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미술
몇 달 후.
천하태평의 모든 주주들이 원모의 컴퓨터 앞에 모여 있었다.
오늘은 잠시 외근 나온 건환이도 함께 했다.
모두의 기대에 찬 시선은 줄곧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사실 나를 제외하곤 다들 기대라기보단 불안감에 더 가까웠을 테지만.
화면 속 번쩍거리는 표시가 뜨자 원모가 외쳤다.
"됐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나 혼자서.
YK 지분 정영태교수에게 매각한 120억 원과 수호개발로부터 1차로 회수한 100억 원(원금은 50억 원)에서 중국 유안 신주인수 투자로 날린 30억 원과 법인세 예상 금액을 제외한 총 가용자금 150억 원에서 무려 100억 원을 쏟아부었다.
드디어 암호화폐에의 역사적인 첫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저가인데다 대중들의 관심 밖에 있어 거래량도 적기 때문에 며칠에 걸쳐서 겨우 사들일 수 있었다.
"수고했어. 원모야!"
내가 박수하며 호응을 유도했지만 다들 성환이의 눈치를 살폈다.
성환이를 노려보자 마지못한 듯 웃으며 호응했다.
모두 역시 못마땅하면서도 성환이를 따라 박수했다.
눈치 빠른 김철수이사가 한마디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건데 잘 되길 빌자고. 자자, 파이팅합시다!"
차마 호응은 못 하겠는지 건환이가 입을 뗐다.
"전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오후에 경영진 회의가 있어서요."
"그래 들어가 봐. 바쁘신 분인데. 최동욱 뭐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알려주고."
"요즘은 잘 못 본다니깐요. 워낙 높으신 분이라서요."
"알았어. 그래도 이상한 거 있으면 연락 줘."
"네. 알겠습니다."
건환이가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어서 원모도 한마디 했다.
"전 정말 잘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솔직한 놈.
"야 이놈아. 천하태평에 딸랑 천만 원 투자해놓고 배당을 2억5천이나 받아 간 놈이 그게 할 소리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말입니다."
"이익금에서 재투자한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해질 거야. 너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다음 배당은 2억5천이 아니라 250억이 될 수도 있다니깐."
"네……. 그러겠죠."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원모는 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설득 실패다.
아무리 나와 성환이의 지분율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소액 주주들의 반대를 무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며칠 전 임시주총을 열어 암호화폐에 투자할 100억 원을 제외하고 50억 원을 몽땅 주주들에게 배당하기로 의결했었다.
5%의 지분을 가진 원모는 2.5억 원을, 50%의 지분을 가진 난 50억 원을 손에 쥐었다.
세금 제하고도 40억에 육박하는 자금.
어차피 난 이 돈으로 개인 계좌 통해 암호화폐에 몰빵하면 그만이다.
법인으로 하나 개인으로 하나 결국 마찬가지일 테니.
게다가 개인은 암호화폐 수익금에 대해 세금 한 푼 안 낼 테니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원모야 배당금으로 넌 뭐 할 거냐?"
"빚 갚으려고요."
"빚?"
"기억 안 나십니까? 예전 천하태평에서 빌린 돈이요. 다른 데 투자하신다고 갚으라고 하셔서 조성환님께 차환했잖습니까?"
"그거 어차피 이자도 안 받는다면서 뭐하러 갚아? 그냥 나처럼 암호화폐 사라니깐. 아니면 조그만 아파트라도 사놔. 대출 풀로 땡겨서."
성환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천천히 갚으세요. 급한 것도 아닌데. 그리 큰 금액도 아니고."
원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전 빚진 느낌이 별로라서 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털고 싶습니다."
"원모야. 빚에는 착한 빚, 나쁜 빚이 있는 거 몰라?"
"네? 착한 빚도 있습니까?"
"당근이지. 빚을 져서 나중에 수익을 가져올 자산에 투자하는 게 착한 빚이야. 빚이지만 빚이 아닌 거지."
"말이 안 되는데요. 그럼 나쁜 빚은요?"
"자산에 투자하지 않고 소비에 사용한 빚이지. 나중에 어떤 수익으로도 돌아오지 않고 청구서만 날아올 뿐이야. 흔히들 알고 있는 빚이지."
"그래서요?"
"성환이도 당장 안 갚아도 된다고 하니깐 갚지 말고 투자해버려. 설마 재무 짬밥 몇 년에 레버리지 효과란 말도 몰라?"
"알지 말입니다. 하지만 제 성격엔 그게 잘 안 됩니다. 돈이 없으면 몰라도 돈이 있는데 안 갚는다는 건요."
설득 불가.
안타깝지만 내 돈도 아닌데 더는 못하겠다.
"그래. 알았다. 하여간 난 얘기했다. 나중에 그때 왜 강하게 얘기 못 해줬냐. 억지로 끌고 가서라도 하게 했어야지, 왜 설득 못 시켰냐고 뭐라고 하기만 해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반드시 그런다에 내 손가락…… 아니다. 됐다."
천기누설할 수도 없어서 그냥 참았다.
김철수이사를 돌아봤다.
"이사님께서는 뭐 하시게요?"
"나? 난 집을 옮길까 하는데? 조금 넓은 평수로."
"이사님. 그러지 말고 이 기회에 평수를 줄여서라도 강남으로 옮기시죠."
"에이. 애들도 다 컸는데 뭐하러?"
"교육만 중요한가요. 강남에 모든 기반시설이……."
"아니, 괜찮아. 이미 와이프랑 얘기 끝냈어."
"그럼. 나중에 제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막았다.
무슨 말 할 줄 안다는 거다.
"알았어. 나중에 뭐라고 안 할게. 됐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성환이 쓰윽 하고는 끼어들었다.
"왜 난 안 물어봐요?"
"넌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그래도 한번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왜? 그 돈으로 천하제일 주식이라도 사게?"
"네? 이까짓 돈으로 거 몇 주나 산다고."
35% 지분이니 세금 떼도 15억 원은 될 텐데 그까짓 이라니.
"그럼 뭐 할 건데?"
"그림이나 몇 개 살까 합니다."
"뭐 그림이라고? 이중섭 소 그림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에이, 그런 작품은 이 돈으로 절대 못 사죠. 아니 아무리 많이 싸 들고 간다고 해도 못 살 거예요. 아예 매물로 안 나올 테니깐."
하긴 나도 알만한 최고의 작가 작품을 그 돈 주고 살라면 엽서 한 장 크기밖에 못살 거다.
"갑자기 그림은 왜?"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미술품 모으는 게 유행이거든요. 어떤 애들은 부모님한테 벌써 몇백 점 물려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미술관을 차리겠네."
생각해보니 그렇다.
미술품이 단순한 예술작품이라기보단 점점 투자수단으로 각광 받으면서 훌륭한 재테크 수단으로 변모할 것이다.
워낙 음성적으로 거래되다 보니 국세청에도 잘 노출되지 않아 상속이나 증여의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역시 있는 집 애들은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아니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
본능이라기보단 가정에서 보고 자라 부지불식간에 쌓인 것일 거다.
"대표님도 생각 있으세요?"
미술품이라.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등락 없이 무조건 우상향하는 최고의 재테크 수단인데.
예나 지금이나 돈이 돈을 벌고 돈이 많을수록 돈 벌기 더 쉬운 세상인 건 변함없다.
평상시 미술관에도 가면서 고상한 취미를 가질걸.
"좋은 생각인데? 그런데 어디서 사? 작가한테 직접 사는 거야?"
"하하. 물론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작가를 알아야 말이죠. 회장님이면 몰라도 전 아직 그 정돈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사?"
"갤러리, 화랑이라곤 들어봤죠?"
"죽을래? 무시하냐?"
"헤. 그런 데서 사는 거죠. 그런 덴 주로 신작이나 기획주제에 맞게 선별된 신진작가 작품들을 많이 내놓죠."
"그럼 돈이 안 되겠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죠."
"좀 프라이빗한 건 없나?"
"당근 있죠. 극소수 단골들한테만 알음알음 판매하는 곳이 여기저기 있어요."
"여기저기라니? 직접 돌아다녀야 하는 거야?"
"발품을 팔아야 돈이 된다는 거 모르세요?"
"내가 그걸 모르겠냐? 나한텐 돈이 곧 시간이니깐 아까워서 그렇지."
성환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골똘히 짱구를 굴렸다.
"직접 발품 팔아 갤러리 다니는 게 귀찮으면 유명 갤러리들이 모이는 아트페어에 갈 수도 있어요."
"아트페어라고?"
"네. 백화점 같은 거죠. 여기저기 유명 갤러리에서 모이는 곳이요."
"그래? 그게 딱인데? 지금 가볼까?"
"항상 하는 거 아니거든요?"
"백화점이라며? 당연히 매일 하는 거 아냐?"
"아니. 여기저기 갤러리 출품작이 많다는 거지 상설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가끔 행사하듯이 해요."
"그럼 도대체 넌 지금 그림을 어디서 산다는 거야?"
"바로 이게 있습니다."
성환이가 자기 서랍 속에서 두꺼운 잡지 같은 걸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웬 잡지?"
"잡지라뇨? 이거 경매 도록이거든요?"
"경매?"
"네. 미술품의 또 다른 시장, 경매시장이 있어요.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비싼 것도 가끔 출품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요. 가격은 낮지만, 가능성 있는 작품들 위주로도 많이 거래돼요."
"가격 메리트가 있다는 거야?"
"통상 시초가가 비슷한 수준 작품의 갤러리 가격보다 몇십 프로 저렴해서 제대로 고르면 싼 가격에 건질 수도 있어요."
"이번 경매는 언제 하는데?"
"이번 주까지 프리뷰하고 다음 주에 바로 입찰해요."
"프리뷰라면 미리 본다는 뜻?"
"오호, 영어 좀 하나 보네. 맞아요. 입찰장에 가기 전에 어떤 작품인지 봐야 하니깐 전시해 놓는 거죠. 꼼꼼히 보고 결정하라고."
도록을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입찰에 나온 수백 가지의 작품들.
아는 작가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눈을 크게 떠봐도 도대체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한참을 넘기다 중간쯤에서 매우 낯익은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철기'
언젠가 뉴스에서 금액까진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고액으로 낙찰됐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펼친 작품을 힐끗 보고는 성환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호 제법인데? 그림 볼 줄 아는 건가?"
"그냥 그림이 좋아서. 마음이 편해진다고나 할까?"
"대단한데? 이분 한창 뜨고 있는 작가예요. 나이도 있으신데 아직 왕성히 활동하시고. 이번 경매에 이분 거 두 작품 나왔어요."
지금은 성환이 말대로 현존작가지만, 이분껜 죄송하지만, 곧 고인이 되실 거며 작고한 후에 더욱 큰 명성을 얻을 분이시다.
환쟁이는 가난하고 풍각쟁이는 역마살이 껴서 평생 힘들게 살고 딴따라는 팔자가 드세어 그렇게 산다는 말이 있었다.
물론 옛말이다.
요즘은 풍각쟁이와 딴따라,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이 강남에 어디 수백억짜리 건물을 샀더라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도가 될 정도로 큰 부자일뿐더러 청소년 세대에선 최고의 선호 직업군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환쟁이, 즉 화가는 아직까진 그 정도는 아닌 듯.
왠지 가난한 단칸방, 폐병, 술, 담배란 단어와 매우 어울려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작고한 이후에 큰 명성을 얻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흐와 이중섭.
물론 화가가 죽으면 더 이상의 작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가격이 오를 수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화풍이 나중에라도 인정을 받을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안목이 없다.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클래식도 어려서부터 부모 따라 많이 들어봐야만 나이 들어서도 찾아 듣는 것처럼 미술 역시 오랜 시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안목이 쌓이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지난 시간을 내가 먼저 경험해봤다는 것.
이철기 작가는 고흐나 이중섭까진 아니더라도 꽤 유명한 거장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이거 내가 산다."
성환이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네? 두 작품밖에 없는데? 나도 살라고 했는데? 대표님 정회원도 아니잖아요. 경매에 참가 못 해요."
"그까짓 거 연회비 내고 정회원 가입하면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죠. 그런데 왜요?"
"이거 봐 봐! 눈물이 날 거 같잖아."
"전혀요. 그냥 동그라미, 네모, 직선 뭐 그런 건데 눈물이 난다고?"
"내가 살게. 이거……."
"그러죠. 내가 양보. 그럼 이건 대표님이 사고 다음 장 건 내가 삽니다."
웬일로 흔쾌히 오케이 했다.
이놈은 이 작품이 얼마까지 오를지 몰라서일 거다.
"그러자. 가자 프리뷰."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