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관상
부고 소식 이후 빈소가 마련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걸렸다.
해외에서의 사고사라 사건 경위 파악을 위해 실제 운구 송환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회장이 힘쓴 덕분에 전세기를 띄워서 일주일 만에 송환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걸치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의 장례식장.
가장 큰 특실에 그것도 두 개를 이어 붙여서 빈소를 마련했다.
비록 자기 비자금에까지 손댄데다 딸과 이혼한 후로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지만, 자기 외손자의 아버지이니 가는 길 좋게 배웅해주자고 조회장이 특별히 준비시킨 것이다.
악연도 인연인지라 나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원모가 먼저 와서 빈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지 뭐하러 기다렸어?"
"이왕이면 같이 인사드리지 말입니다."
"김이사님은?"
"네. 오늘 약속이 있으시다고 밤늦게 잠깐 따로 들르시겠답니다."
빈소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돌려 주변을 쓰윽 둘러봤다.
그런데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벼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뭐 찾으십니까?"
"뭐 찾겠냐? 화환이지."
"화환이요?"
"그래. 내가 보내라고 시켰잖아. 기억 안 나? 아니 설마 너 그 돈 십만 원 삥땅 친 거 아냐?"
원모가 괜스레 뜨끔했는지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양아칩니까?"
"아니었냐?"
"돈이 없지 가오가 없겠습니까? 그 정돈 아닙니다."
"그럼 우리 화환은 도대체 왜 안 보이는 건데?"
원모가 억울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따라오시죠."
원모가 복도 끄트머리까지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니 복도를 지나 아예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냥 따라오시지 말입니다."
밖으로 나가 코너를 돌더니 화환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요!"
정말 원모가 가리킨 화환에는 천하태평 대표 천태평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알고 보니 화환이 너무 많이 온 바람에 빈소 앞은 물론이고 복도를 지나 바깥에까지 차지한 거였다.
"뭐야? 우리 화환이 왜 맨 끄트머리에 와 있는 거야?"
"대표님께서 직접 보시지 말입니다."
끄트머리부터 시작해서 빈소 앞까지 화환에 걸린 이름들을 확인해나갔다.
정말이지 희한하게도 빈소에 가까워질수록 인지도가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
알만한 사람, 알만한 기업이나 단체에서 보낸 화환들이 빈소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기업 회장이나 장관 정도는 되어야 빈소 바로 앞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래 잘 알겠다."
"우리 더욱 분발하지 말입니다."
"뭐?"
"우리도 성공해서 끄트머리가 아니라 맨 앞에 화환 갖다 놓자고요."
"왜? 화환이 앞에 서 있으면 좋냐?"
"그렇지 않습니까? 뽀대도 나구요."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냐?"
"네?"
"그런 게 뭐가 중하다고? 겉치레 허례허식일 뿐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원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화환 왜 보내신 거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면서."
"음……? 그게말야……."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은 하면서도 행동까지는 이르지 못한 수준이라고 할까.
"인사나 하러 가자."
조문객이 워낙 많아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빈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윤경이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두 번 절을 하고 나서 마주 보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창백한 조윤경의 얼굴에는 남편을 잃은 아픔이 하염없이 묻어났다.
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오래가진 않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사를 건네는데도 대답은커녕 표정마저 심하게 구겨졌다.
마치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왔냐'라고 하는 듯이.
머쓱한 마음에 그냥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장례식장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빈소 옆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육개장 한 그릇은 해야 하니까.
액운을 막고 잡귀를 쫓아낸다는 이유 같은 건 잘 모르겠고 그저 육개장이 맛있어서 장례식장에 올 때는 항상 이렇게 빈속으로 온다.
원모도 마찬가지였는지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했다.
자리에 앉자 도우미분이 한 상을 내주었다.
일회용 접시에 담긴 육개장 한 그릇과 반찬, 안주들.
비록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은 아니었지만 맛깔스럽게 식욕을 당겼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한 숟가락을 뜨니 자극적이고 칼칼한 맛이 침울한 마음을 날려주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집이나 식당에서는 절대 이런 맛이 안 난다.
잠시 후.
입구 쪽에서 성환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댔다.
"식사하십니까?"
"보면 모르냐?"
"왜 이리 까칠하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다른 데랑 똑같냐?"
원모가 괜스레 성환이 역성을 들었다.
"왜, 맛있기만 한데 말입니다."
성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재벌이라고 설마 다른 거라도 먹는지 알았어요?"
"하긴. 집에서도 된장찌개만 먹는데 그럴만하네."
"그건 그렇고 인사는 하셨어요?"
"했지. 조윤경이 받진 않았지만."
"날이 날인만큼 참으시죠."
"아무리 상심이 크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나? 눈길 한번 쳐다보지도 않는데?"
"나한테도 그래요."
"너한테도? 아니 왜?"
"아무래도 원인을 찾고 찾다 보니 결국 우리에게까지 갔겠죠."
"원인이라니? 우리가 사고를 내기를 했냐? 아님 사고 나길 빌기라도 했냐?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 근본 원인이라는 거죠."
"뭐?"
"중국에 가게 된 게 이혼당하고 천하제일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고, 천하제일에서 쫓겨나게 한 건 바로 우리니깐."
"자기들이 회장님 비자금 몰래 빼돌린 건 생각도 안 하고 우리가 까발렸다고 그런 거야?"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벼랑 끝에서 저주를 퍼부을 희생양을 고르기엔 다른 방법이나 대상은 못 찾겠고 가장 손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긴 하다.
잠시 후.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로 와서 성환이에게 물었다.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인상은 찌푸리면서 내 그릇을 가리켰다.
"이거요?"
"네. 육개장 드시겠습니까?"
"아뇨. 다른 분들이나 챙겨주세요."
성환이가 사양하자 음료 한 개만 놔주시고 돌아갔다.
"넌 왜 안 먹는데?"
"난 이런 거 안 좋아해요."
"뭐? 이런 거라고? 자기는 먹지도 않는 걸 손님 대접한다고 내놓는단 말야?"
"내가 안 먹는 거랑 손님한테 내주는 거랑 뭔 상관이래?"
성환이 손을 뻗어 텅 빈 육개장 그릇을 가리켰다.
"좋아하기만 하는구만. 아예 핥아 드셨나 봐요."
"좋아하긴. 배고프니까 그렇지."
"한 그릇 더하시죠. 아주 그냥 곱빼기로 달라고 하죠."
두 그릇째 육개장을 넘기고 있는데 식당 안 조문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기 봐."
"왔다, 왔어."
다들 빈소 쪽을 흘끔거리면서 수군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빈소에 조회장이 와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서서 조윤경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딘가 매우 낯이 익은 듯 보였다.
조회장과 고스톱 치던 날 같이 식사했던 그 관상가 선생이다.
조윤경의 표정을 보아하니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워낙 많은 손님이 들락날락하는 데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 건네기 바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조성환도 누가 왔는지 봤다.
"회장님 오셨네요."
"누구랑 같이 오셨는데?"
"누군데요?"
"지난번에 너희 집에서 봤던 분 있잖아."
"아하. 맞네. 친구 분이라니깐 오셨나 보죠. 뭐."
관상가 선생이 조윤경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 반대편 쪽 식탁에 자리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고개를 내 쪽으로 훽 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관상가 선생 역시 바로 목례로 답했다.
역시 직업 덕분인지 관찰력이 상당히 좋은가보다.
조회장이 빈소 안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다가 관상가 선생 앞에 자리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딴 데 보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기울이자 주변 소리는 작아지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어떻습니까? 우리 윤경이 얼굴이 이제 좀 밝아졌습니까?"
"글쎄요. 아직까진 잘……."
"왜요? 그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껏 발목 잡고 있던 근심거리가 없어졌는데 좀 티가 나지는 않나요?"
아무리 이혼했다곤 해도 한때 사위였는데.
게다가 지금 그 당사자의 빈소에서마저 근심거리, 우환이라고 표현하다니.
원래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사람인지 아니면, 누구든 배신자에 대해서는 단호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하긴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고 배려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저 자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군림할 수 없었을 거다.
어쩌면 저런 매정한 면이 당초 물려받은 조그만 기업을 수십 배의 대규모기업집단으로 키운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네. 말씀하신 대로 확실히 근심은 덜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데요?"
"대신 다른 감정들로 채운 듯 보입니다."
"채우다뇨?"
"분노, 원망, 미움 이런 감정들이죠."
"원망이라고요? 아니 누구한테요?"
"모르죠. 본인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깐요. 다만 원망하는 마음이 온 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뭔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티 안 나게 눈동자만 살짝 돌려서 쳐다봤는데.
마침 관상가 선생이 고개를 살짝 돌려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끔한 마음에 눈동자를 피했다.
조회장이 관상가 선생을 따라 우리 쪽을 쳐다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상가 선생이 말로는 모른다고 하면서도 답을 대신한 건가?
아무리 용한 양반이라고 해도 저분이 우리와 조윤경의 관계나 나의 과거사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는데.
혹시, 지난번 나와 조윤경이 서로를 바라보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저 친구 인상은 어떤가요?"
"저 젊은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번 봐주시죠."
조회장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차마 고개를 돌릴 순 없었다.
그 순간 성환이 입을 뗐다.
"최동욱이 왔네요."
"뭐? 최동욱?"
"네. 아주 기세등등하게 임원들을 떼거리로 거느리고 왔네요."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회장이 방금 관상을 봐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최동욱이었나보다.
마찬가지로 최동욱도 자기 자식이니 궁금했을 거다.
성환이 말대로 최동욱은 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무리들을 이끌고 빈소를 찾았다.
조윤경과 마주하고 인사를 나눴다.
의외로 조윤경은 나에게와는 다르게 대꾸도 하고 고개까지 숙여 감사를 표했다.
몇 분인가 지났을까?
조용하던 관상가 선생이 조회장에게 말을 건넸다.
"안타깝습니다."
"왜요? 관상이 별로 안 좋습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너무나 좋은 관상인데 담은 그릇이 작아서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좋은가요?"
"네. 초승달처럼 수려한 눈썹, 오뚝한 콧날에 위꼬리가 올라간 입술…….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지난번 댁에서 봤었던 저 친구와 마찬가지로 아주 좋은 관상입니다."
내 얘기를 한 거다.
"그릇이 안 좋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초년에 그릇 크기가 정해지는데 초년 운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조회장에게 버림받은 걸 얘기하나 보다.
조회장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뜨끔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군요. 그릇은 다시 커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네. 물론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심상은 들여다볼 수가 없으니깐요."
"……."
"하지만 하나 말씀드리자면 회장님을 꽤 많이 닮았습니다."
"네? 아니 어떻게 그걸?"
자기 자식인지 어떻게 알았냐는 거다.
"허허."
관상가 선생은 대답 없이 그저 가벼운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