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죽음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할까 봐 자리를 피해 전화하려고 내려온 모양이다.
조윤경은 기둥 뒤에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 자기야 왜 또 그래?"
"……."
"회사 들어가서 자리 잡겠다면서 왜 또 갑자기 개인적으로 투자한다고 해? 지난번 벤처캐피털 접은 후로는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잖아."
"……."
"자기 너무 귀가 얇다니깐. 하여간 더 이상은 안 돼. 더군다나 아빠가 우리 사이 눈치챈 거 같단 말야."
통화 상대방은 전남편 안치홍이다.
비자금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혼했지만 역시 아직까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그 정도 융통할 자금이 없어. 몇 달 전에도 자기가 다 가져갔잖아."
"……."
"아빠가 나한테 더 이상 자금 안 맡긴단 말야. 게다가 최동욱 그놈이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방법이 없어. 이번 옥션에서도 딸랑 그림 한 점밖에 못 샀단 말야."
"……."
"그래……. 알았어. 알아는 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
"그리고 자기야, 제발 사람들 너무 믿지 마. 솔직히 대부분 우리 집안 보고 자기한테 접근한다는 거 알 거 아냐."
역시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안치홍은 여기저기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혹해서 투자 명목으로 돈을 쏟아붓고 있는 거다.
조윤경에게 손 벌리면서까지.
지난번 관상가와 조회장이 나눈 얘기가 떠올랐다.
조윤경에게 빌붙어서 뽑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해서 조윤경의 인상이 안 좋아졌다는 얘기들.
역시 용한 사람이다.
지금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알았어. 자기야. 특히 몸조심해."
"……."
"아니. 별건 아니고 꿈자리가 안 좋아서 말야…….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 성환이 기둥 밖으로 몸을 내보였다.
"어머나."
인기척에 깜짝 놀란 조윤경이 뒷걸음질 쳤다.
성환이 비아냥대듯 말했다.
"뭐야? 죄졌어? 왜 이렇게 놀라고 그래?"
"죄졌다니?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아직도 그놈이랑 만나고 있잖아. 회장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을 텐데."
"뭐라고 이게 어디서 매형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매형은 개뿔. 우리 집안에 빌붙어서 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주제에. 아직까지도 떼놓지 못한 거야?"
남매사이라곤 상상도 못 할 살벌한 말들이 오고 갔다.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조윤경이 눈을 까뒤집을 듯 크게 뜨고는 삿대질을 했다.
"뭐라고? 내가 연락을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동생인데 왜 상관이 없어?"
어이가 없었는지 조윤경이 희미하게 썩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뭐라고? 동생이라고……?"
뒷말을 얼버무리긴 했지만 대충 느낌이 왔다.
'넌 우리 엄마 아들이 아니잖아'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조성환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순간, 성환이 역시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조윤경이 방금 성환이의 표정을 봤으면 '얘가 알고 있었구나' 생각했을 텐데 그 찰나를 캐치하지 못했다.
성환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회장님께서 하신 얘기 못 들었어? 알아서 정리하라고 했잖아.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왜 상관이 없어? 우리 집안에 손해면 곧 나한테 손해라는 얘긴데?"
집안 재산이 곧 자기 재산이라는 말.
자기가 집안의 장자이자 계승자라고 선언한 거다.
조윤경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흥분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어댔다.
"뭐, 뭐라고? 네까짓 게 감히 어디서……."
에헴!
그 순간 어디선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뿐사뿐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
조회장이다.
남매를 발견하고는 무섭게 노려봤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싸우기라도 하는 거니?"
남매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빠."
"싸우긴요. 오해십니다. 회장님."
남매간의 피 터지는 말싸움을 구경하느라고 미처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조회장이 오는 줄도 몰랐다.
조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다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통 구분이 가질 않았다.
잠시 후 조회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싸운 게 아니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그게 말이죠……."
성환이 고자질하려는지 알고 조윤경이 막아 세웠다.
"별거 아니에요. 아빠. 성환이가 여기 작품들이 다 자기 거라고 해서 한마디 했어요."
"아니 내가 언제?"
"네가 방금 전에……."
남매의 말싸움을 듣기 싫은 듯 조회장이 막아 세웠다.
이미 노기가 치솟은 조회장의 입에서는 또다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만들 하지 못해?"
조회장의 호통에 남매는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분명히 알아두어라. 여기 작품들은 모두 내 거다."
"……."
"내가 너희들에게 물려주던 다른 누군가에게 주든, 아니면 박물관에 싹 다 기부하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지 너희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남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힌 조회장은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는지 날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 천대표 아닌가? 여긴 어쩐 일이신가?"
"네. 제 그림 한 점을 성환이가 여기에다 보관해준다고 해서요."
"아, 그런가? 어떤 그림이지?"
손을 뻗어 기둥 뒤를 가리켰다.
"저 그림입니다."
조회장이 그림 앞에 서서 한참을 뚫어지게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이철구 씨 작품이구만."
"네? 이철구요?"
"그래. 아주 훌륭한 분이시지. 이분 작품은 이렇게 섬세한 붓 터치가 특징이라네."
그림 속 인장의 작가 이름을 잘못 읽고 아는 척한 거다.
하긴 '기'자를 '구'자로 충분히 오해할 만하게 날려 쓰긴 했다.
예술 감수성이 뛰어난 게 아니라 그냥 수집가라는 성환이 말이 맞는 듯.
굳이 지적할 필요까진 없어서 대충 맞장구 쳐줬다.
"네. 맞습니다. 회장님께선 듣던 대로 예술에 참 조예가 깊으십니다."
"조예라니. 그냥 많이 감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 거지. 이 작품은 어디서 구했나?"
"네. 이번 강남옥션에서 낙찰받았습니다."
조회장이 조윤경을 돌아봤다.
"이번에 너도 낙찰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네. 저기 걸어놨어요."
조윤경이 오른손을 뻗어 그림 한 점을 가리켰다.
며칠 전 경매 때 10억 가까운 금액으로 낙찰받은 바로 그 작품이었다.
그림을 보고 매우 놀란 척.
"아니, 이 그림은? 음……. 조전무님이 낙찰받으셨군요."
조회장이 두 작품을 번갈아 쳐다봤다.
"두 작품의 화풍이 꽤나 비슷하군."
같이 놓고 비교해보니 정말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내 작품의 작가는 사후에 점점 더 명성을 얻을 것이고 조윤경 작품의 작가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금액도 비슷하겠구만?"
내가 놀리기라도 하듯 조윤경 쪽을 흘겨보며 답했다.
"아닙니다. 제 작품은 경합이 없어서 최저가 비슷한 금액으로 낙찰받았습니다. 조전무 그림은 경합이 제법 붙어서 아주 비싼 값에 낙찰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윤경이 놀란 듯 물었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는 건데.
하긴 전화 응찰했으니 누구랑 경합했는지 몰랐었겠지.
"우리랑 붙었던 게 조전무님이셨군요. 저도 방금 그림 보고 알았어요. 어쩐지 말도 안 되게 응찰가를 계속 높이더라더니……. 미리 알려주셨으면 안 따라붙고 그냥 포기했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저희 때문에 괜히 다섯 배도 넘게 주고 사신 거 같아서 미안하네요."
제대로 후벼팠는지 표정이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뭐라고?"
어깨를 으쓱대며 한마디 덧붙였다.
"덕분에 제 작품 싸게 낙찰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이거 낙찰받아서 정작 제 작품에 응찰도 못 할 뻔했거든요."
조윤경은 조회장 앞이라 차마 욕을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조회장 역시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조크루지란 별명에 걸맞게 자식들이 어디 가서 손해 보고 다니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인가보다.
"그만들 하지. 아무튼 천대표도 자주 감상하러 오시게나. 여기 좋은 작품들 많으니깐."
"정말 많은데요? 박물관을 옮겨놓은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구입한 것도 있는데 사실 반 이상은 물려받은 거네. 부모님께서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문화 정신을 뺏기면 안 된다고, 이것들 지키신다고 무진 애를 쓰셨지."
정말이라면 진정한 애국자란 얘긴데.
이상하게도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 * *
며칠 후.
그림을 맡긴 이후부터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있게 되면서 다크서클은 모두 사라졌고 매일 편안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성환이를 불렀다.
"어이. 내 그림 잘 보관하고 있지? 내가 확인 안 해봐도 되지?"
"왜요? 도둑이라도 들까 봐? 국립미술관은 털려도 우리 집은 안 털린다니깐."
"확실해? 믿어도 되지?"
"믿으라니깐 그러네요. 그건 그렇고 이제 잠 좀 자나 봅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침대 밑에 현금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미련한 짓이지. 통장에 넣으면 이렇게 편한데."
"통장? 우리 집 벙커가 통장이라고요?"
"통장이지. 언제든지 맡기거나 뺄 수 있는데."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찼다.
"허, 뭐래?"
그 순간 성환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회장님."
조회장 전화다.
"……."
"네? ……뭐라고요?"
수화기를 들고 있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성환이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
"네.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내 쪽으로 돌아봤다.
"저……. 저기요. 대표님."
"왜 이리 심각해? 무슨 일인데 그래?"
"죽었답니다."
"잉? 죽다니 누가?"
"안치홍이요. 옛날 매형……."
안치홍이 죽었다고?
회귀 전 생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아니, 왜 갑자기? 지난번 상해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었잖아."
"병 아니에요. 교통사고랍니다."
"교통사고라고? 중국에서?"
"네.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일단 회장님께서 안가로 들어오라고 하시니깐 먼저 가볼게요."
"그래, 얼른 가 봐."
성환이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아무리 자기를 궁지에 몰고 원망하는 마음이 컸었다곤 해도 함께 지낸 오랜 세월이 있다 보니 미운 감정과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을 거다.
죽음 앞에서는 한층 관대해지고 연민을 느끼는 게 우리들 내면의 정서이자 관습이다.
다음 날 아침.
성환이에게 전화가 왔다.
"전데요."
"그래! 교통사고가 맞아?"
"네. 과속 운전하던 트럭에 받혔나 봐요. 졸음운전이죠, 뭐."
"범인은 잡았고?"
"도주한 건 아니고 현장에서 바로 신고하고 조사까지 받았나 보더라구요. 그냥 평범한 트럭운전수래요."
"그랬구나. 삼가 조의를 표한다."
"나한테 뭘요."
"그래. 그런데 조윤경은 괜찮아?"
내 입에서 조윤경의 안부를 묻게 되다니.
아무리 증오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의 악행이 미운 거지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악인 건 아니므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일 거다.
"모르겠어요.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를 않으니깐.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좀 이상해진 거 같데요."
"이상하다고?"
"단순 교통사고라고 판정이 났는데도 인정하질 않나 봐요. 뭔가 석연치 않은 죽음이라고 계속해서 의심하는 거죠."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원래 생각지도 않은 불행 앞에서는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기 마련이니깐."
"그런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안치홍이 누나한테 누군가 따라붙는 거 같다고 했나 봐요."
"뭐라고? 에이 설마……."
"아무튼 누나는 그런 얘기를 들은 게 있으니깐 아무 말도 안 믿나 봐요."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