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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53화 (153/191)

153화 도와주세요

오늘따라 조윤경 얘기에 굉장히 예민한 반응이다.

게다가 분명 뭔가가 있는 거 같긴 한데 말할까 말까 심각히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대표님이 술 한잔 사시죠."

"아니, 도대체 왜?"

"왜긴요? 그냥 맨정신엔 말하기 곤란해서죠."

이놈은 도무지 한 번에 알아듣질 못한다.

누가 이놈의 고민 따위에 관심을 갖는다고.

"그게 아니라. 네가 한잔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달라니 그게 무슨 막되 먹은 경우냐고?"

"참 나 대표씩이나 돼서 꼭 얻어먹어야겠습니까?"

"그럼 대표가 꼭 사라는 법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지만, 그래도 고민 상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 그냥 바래다준다고만 생각해서 지갑도 놓고 나왔는데."

"확 그냥! 뒤져서 나오면 십 원에 한 대다."

끼이익!

또다시 급정거.

차를 세운 곳은 어딘지도 모를 낯선 동네의 한적한 도로였다.

성환이 정색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리시죠."

"미쳤냐? 여기가 어디라고 내려?"

"나야 모르죠."

문밖으로 밀어내려는 듯 손을 뻗었다.

치사한 자식.

"알았어. 사준다. 사줘."

"진작 그렇게 나오시지. 치사하게."

"치사하다니? 내가 설마 너한테 술 한잔 사기 싫어서 이러는 거 같아?"

너무도 태연하게 답했다.

"네. 설마 아닌가요?"

역시 오래 지내다 보니 내 스타일을 이미 다 간파했다.

"절대 아니거든? 인생의 한 가지 팁을 주려는 거야."

"에?"

조소를 띈 얼굴로 턱짓했다.

듣고 싶진 않지만, 굳이 할 테면 말해 봐라라고 한 거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땐 가야 하지만, 말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거야."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내뱉었다.

"네?"

"살면서 고민하고 후회하는 것들 중에 하나지."

"뭔 소리래?"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 말하곤 하는데 하지만……."

성환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 네네……."

"그래. 내가 사마. 너 가고 싶은데 아무 데나 가라."

성환이 차를 세운 곳은 간판이 일본어로만 되어있어 읽지도 못하는 이자카야였다.

딱 봐도 꽤 고급져 보이는 곳.

괜히 아무 데나 가자고 했다.

그냥 이상현과 자주 가던 허름한 포차나 가자고 할걸.

발렛을 맡기고.

물론 발렛비도 내가 내야 할 거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이놈 자식 대리비도 내 지갑에서 나갈 거다.

발을 걷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하면서도 노란 조명이 반짝이는 은은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룸으로 안내를 받고는 메뉴판을 펼쳤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가격대.

아무래도 0이 하나 더 붙어있는 것 같아 눈을 비빈 후 다시 봤다.

하지만 역시 숫자가 바뀌어 있진 않았다.

더군다나 아무리 구석구석을 다 찾아봐도 그게 안 보였다.

주문받으러 온 매니저분께 말했다.

"저기요. 메뉴판이 잘못된 거 같은데요?"

매니저가 메뉴판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럴리가요? 손님."

"처음처럼이 안 보이는데요?"

매니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저희 업장에서는 소주를 제공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안동 소주도 있는데……."

대꾸하려 하자 성환이 막아 세웠다.

"그냥 준마이로 주세요."

꼭 술맛도 모르는 것들이 맛있는 처음처럼을 냅 두고 일본 술만 찾는다.

도수도 낮아 비슷할 정도로 취하려면 소주보다 돈이 몇 곱절이나 더 나오는 극악의 가성비인데.

"안주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손님"

"저희는 저녁 먹고 와서 안주는 필요……."

역시 성환이 가로막고는 제멋대로 시켰다.

"생선회랑 메로구이, 도다리 튀김 가져다주세요."

"야 너 밥 안 먹었냐? 지가 람지야 뭐야? 아예 그냥 메뉴판에 있는 거 다 달라고 하지 그러냐?"

"여긴 양이 적단 말이에요."

"그러면 딴 데를 가야지, 왜 이런 데를 와?"

"맛있으니깐요. 조용하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고스톱으로 싹쓸이한 돈 개평 한 푼도 주지 말걸.

매니저가 나가고 성환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술은 젤 싼 거시켰거든요."

"누가 뭐래?"

눈을 크게 뜨고는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뭐라고 하는구만!! 봐 봐……. 지금도 그러네."

"아예 코스로 시키지 그러냐?"

"그럴까요?"

"닥쳐."

난 딸랑 된장찌개 한 그릇 얻어먹었는데.

되로 받고 가마로 내주는 꼴이 됐다.

잠시 후 매니저가 안주 하나를 내어왔다.

장식만 화려하지 정작 생선회는 몇 점 안 담긴 접시였다.

"서비슨가 보죠?"

"아닙니다. 주문하신 생선회 준비드렸습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성환이가 왜 안주를 여러 개 시켰는지 이해가 갔다.

곧이어 나머지 안주가 상을 채웠다.

비싸긴 해도 맛은 좋았다.

그래도 겨우 십삼 도짜리 그것도 온더락잔에 먹을 건데 안주를 이렇게나 많이 시키다니.

두 병째 내온 술이 반쯤 비어가자 갑자기 성환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엄마가 아니에요."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니.

아이스크림 가게도 아니고 엄마가 외계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이놈은 한 번에 쭉 말 안 하고 꼭 스무고개 하듯 한다.

"엄마가 엄마가 아니면 뭐야? 말이야 방구야?"

"아니, 그게 아니라……."

"누구시냐고?"

"우리 엄마가 날 낳아준 친엄마가 아니라고요. 누나랑 내가 서로 엄마가 다르다고요. 최동욱처럼."

"뭐? 친엄마가 아니라고?"

"네. 그런데 아무도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몰라요. 전 엄마가 날 낳아준 엄마라고 생각하고 자랐고 주변 모든 사람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엄마가 워낙 밖에 내비치는 걸 좋아하는 분도 아니라서요."

그러고 보니 성환의 어머니는 대외활동은 물론이고 언론에도 비추어진 적이 없었다.

거기다 몇 번 안가에서 식사할 때조차도 한번을 마주치지 못했었다.

회귀 전에 이놈 따까리하던 시절에도 전혀 몰랐으며 그런 비슷한 소문조차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럼 전혀 티를 안 내셨단 말이야?"

"네. 한 번도 그런 내색 한번 안 비추시고 절 정말 친아들처럼 대해주셔서 꿈에도 몰랐어요. 엄마도 아들을 못 낳다 보니깐 밖에서 데려온 절 받아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할머니 살아계셨을 때 눈치를 많이 보셨거든요."

대충 이해가 갔다.

장자승계 법칙을 따르던 재벌가 속성상 데려온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본인이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유학 시절에 누군가 찾아와서 얘기해줬어요."

"누가 거짓말한 거일 수도 있잖아."

"저야 물론 안 믿었죠. 세상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깐요. 돈 있는 사람한테 붙어서 감언이설로 꾀거나 이상한 말로 불화 일으키고 하는 거 숱하게 봐왔거든요."

"그래도 확인할 길이 없었을 거 아냐."

"네. 그런데 이상하게 달랐어요. 그때부턴가 항상 똑같이 나를 대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더라도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누나랑 똑같이 아니 오히려 내 응석 같은 것도 다 받아주며 오냐오냐해 주시는 데도 이전과는 달라진 걸 느꼈어요."

"그냥 네 느낌이었을 수도 있지."

"아니에요. 몇 해가 훌쩍 지나고 방학 때 잠깐 들어와 있을 때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그래서 지나가듯이 한번 물어봤죠."

"정말? 그래서 어머니가 대뜸 맞다고 하셨어?"

처음엔 개뿔 전혀 관심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본인에겐 가슴 절절하게 아픈 가정사라도 제삼자가 봤을 땐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재미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농담하지 말라면서 바로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에다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 다른 말로 화제를 바꾸시는 게 너무 티 나더라고요. 그때 확신했어요."

"……."

"내가 엄마 아들이 아니구나. 아니 아들인 건 맞지만 직접 낳은 아들은 아니겠구나. 그때부턴가 나름대로 방황하면서 막 나가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회장님께서 억지로 천하제일에 집어넣으신 거죠."

예전에 유학 간 망나니 아들, 천하제일 황태자가 입사한다고 해서 회사 전체가 뒤숭숭했던 게 떠올랐다.

주요 계열사나 부서 돌다가 우리 재무팀으로도 발령이 났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거다.

"그래서 친엄마는 찾아보려고 했어?"

"아니요. 찾아서 뭐 하게요?"

"그래도 궁금할 거 아냐. 낳아주신 엄만데."

"왜 버렸냐고 물어보라고요? 버렸다고 하면 무너질 텐데? 그리고 안 버렸다고 해도 못 믿었겠죠. 그래서 안 찾았어요."

"무슨 사정이 있으셨겠지, 설마 버리기라도 하셨을라고?"

"어쩌면 내가 자신이 없었을 거예요. 지금 재벌로 사는 게 이렇게 좋은데 낳아주신 엄마 찾겠다고 그것도 날 버렸을지도 모르는 사람 찾는다고 했다가 행여나 이 생활들을 다 포기할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가라고요? 어림도 없죠."

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전혀 예상치 않은 전개였지만 묘하게 설득됐다.

"조윤경은 알아?"

"누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나이 차이가 있으니깐 나 데려왔을 땐 이미 사리 분별할 줄 아는 나이였을 테니깐요."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해본 적은 없어?"

"아뇨. 누난 그걸 입밖에 내뱉기는커녕 내색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안 내비쳤다고?"

"네. 누난 원래 독한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너무 많아서 내 건 무조건 빼앗고 할머니 모르게 나 괴롭히고 그랬죠."

"남매끼린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동생을 마약사범으로 몰아서 교도소까지 가게 합니까? 그것도 내 어렸을 적 친구들을 이용해서요? 완전 사이코패스지."

회귀 전에 나한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리게도 했었는데, 그 정도도 못 할까.

조윤경이 앞으로 더욱더 악랄해진다는 사실을 성환이는 아직 잘 모른다.

"누나도 장자승계 법칙에 따라 나를 데려왔다는 걸 알아서 내색 절대 안 했을 거예요. 할머니가 맨날 내 손자 내 손자 하면서 나만 이뻐하니깐 어려서부터 눈치챘겠죠."

조윤경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였을 거다.

괜히 내색해서 욕심부려 봐야 결국 내쳐질 사람은 자기가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그래서 이제 네 걸 뺏으려고 한다는 거야?"

"네. 엄마가 낳은 아들도 아닌데, 내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걸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화가 나겠죠. 나만 없으면 당연히 모든 게 자기 것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깐."

"음……."

"이제 내가 왜 최동욱을 불안해하는지 아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최동욱이랑 마찬가지란 말이구나?"

"네. 단지 난 운이 좋아서 어려서부터 마치 여기서 태어난 것처럼 자랐고 성까지 물려받았지만, 최동욱은 그렇지 못했다는 게 다를 뿐이죠. 실력이나 인성이나 나보다 훨씬 낫다면 당연히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죠."

"그럴 수 있겠네. 그럼 조윤경이 왜 최동욱이 아닌 너한테 힘을 합치자고 한 거야?"

"누나는 내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깐 엄마 자식인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최동욱을 몰아내자고 한 거겠죠."

"그다음엔 네 차례란 거지?"

"네. 누나 입장에서야 비록 딸이라고 해도 자기 혼자만 적통이라고 생각할 테니깐 최동욱 몰아낸 다음엔 내 차례겠죠."

복잡한 가정사다.

세 명의 자식이 모두 낳아준 엄마가 다르다니.

그것도 한 명은 성까지 다르고 자식 행세도 못 하고 있다.

예전 1세대 재벌가 소문으론 비슷한 얘길 들어본 적은 있으나 이렇게 가까이 생생하게 들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성환이 굳은 의지를 보이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와주세요."

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상 맞장구쳐 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대신……."

"아 좀 말 안 해도 알았다니깐요. 그까짓 암호화폔지 뭔지 동의한다니깐……."

"그럼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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