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투잡이라도 뛰어도 되겠습니까?"

"뭐라고? 투잡? 배당도 많이 받았으면서 뭐 하러?"

"많긴요. 빚 갚으니깐 끝나던데요."

"그러게 성환이한테 뭐하러 갚아 가지고. 내가 뭐라고 했어. 암튼 곧 있으면 엄청 크게 터질 거니깐 기다려봐."

"어느 세월에요.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라고요?"

"그래.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어차피 기존 투자안들 대박 나 봐야 몽땅 다시 암호화폐에 투자하신다면서요? 그럼 우린 할 일 없는 거 아닌가요?"

김철수이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원모 말이 맞아. 다른 데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기다리는 거뿐이면 굳이 우리가 여기서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잖아."

분명 방금 전까진 없었는데.

원모랑 티격태격하는 사이 살짝 들어왔나 보다.

암호화폐에 투자하더라도 매일매일 트레이딩 할 것도 아니니 김이사 말이 맞긴 하다.

사실 가격이 크게 오른다는 사실만 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추세까지 아는 건 아니니깐 한 번 매입하고 나면 쭉 보유하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당받은 걸로 개인적으로 투자하실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 집 옮기느라고 여유가 없어서 말야. 나도 원모 말대로 투잡이나 뛸까 생각 중이야."

"네? 이사님도요?"

"그래. 애들 등록금 정도는 마련해놔야지."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즐기질 못하다니.

아마 오랜 직장생활로 인해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게 습관화되었거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서 그런 것일 거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와는 상황이 다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이사님. 가만히만 계셔도 곧 부자가 될텐데 뭐하러요?"

김철수이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사님! 업무가 과다하거나 스트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일만 하고 집안일은 하나도 신경 안 쓴다고 집에서 왕따 당하는 것도 아닐 테고, 승진에서 누락 되거나 후배가 상사가 되거나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 않거나,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이 나거나 하루아침에 책상이 없어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게다가 프로젝트가 어긋나서 윗사람한테 샌드백처럼 까이거나 아랫사람들한테 멸시당하는 것도 아니고요. 직급이 낮을 땐 피해자로 살다가 직급 올라가면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지 하면서 가해자의 길을 선택하는 상황이 올 것도 아니잖아요. 도대체 천하태평이 어때서요? 말 그대로 천하태평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숨 한 번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평상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입에서 술술 엮여 나왔다.

하지만 김이사에겐 역부족이었는지.

여전히 감동은커녕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잖아. 정체되었다고 해야 하나? 뭔가를 하고 이루면서 한 걸음씩 성장해야 하는데. 솔직히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자는 건데. 물론 천대표 말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찬란한 미래가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한 법이야."

원모가 김이사의 말에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쌓인 생각과 습관들을 단기간에 떨쳐내기엔 아무래도 무리일 거다.

나처럼 회귀함으로써 미래를 겪어본 것도 아닐 테니.

다시 살게 되면 지난 세월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것도 말 그대로 나처럼 회귀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김이사의 말에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우리 아이디어 한번 모아보죠. 뭔가 의미 있는 일, 과정도 만들면서 돈이 될 수도 있는 방법 한 번 찾아보죠."

"그러자고."

"네. 투잡은 그 이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알았어. 각자 며칠 생각해보고 이번 주 주간업무회의 때 논의해보는 게 어때?"

"네. 좋습니다."

더 싸워봐야 의만 상할 뿐 나아질 게 없다.

이럴 땐 시간을 갖고 조금씩 천천히 의견을 조율하는 게 더 낫다.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검색도 하고 짱구를 굴려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가치관이나 삶의 경험, 하다못해 몇 회차의 삶이냐 등 이렇게나 다른데 모두를 만족할 만한 게 있을 리가 없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삐삐삐삐~

핸드폰이 울렸다.

건환이 번호다.

"무슨 일이야 건환아?"

"왜 이렇게 놀라십니까?"

"왜긴? 너한테 전화 온 건 뭔가 사고가 터졌다는 건데. 당연히 불안해서 그렇지."

"사고는요."

"그래? 무슨 애긴데 그럼?"

"좀 전에 최동욱님이 비서한테 축하난 보내라고 시킨 거 우연히 들어서요."

"축하난? 누구한테?"

"그게……. 조윤경 전무요."

"조윤경? 조전무가 왜?"

"실은 내일 임원 인사발표가 있거든요."

"아! 벌써 그럴 땐가? 그럼 혹시 조전무가?"

"네. 이번에 승진이 확실한 거 같습니다. 최동욱님이 미리 결과 아셨겠죠."

"뭐라고? 예전에 조회장님이 자기 포함해서 일가 친족들 직접 경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기자회견까지 했었잖아."

"그게 벌써 몇 년 지났잖아요. 물론 안가에서 보고 받으시면서도 표면적으론 회장님께서도 물러나신 지 꽤 됐잖습니까."

"이만하면 됐다는 거야?"

"네. 그룹 내에서도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하고 이제 조전무가 전면에 나서도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성환이는?"

"네? 조성환님요? 글쎄요……."

얼버무리듯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 편한 게 그냥 분위기만 알려줘."

"조성환님 얘기는 들리는 게 없습니다. 아무래도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고 해서 아직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 같아요."

"그러겠지. 괜히 나섰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대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확실한 줄 아니면 잡는 거 아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성환이가 장잔데……. 차기 회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도 편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야?"

"그렇죠. 단단한 쇠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는 아직 모르니깐요."

건환이 얘기가 맞다.

조회장의 의중을 모르는 상태에서 덥썩 잡았다가 낭떠러지로 꼬꾸라질 수도 있는데 함부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거다.

확실해질 때까지는 바짝 웅크리고 눈치만 보고 있는 거다.

그나저나 최동욱이 조윤경과 손이라도 잡은 것일까?

"발표도 나기 전에 축하난이라니. 혹시 최동욱이 조윤경이랑 만났다는 얘긴 들은 거 없어?"

"네, 특별히 그런 거 같진 않아요."

"난은 조윤경한테만 보내는 거고?"

"그렇진 않아요. 몇 명한테 보내는 거 같은데요."

뭐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정도 위치에 있으니 축하난 정도야 얼마든지 보낼 수 있다.

알면서도 안 보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고마워. 건환아. 또 일 생기면 알려줘."

"네. 대표님. 수고하십시오."

* * *

퇴근 후.

썰렁한 오피스텔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성환이 번호다.

"뭐냐? 얼굴 한번 보기가 그렇게 어렵냐?"

하지만 수화기 건너편에서 귀에 익지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여보세요. 천대표님이신가요?"

근심이 잔뜩 서린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

"저 유란데요. 지금 오빠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최동욱과 헤어지고 성환이랑 다시 만나나 보다.

성환이가 취했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났다.

지난번 마약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일이라도 난 것 같아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프라이빗한 술집.

안내받아 룸에 들어서자 유라가 외투도 다 입은 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가 촬영 중간에 잠깐 나온 거거든요. 선생님들 기다리고 계셔서 지금 들어가야 해요. 오빠 좀 부탁드릴게요."

이런 씨댕.

당했다.

평상시 이것저것 묻고 따지고 하는데 오늘은 급한 마음에 바로 나왔다.

그것도 슬리퍼 차림으로.

"저기 잠깐!"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유라는 이미 나간 후였다.

뒤통수에다 대고 욕 한번 날릴 수도 없게 됐다.

마침 막 잠에선 깬 듯 성환이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쳐다봤다.

"뭐냐? 술 처먹었으면 들어가서 자빠져 자기나 하지 사람 귀찮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다니?"

"집에서 쫓겨났다고요."

"쫓겨나?"

"네. 최동욱이랑 계열사 사장이 몇 명 왔거든요."

"그 사람들이 온 거랑 네가 쫓겨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오늘 보고받는 자린데 갑자기 회장님께서 누나한테 배석하라고 하시더라구요."

"조윤경이 왜?"

"이제 지주사 사업 담당이니깐 들어야 한다고요."

"사업 담당이라고? 기획실장 아니었나?"

"네. 내일부터 바뀐데요. 승진도 하고."

"음. 승진한다는 얘긴 건환이한테 들었어. 그런데 자리까지 옮기는구나."

그 보직이면 꼭 로열패밀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보고 자리에 낄만하다.

실세 중의 실세이니.

"사업 담당이면 보고 자리에 배석하는 게 맞긴 하잖아. 그게 왜?"

"누나가 배석하니깐 나도 당연히 따라 들어갔죠."

"부르지도 않았는데?"

"네."

"네가 왜?"

"내가 장자잖아요."

"알았어. 대충 그렇다 치고. 들어갔는데 왜?"

"못 들어갔어요."

"아니 왜?"

"최동욱이 최고위급 임원회의라고 저보고 빠지래요. 감히 나한테 빠지라고 했다고요! 그것도 다른 임원들 다 보는 자리에서 대놓고."

"조윤경이 가만있었단 말야? 너랑 힘 합쳐서 최동욱 몰아내자고 했었잖아."

"네. 누나가 최동욱 편 들더라구요. 회사 일이니깐 회사 사람 아니면 빠지라고."

"회장님께선?"

"그게 제일 화나요. 회장님께서 괜찮다고 한마디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나가래요. 저보고 나가라고 했다고요."

금방 눈물이라도 떨굴 듯 눈시울이 빨개졌다.

"거기서 내 편 드는 임원 한 명도 없었어요.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멀리서 보기만 해도 90도로 허리 숙이던 사람들이 단 한 명도 한마디도 못하더라니깐요."

"눈치 보느라고 나설 수가 없었겠지."

"그게 아니에요. 나 없는 사이에 최동욱이 완전히 장악한 거예요. 누나마저 그 판에 낀 거구요."

웬만하면 울상 한번 안 짓는 성환이가 절망에 빠진 듯 비통해했다.

회장 보고자리에 참여할 정도면 그만큼 처세에 밝고 사리분별력이 있다는 얘긴데.

그 사람들이 최둥욱에게 붙었다.

그것도 조윤경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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