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55화 (155/191)

155화 경매

프리뷰 전시관.

학교 다닐 때 과제 때문에 혹은 해외여행 갔을 때 막연한 의무감으로 들렀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술전시관이란 곳을 처음 와봤다.

경매 참여는 정회원만 가능하더라도 프리뷰 행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전시관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미술작품을 관람하거나 경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냥 빠르게 둘러보는 사람부터 무언가를 열심히 노트에 적는 사람, 진행요원에게 액자에서 그림을 꺼내서 보여달라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내가 점 찍었던 이철기 작가의 작품을 찾았다.

작품 앞에 서서 한참을 응시하고 있었는데도 마음속 깊은 곳의 떨림은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화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걸 그렸을까?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따위 그림을 사는 걸까?

왜 이 그림의 가격이 계속 올라간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납득되질 않았다.

성환이도 눈치챘는지 한마디 했다.

"뭐야? 아까는 뭐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지, 눈물이 난다느니 뭐니 하더만? 책자에서 보던 거랑 달라요? 실제로 보니깐 별론가요?"

"아니야. 충분히 감동했어."

"아니거든요? 감동한 표정이 아니야. 왜, 후회됩니까? 그럴 거면 그냥 제가 살 겁니다."

"아니야. 이건 내 거야. 우리끼리 경쟁하지 말자. 가격만 높아지니깐."

"그러던지요."

그림 앞에 계속 서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예술혼을 깨우고 있던 와중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내딛는 구두 소리가 칼날이라도 된 것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져 귓가를 때렸다.

저건 안 봐도 조윤경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있었던 예술혼이 아니라 증오심이 튀어나왔다.

성환이 팔을 붙잡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아니, 갑자기 왜요?"

"따라와. 조윤경이야."

"네? 어디?"

뒤를 돌아보려는 걸 가까스로 막아 세우고는 가벽 반대편 쪽으로 끌고 갔다.

다행히 조윤경이 우리를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왜 피해요? 우리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굳이 얼굴 붉혀서 좋을 건 없잖아. 그런데 조윤경도 이런 데 다니냐?"

"누나도 정회원이니깐 당연히 도록 받았겠죠. 그래도 오늘 올 줄은 몰랐는데. 우리 그냥 딴 데로 가죠, 뭐."

"잠깐만. 조금만 들어보고."

"네? 들어서 뭐 하게?"

"혹시 모르잖아. 너의 출생의 비밀을 나불거릴지?"

"뭐야. 그 얘길 지금 왜 꺼내지?"

"농담이야."

역시나 조윤경 일행이 우리가 보고 있었던 이철기 그림을 찾아왔다.

친구랑 둘이 온 듯.

"네가 말한 게 이 그림이야?"

"음. 요즘 이런 스타일이 뜬다던데?"

"정말? 음……. 있어 보이긴 하네."

"그렇지? 너한테 딱일 거 같다."

에이. 재수 없게 하필이면 조윤경이 이 작품에 꽂혔다.

경합이라도 붙으면 값만 올라갈 텐데.

내 이익금이 줄어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번 경매에 이 작가 작품이 두 개 나왔어. 시초가가 1억 정도 되는 거 같아."

"그래? 싸네. 두 개 다 사지 뭐."

"뭐? 두 개 다 산다고?"

"그래. 이번 컬렉션 때 예산 10억 생각하고 있으니깐 5배 뛴다고 해도 둘 다 살 수 있겠는데?"

"역시 우리 윤경이…… 능력 있어. 정말 대단한데?"

부모 잘 만난 게 마치 본인의 능력, 스펙이라도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주위엔 항상 이런 사람들이 꼬이는 법이다.

한없이 치켜세우고 박수해주는 아첨꾼들.

본심이라기보단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면서 맞춰주는 것뿐인데, 막상 본인들은 그걸 잘 모른다.

그나저나 한 작품에 무려 5억까지도 베팅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따위 그림에 5억을 넘게 쓰고 낙찰받는 건 무리다.

물론 그보다는 많이 오르겠지만 아무래도 암호화폐보단 수익률이 낮을 테니.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환이 쪽으로 윙크를 한번 날렸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맞은편 조윤경이 들리게끔 큰 목소리로 성환이를 불렀다.

"성환아!"

성환이는 영문도 모른 채 눈을 크게 뜨고는 쳐다봤다.

"네? 왜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닥치고 그냥 호응이나 해라! 좀!!'

웬일인지 알아들은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우리 앞에 있는 작품은 내가 점찍어 놓은 이철기의 작품과 스타일은 비슷했지만, 시초가는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의 작가.

최소한 회귀할 때까지는 그렇게까지 빵하고 뜰 위대한 작가가 되지는 않을 거다.

역시나 주위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성환아. 이게 지난번에 명동 김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작가분 작품이야."

성환이 화들짝 놀란 듯 두 손을 치켜들었다.

"네? 정말요? 김선생님이요?"

말만 해도 되는데 표정 연기까지 제대로인 게.

연기 제법 늘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하면서도 여러 사람 들으란 듯이 역시나 크게 말했다.

"야, 천하제일 2세가 이 정도 안목도 없어?"

주위에서 안 보는 척하면서도 귀를 열고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조윤경도 분명히 들었을 거다.

게다가 명동의 김선생이란 이름도 들었으니 조윤경도 알 거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걸.

쐐기를 박아야 한다.

"김선생님께서 지난번에 이분 거 나오는 대로 무조건 주워 담으라고 하셨잖아."

"네 정말요? 그분께서요?"

다급한 척 검지를 세워 입에 갖다 댔다.

"아…… 쫌! 조용히 좀 해. 누가 들을라."

상황극 끝.

주위 사람들 대충 다 들었을 거다.

우리가 황급히 옆 전시관 쪽으로 빠져나오자 역시나 안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한 작가의 그림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거다.

같이 온 친구가 조윤경을 불렀다.

"윤경아! 방금 너 동생 아냐? 목소리 큰 사람하고 얘기하던 사람."

"그럴걸? 걔도 정회원이니깐 초대장 받았겠지.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와가지고."

"아까 얘기하는 거 들었어? 진짤까? 완전 그럴싸하던데?"

"그냥 하는 소리겠지. 저놈들이 뭘 안다고."

말은 비록 그렇게 했지만, 말투를 들었을 땐 경멸보다는 의구심에 더 가까운 듯이 들렸다.

반쯤은 넘어온 듯.

전시관을 아예 빠져나오면서 성환이에게 말했다.

"네가 집에 가서 해야 할 게 있어."

"네? 뭔데요?"

"혹시 며칠 내로 회장님하고 조윤경하고 식사할 일이 있으면 그때 명동 김선생님 얘기 꼭 꺼내 봐. 얼마 전에 만났었다고 하고 용돈도 두둑이 받았다고 말씀드려."

"누나 들으라고요?"

"그렇지. 우리 작품 못 사게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누나가 넘어갈까요?"

"회장님께 김선생님이 아주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거 같은데 맞냐고 물어봐 봐."

"모르시지 않을까요?"

"몰라도 상관없어. 답이 뻔하잖아. 그러시겠지 아니겠어?"

"음……. 네."

조윤경이 넘어갈 거다.

우리가 떠벌려놓은 이 작품에 이번 예산을 다 쓰게 돼서 우리가 찍은 작품은 못 사게 될 거다.

* * *

한 주가 지났다.

드디어 경매 입찰 당일.

프리뷰 때 해당 작품에 응찰 등록을 하고 자리 예약까지 마쳐놓은 덕에 입장하자마자 지정된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메이저 경매답게 규모 면에서나 참석 인원에서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하나같이 검은색 정장에 어두운 낯빛들.

흡사 장례식장처럼 웃음기 하나 없이 꽤 경직된 표정들,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성환이는 경험이 많아서인지 비교적 편안해 보였다.

주위를 대충 둘러봤는데 조윤경은 보이지 않았다.

안 오면 오히려 다행이다.

경매장 앞쪽으로는 경매사와 보조직원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옆으로 전화기를 놓은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있었다.

"저기 경매사 옆쪽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누구야?"

"전화 응찰하는 거예요."

"전화 응찰이라고?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네. 신원 노출하는 게 싫거나 현장에서의 분위기에 쓸리기도 싫고 시선 받기 부담스러운 사람들 있을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전화로 응찰하는 거예요. 프리뷰 때 우리처럼 미리 응찰 등록 해 놓은 사람들이죠."

"그럼 혹시 조윤경도?"

"그렇죠. 누나도 전화로 하고 있겠죠. 어쩌면 회장님도 하고 계실지 몰라요."

"그런데 조윤경 있을 때 김선생님 얘기는 꺼냈지?"

"당근이죠."

"조윤경 표정 보니깐 어떤 거 같아? 넘어간 거 같아?"

"관심 없는 척하면서 집중하더라고요. 완전히 넘어온 거 같은데요."

"그래? 됐어, 그럼."

다행히 우리가 프리뷰 때 작업해 놓은 작품이 이철기 작가의 작품보다도 빨리 입찰이 진행되었다.

수백 개의 작품.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천천히 쫄깃쫄깃 쪼는 맛 하나 없이 후다닥 지나갔다.

별 경합이 없는 작품들은 채 삼십 초도 안 돼서 낙찰되는 것 같았다.

물론 개중에 아예 응찰하지 않는 작품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떠벌렸던 그 작품은 역시나 재벌 2세가 찜했다는 소문이라도 돌았는지 시작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첫 호가부터 치열한 경합이 붙어 2분도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2억 원에서 출발해서 응찰가가 9억 원에 다가가자 조성환과 전화 응찰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따라붙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 응찰자는 물론 조윤경일 것이다.

쉴 새 없이 호가를 부르며 숨 가쁘게 진행하던 경매사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자 이번엔 9억입니다."

장내에는 조용하다 못해 숙연한 분위기까지 감도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높은 금액이라 성환이가 주저주저했다.

재빨리 볼펜으로 옆구리를 쿡 찌르자 마지못한 듯 똥 씹은 표정으로 패들을 들어 올렸다.

"에이 쫌. 이러다 이거 낙찰되면 어떡하려고요?"

"걱정하지 마. 조윤경이 따라붙을 거니깐."

"안 붙으면요?"

"붙는다니깐. 기다려 봐."

조윤경이 이 작품으로 예산을 채워야지만 내 작품에 덤벼들지 않을 거다.

다행히 몇 번 더 따라붙고 호가는 더욱 높아졌다.

호가가 9억 원을 훌쩍 뛰어넘자 모두들 성환이를 쳐다봤다.

성환이가 패들을 들지 않자 응찰자들의 시선은 전화 응찰자와 소통하던 직원에게 쏠렸다.

짧은 정적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9억 8천만 원을 받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9억 8천만 원입니다. 더 이상 안 계신가요? 세 번 호가하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탕탕탕!

경매사가 경매봉을 세 번 두드리자 장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화 응찰자가 낙찰받은 것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그림 한 장을 9억 8천만 원이란 거금으로.

경매사는 바로 다음 작품으로 진행을 넘겼다.

불과 5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치열한 경합이 모두 끝났다.

"뭐야? 끝이야?"

"네. 300개가 넘게 나왔는데 후딱후딱 가야죠."

어쨌든 다행이다.

예술에 값을 논할 수가 있겠냐만은 어쨌든 미술품에 정해진 가격은 없는 듯했다.

감정가가 있긴 해도 결국 현장에서 '부르는 게 값'이 된다.

게다가 가격은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치솟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응찰자끼리 경쟁이 붙지 않으면 별 반응이 없다.

반대로 별 기대도 안 하던 작품이 이상하게 응찰이 따라붙으면서 분위기를 타고 고공 행진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찍었던 이철기의 작품은 다행히 전화 응찰자와의 경합이 없었다.

조윤경이 예산 10억 원을 채우는 바람에 따라붙지 못한 것이다.

탕탕탕!

경쾌한 경매봉 소리.

몇 번의 경합 없이 1억 2천만 원의 금액으로 결국 내가 낙찰받았다.

푸하하……!

이철기의 작품이 나에게 왔다.

성환이 역시 이철기의 두 번째 작품을 비교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낙찰받은 기쁨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경매가 모두 끝나고 경매사 직원이 내민 계약서에는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수수료가 18%라니. 이거 순 도둑놈 아냐?"

이런 일이 다반사인 듯 직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려줬다.

성환이 제지하듯 나섰다.

"경매회사도 남는 게 있어야죠. 프리뷰도 준비하고 도록도 만들고 경매까지 진행시켜 주는데. 낙찰가가 높을수록 수수료도 높으니 높은 금액으로 낙찰받도록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성환이 말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그래. 맞다. 플랫폼이 돈을 버는 거지."

"그렇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주는데 마땅한 대가가 있어야죠."

어차피 수십 배가 뛸 건데 18%가 별거냐?

그냥 수고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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