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마음의 짐
흐뭇한 마음으로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걸어놓은 그림을 쳐다봤다.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지나자 처음에 설렜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수수료와 배송비 이것저것 합쳐서 1억5천만 원에 육박하는 초고가 그림.
본전 생각에 출근 전에도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도 우두커니 그림 앞에 서서 뚫어지게 감상했다.
하지만 역시 가슴 속에선 떨림 같은 야릇한 감정은 일어나질 않았다.
좀 더 비싼 액자로 맞춰봤자 별다른 변화는 없었을 거다.
우리 집에 손님이라곤 바닥에 흘린 라면 부스러기 노리는 바퀴벌레뿐이 없다.
결국은 큰돈 들여서 바퀴벌레 좋은 구경만 시켜주는 꼴이 됐다.
그러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열흘 이상 시도 때도 없이 쳐다보니 뭔가가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무질서함 속에서도 나름 질서를 갖춘 듯한 무늬와 모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흡사 사람의 마음과도 같은지.
혼돈 속에서도 뭔가 절대적인 섭리 같은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작가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야릇한 감정 같은 게 살포시 마음속을 휘저었다.
그런 느낌이 들으니 일단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껏 속해온 사회적 계층이 한 번에 몇 단계를 껑충 뛰어오른 것 같다고 할까.
허영인지 자기만족인지 구분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신선하다.
이 맛에 예술품을 모으는 것일 거다.
오롯이 나만 소유하고 느낄 수 있다는 배타적인 권리감이나 우월감 같은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점 역시 존재했다.
그림을 들여온 날부터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오기 시작했다.
우선 싸구려 오피스텔이라 습도는 물론이고 온도 조절도 제대로 안 되니 행여나 그림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도둑놈이 들어와서 들고 가버리는 건 아닐까?
액자로 둘러쌌는데도 설마 라면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근심은 날이 지나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구려 오피스텔에 내 돈 들여서 보안시스템을 설치할 수도 없고 보안 빵빵한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다.
그 돈 있으면 차라리 수십, 수백 배 폭등할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말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곳에 피 같은 돈을 쓸 순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아무래도 이러다 제명까진 못살 듯.
괜히 그림 하나 잘못 들여놨다가 몇 년 뒤에 아무리 수십억까지 오른다고 해도 그 돈 한번 써보기도 전에 스트레스받아서 세상을 뜰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뒤척이며 밤을 지새고는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원모가 음흉한 웃음기를 띄고는 물었다.
"대표님 요즘 매우 수상합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거 같은데요? 그리고 다크서클은 아주 얼굴을 다 덮어버렸고요."
매를 부르는 멘트와 말투.
주먹이 나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꺼져. 아침부터 네 얼굴 봐서 그런 거니깐 신경 끄시지."
"에이. 농담하지 마시고요. 대표님 꼭 저 신혼 때 같은데요? 곧 좋은 소식 있으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 내가 미쳤다고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겠냐?"
"에이 실수라뇨?"
"실수 맞거든? 지금쯤이면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갑자기 원모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대답을 대신한 거다.
"너무 낙담하진 마라."
"네. 대표님. 그래도 꼭 결혼까진 아니더라도 연애는 할 수 있으시잖습니까?"
"그렇지. 결혼 안 하고 연애만 하는 건 괜찮지."
물론 여성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다.
결혼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걸 받아들이는 쿨한 관계.
하지만 아직은 내가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회귀한 후로 한해 한해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 안에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조급함을 가져왔기 때문일 거다.
"여자 문제가 아니면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불안해서 말야."
"불안하다뇨? 집에 금두꺼비라도 있으신 겁니까?"
예리한 놈.
이 상황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을까?
"비슷해.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거든요. 예……."
"뭐? 너도 예술품 산 거야?"
"예술품이요? 아뇨. 예물 말한 건데. 신혼 때 어찌나 불안한지 도저히 회사를 갈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럼 그렇지.
설마하니 원모가 예술품을 살 리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근심을 없앴지 말입니다."
"없앴다고? 어떻게?"
"팔았죠. 전부 팔아서 통장에 넣으니깐 안심이 되더라구요."
우문에 현답이다.
단, 내 경우는 가격이 오를 게 뻔하니 상황이 다르지만.
"팔 거면 애초에 뭐하러 샀냐?"
"결혼할 때 해야 하니깐요."
"해야 하는 게 어딨어? 안 하면 그만이지. 하여간……."
"에이. 그래도 어떻게 예물을 안 하고 결혼을 합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놈의 허례허식은 언제나 없어질는지.
부동산이나 예물 같은 게 결혼을 잘하고 못하고의 척도가 돼 버린 마당에 차라리 결혼을 안 하면 안 했지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이런 식의 결혼문화가 없어지지 않을 거다.
성환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항상 귀는 쫑긋 세워놓고 있다는 증거다.
"그림 얘기하는 거예요?"
"맞아. 괜히 신경 쓰이네. 왜, 너도 그 그림 사서 잠이 안 오냐?"
성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정색했다.
"내가 왜요? 수십억짜리도 아니고 그까짓 일억짜리 그림 한 장 가지고."
"뭐라고? 그까짓?"
"그럼 아닌가? 누가 보면 아주 이중섭 그림이라도 산 줄……."
"이중섭보다 뛰어난 작가가 될 수도 있거든?"
"네네. 그림 볼 줄 아시는 분이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분이 감당도 못 할 걸, 뭐 하러 사 가지고 맘고생을 하지?"
"그러게 말이다. 방법이 없잖아."
"우리 집에 갖다 놓으세요."
"뭐? 너희 집에? 왜?"
"본가 지하 안 가보셨나? 벙커 하나 있는데 방음, 방풍, 방습 다돼서 보관하기 딱이에요. 회장님 작품도 많이 보관 중이거든요."
"벙커? 집에 벙커가 있다고?"
"당근이죠. 전쟁 나면 어떡하라고? 그냥 죽으라고요?"
"전쟁 대피용이야?"
"네.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뉴스나 방송에서만 접해본 지하 벙커.
청와대도 아니고 그냥 가정집에 있다니.
역시 재벌은 스케일이 다르다.
"대표님 거도 갖다 놓으세요. 보관해 줄 테니깐."
하마터면 고맙다고 대답할 뻔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인데.
들어올 땐 마음대로라곤 해도 나갈 땐 그게 아닌 게 세상 이치다.
보관료 내놓고 가지 않으면 못 가져간다고 하면 방법이 없을 거다.
"미쳤나? 그게 얼마짜린데.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뭐야? 예술을 감상이 아니라 투자로 보는 겁니까?"
"감상도 되고 투자도 되는 거지. 실컷 감상하다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다시 저렴한 거 사서 감상하면 되잖아. 오르면 또 팔고 다시 싼 거 사고."
성환이 어이가 없었는지 탄식을 뱉었다.
"하아. 네."
"세상 모든 거에는 그렇게 회전율이 중요한 거야."
"뭐야? 예술이 돈이에요?"
"예술만이겠어? 이 세상 모든 게 돈이지."
맞는 말이라서 대꾸를 못 하겠는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는지 성환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관료는 없는 거다. 내가 달라고 할 때 바로 주는 거고. 그것만 보장해준다면 보관하게 해줄게."
"어째 입장이 바뀐 거 같은데요? 부탁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데."
뒤돌아서려는 걸 붙잡았다.
발 뻗고 잠잘 수 있다는데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다.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알았어. 보관해줘."
"네? 못 들었어요."
분명히 들어놓고도 꼬장 부린 거다.
뭐 자존심이야 잠깐 굽힐 수 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내 그림 좀 보관해줄래요? 조성환님!"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 * *
"집 좋은데요?"
퇴근 후 내 오피스텔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성환이 내뱉은 말이다.
사회생활을 조금 하다 보니 이제는 맘에 없는 말도 할 줄 알게 됐다.
하지만 표정은 말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예의상 건넨 말에는 표정이 따라와야 하는 법이야."
"그렇죠? 아직까진 잘 안 되네. 이런 데서 사세요?"
"응. 이혼하고 쭉 살고 있지 아마."
성환이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금방이라도 눈물 떨굴 듯 보이는 게 기분이 몹시 나빴다.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좁아터진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태오집보다 작다고 놀리는 거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어떻게 알았지라고 하는 듯했다.
"집에서 식사는 하세요?"
"밥은 잘 먹지. 나가서 먹어봐야 재료도 좋은 거 안 쓰고 몸에 좋지도 않은데 웬만하면 집에서 먹어야지."
"밥해 먹는 집이 아닌데?"
성환이 손을 뻗어 주방 쪽을 가리켰다.
싱크대엔 프라이팬이나 접시 같은 건 하나도 없이 반쯤 열린 찬장엔 라면만 가득했다.
"해 먹으려고 노력은 한다. 약속이 너무 많아서 힘들 뿐이지."
"약속은 개뿔. 만날 저녁 먹고 가자고 꼬드기면서."
"닥쳐. 그림이나 옮기자고."
"네. 잠깐만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올라오시면 됩니다……. 네네."
"뭐야? 누가 온다는 거야?"
"누구긴요. 사람 불렀지."
"그림 옮기는데 사람을 불렀다고?"
"네. 안 그럼 어떻게 가게요? 꾸불꾸불한 산길에 온통 방지턱인데 그림 다 상하라고?"
잠시 후.
배송업체 직원 한 명이 집에 올라와서 정성스럽게 그림을 포장했다.
지하 주차장에 따라 내려가니 1톤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일반 트럭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트럭까지 준비했냐? 그냥 네 차 타고 가면 되잖아."
"저거 무진동 차량이거든요? 우리 집에 작품 들어갈 땐 항상 저런 차들 불러요. 이번엔 한점뿐이니깐 제일 작은 거 불렀고."
겨우 서울 시내 십 킬로도 안 되는 거리를 옮기는데 특수차량까지 준비하다니.
덜컥 돈 걱정이 앞섰다.
"설마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나보고 내라는 건 아니겠지?"
"네. 내가 저 그림 감상하는 셈 치죠 뭐."
난 그림을 돈으로 보고 이놈은 예술로 보니 나는 공짜로 맡기는 셈이고 이놈은 공짜로 감상하는 셈이다.
나름 합리적인 거래다.
성환이 집까지 올라가는 길을 정말이지 험했다.
지난번까진 아무 생각 없었지만, 이번엔 귀한 걸 옮긴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만 과속방지턱을 하나 넘는 게 마치 높은 장애물을 넘는 것처럼 차가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앞에 가는 트럭 역시 방지턱을 그냥 턱하고 넘었다.
말만 무진동이지 아무리 봐도 똑같은 트럭 같았다.
"저 앞차 뭐야? 난 왜 저 차가 하나도 조심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
"다 알아서 잘하니깐 걱정하지 말라니깐요. 청자도 아니고 딸랑 그림 하난데."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드디어 성북동 안가에 도착했다.
태오가 가장 먼저 반겼다.
세 번째 보다 보니 이제 막 날 보고 꼬리까지 흔든다.
내 손을 핥아가며 킁킁거렸다.
이놈 예전에 고스톱 치러 왔을 때 내가 한과 들고 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거다.
안채에 들어서 거실 뒤쪽으로 돌아가니 계단이 보였다.
"뭐야? 벙커라며 그냥 계단이잖아."
"평소엔 열어놓죠. 그냥 따라가시죠."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공기, 적당히 무거운 느낌이 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시 후 펼쳐진 광경.
내가 가정집 지하실을 온 건지 박물관 지하 보관소에 온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도자기나 조각은 물론이고 오래된 악기까지 온갖 신기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저기 걸어주시죠."
성환이가 손을 뻗은 곳은 기둥 뒤 구석탱이였다.
배송해주시는 분이 익숙한 듯 내 그림을 걸어두고는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왜 내 그림이 구석탱이에 찌그러져야 하는지 이해가 갔다.
고려청자나 산수화 등 교과서에서나 봤음직한 작품들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예술에 조예가 깊으신가 보구나."
"나도 그런지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그냥 대표님하고 똑같아요. 돈 될까 봐 수집하는 거죠, 뭐."
역시 소유욕이 대단한 사람이다.
입이 딱 벌어져 넋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누군가 전화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날이 서 있는 앙칼진 목소리.
조윤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