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남매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재벌들로서는 당연히 자기 밑에서 다른 직원들을 대신 부려주며 마름 역할을 시켜주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덥석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조윤경 역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비록 자기가 바라는 대로 내가 거절하긴 했지만, 이유가 영 못마땅했는지.
조회장처럼, 아니 조회장을 넘어서는 사람이 될 거라는 뉘앙스의 말에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냐고 째려본 거다.
"에헴!"
조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주위를 쓰윽 둘러보다 시계 한번 응시한 다음 나를 쳐다봤다.
본론은 끝났으니 가족들끼리 얘기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이다.
"자.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성환이 손을 잡고 만류했다.
"이따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차도 없으면서."
사실 태워주겠다기보단 자기를 도와달라고 붙잡은 거다.
"회장님, 천대표 어차피 우리 가족 일도 많이 알고 있는데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성환의 말에 조회장이 무서운 눈을 하고 노려봤다.
"넌 나서지 말래도?"
제법 심각한 얘기라도 꺼내려는 모양인지.
성환이 바로 깨갱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가족분들끼리 말씀 잘 나누십시오. 성환이가 굳이 태워주겠다고 하니 저는 정원에 먼저 나가서 산 너머 풍경이나 감상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풍경은 무슨 풍경.
드라마보다 재밌는 재벌가의 가족 담판을 놔두고.
비록 텔레비전이 아닌 소리만 들리는 라디오드라마지만 어찌 이 좋은 구경을 놓칠 세냐.
고스톱으로 싹쓸이 한 돈은 그대로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판부터 따는 바람에 내 돈은 백 원짜리 하나도 꺼낸 게 없이 모두 세 가족들한테서 나온 돈이었다.
내 딴에는 플렉스.
재벌에게 개평 주듯 쥐여준 거다.
하지만 조성환 남매는 내가 뭘 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나간 후 조회장이 꺼낼 얘기가 뭔지 촉각이 곤두서 있었을 테니 모른척한다기보단 아예 관심이 없는 거다.
하지만 조회장은 달랐다.
조용히 자기 원금 3만 원 정도를 챙겼다.
그것도 만 원짜리 세 장이 아닌 처음에 자기가 들고 왔던 동전, 지폐 등을 섞어서 그대로 집어 들었다.
역시 천하제일을 수위의 재벌그룹으로 성장시킨 비결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잘 가시게나. 멀리 안 나가겠네."
성환이가 붙잡았다.
"이거 들고 가세요."
성환이가 테이블에 놓인 한과와 약과를 한 움큼 쥐여줬다.
워낙 고스톱에 열중하느라 간식이 놓여 있는 줄도 몰랐었다.
아마도 게임 도중에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갖다주셨나 보다.
내가 거지도 아니고.
이딴 걸 가지고.
됐다고 뿌리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펴서 뻗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재벌은 어떤 간식을 먹는지.
맛은 평범한 집안의 간식과는 많이 다른지.
간식거리를 받아들고 마당을 나오자 바깥은 어느덧 깊은 밤으로 변해 있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예쁜 산과 알록달록한 도시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어 한 컷의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을 듯 보였다.
풍경 구경은 잠시뿐.
귀를 쫑긋 기울이는데.
거실에서의 소리보단 다른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저벅저벅.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사박사박 잔디를 지르밟는 가벼운 발놀림과 풀을 베듯이 스쳐 가는 소리 그리고 킁킁거리는 거친 숨소리.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뭔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두 눈동자.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 집 마당엔 셰퍼드인 태오가 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무서워서 저절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지 먹잇감 보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살려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복기해보니 그럴 일이 일도 없었는데.
잠시 후, 태오가 노려본 것은 나의 목덜미가 아니라 내 손에 꽉 쥐고 있는 한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성환 개새끼.
나를 이런 곤경에 빠뜨리게 하다니.
그 자식은 일부러 이랬을 거다.
어쩌면 내가 천하제일로 복귀하면 자기도 당연히 따라갈 거라 생각했을 텐데 눈앞에서 거절했으니, 차라리 없애고 말겠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간절한 눈빛으로 태오에게 말을 건넸다.
난 한과를 좋아하지 않아.
이건 네 거야.
너 줄라고 내가 특별히 들고 온 거란 말이야.
하지만 역시나 개와는 대화가 통할 리가 없는 법.
"으으르…… 으르릉!!"
"크허엉!!"
성환이 놈.
오늘 일이 생길 줄 알고 며칠간 일부러 굶기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평상시에 간헐적 단식이라도 시키는 건지 여간 신경이 곤두서있는 게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삼 일 굶은 맹수의 으르렁 소리를 직접 눈앞에서 듣게 될 줄이야.
오금이 저려서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사람은 정작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꼭꼭 움켜쥐고 산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놈의 간식 따위가 뭐라고 내 인생에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던져버릴 생각조차 못 했을까.
내가 소중히 지켜야 할 가족 같은 존재는커녕 배고플 때 한 끼 정도 뗄 식량이나 잠시간의 만족감을 채워줄 당분 정도밖에 안 되는 걸 가지고.
너무 급박한 나머지 떠올리지 못한 건가?
아니면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집착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이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손에 쥔 간식을 최대한 멀리 던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태오.
에어조던이라도 신고 있는지 공중으로 번쩍 뛰어올라 한과 하나가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훽 하고는 낚아채 갔다.
저게 나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니 식은땀 한 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사지가 떨려왔다.
다행히 태오는 더 이상 내 쪽에는 신경도 안 쓰고 먹는 데만 열중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는 거실 안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소리.
부녀지간끼리 티격태격하는 소리였다.
"아직도 그놈을 못 잊는 게야?"
"못 잊다니 누굴요?"
알아들었으면서도 오리발 내밀었다.
"날 배신한 것도 모자라 우리 천하제일까지 곤경에 빠뜨리게 한 놈을 아직 만나는 거냐고?"
"……."
갑작스럽게 훅 들어와 대비해놓은 게 없었는지 조윤경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자가 순진한 널 꼬드겼다고 생각한 내가 오해라도 한 거니?"
헉! 순진하다니.
저렇게 표독하고 악랄한 사람한테.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회장 역시 딸 가진 아버지.
자기 딸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해질 수밖에 없는 게 한결같은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아니에요. 아빠! 그래도 아이 아빠니깐 가끔 만나게는 해줘야 해서 그냥 연락 몇 번 한 게 전부예요."
"잘 들어. 너한텐 그자가 짐밖에 안 돼."
아까 관상가가 한 얘기다.
"똑똑하고 집안도 나쁘지 않다고 해서 내 특별히 반대하진 않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어."
"뭐라고요?"
"애초부터 글러 먹었어. 우리 같은 집안하곤 근본적으로 다른 잡놈을 거두어주니깐 지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물잖아."
꽤 괜찮은 집안이라고 들었는데 재벌이 아니니 그냥 잡놈 집안이라고 칭하다니.
예전에 자기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치가 떨려 오버한 감은 있겠지만 그래도 조회장은 겉보기완 다르게 아주 무서운 사람이다.
"윤경아. 지금 그자가 뭐 하는지 알고는 있니?"
"네? ……."
조윤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알고 있어도 알고 있다고 대답하기 어려웠을 거다.
"경쟁사라고 부르기도 뭐한 어디냐 그 쪼그만 회사 어디더라? 중국에서 우리보다 잘나간다고 으스대는 동방으로 갔다는구나? 그것도 중국법인 대표로."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아니? 대놓고 우리 천하제일과 적대하겠다는 거잖니. 오죽하면 동방에서 받아줬겠냐고?"
갑자기 성환이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자 때문에 우리도 투자건 하나 완전히 망쳐버렸어요."
이 틈에 고소하다는 듯 불난 집에 부채질하려 한 거다.
사태가 심각해진 걸 알았는지 조윤경이 꼬리를 내렸다.
"죄송해요. 아빠."
"왜 미안하다고만 하고 다른 대답이 없어? 네가 못하겠다면 나보고 그렇게 만들어 달라는 거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빠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날 두 번 다시 화나게 하면 안 된다."
"네……."
성환이 그 틈새를 찾아 또 들어왔다.
"그런데요. 회장님.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다니 뭐가?"
"뭐긴요. 천하제일 복귀 말씀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조회장이 어이가 없었는지 콧방귀를 끼는 소리까지 났다.
"허."
"회장님. 말씀 좀 해주시면……."
"천대표가 아까 거절한 거 못 들었어?"
"거절한 건 천대표고요. 제 복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넌 당분간은 천대표랑 같이 있어!"
아무래도 아까 누군가와 같이 있어서 성환이 인상이 좋아졌다는 관상가의 말 때문일 거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성환은 풀 죽은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조성환 남매는 그 이후로도 쏟아지는 조회장의 잔소리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한참이 지난 후 본채의 문이 열렸다.
풀죽은 모습으로 나오는 성환과 달리 조윤경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앙칼진 모습으로 훽 돌아서서 별채로 향했다.
이게 모두 예전에 조회장에게 안치홍의 비리를 밝혀낸 내 탓이라는 생각 때문일 거다.
조윤경 역시 나를 원수로 대하고 있음이리라.
차에 오르자마자 성환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도대체 왜 거절하신 거예요?"
"아까 얘기했잖아."
"그럼 나는 왜?"
"왜 너랑 나를 세트 취급하냐고?"
"들었습니까?"
"당근이지.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된 게 그렇게 얄밉게 끼어들면서 초를 치냐? 아주 조윤경이 싫어할 만 하더구만."
성환이 오랜만에 정색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십시오."
어느 대목에서 화가 난 건진 잘 모르겠다만 암튼 오랜만에 발끈한 걸 보니 더욱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을 배배 꼬아가며 성환이 흉내를 냈다.
"저는 어떻게 되나요? 천대표는 그렇다 쳐도 저는 좀 복귀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아휴 좀!! 그만하시죠."
배배 꼬며 이어갔다.
"계속할 건데?"
"그렇다면 나도 안 참습니다."
"그러시든지요? 어디 한번 참지 말든지요."
"에이 확 그냥!"
성환이 갑자기 핸들을 틀어버리더니 엑셀을 밟았다.
그리고는 골목길 사이 전봇대를 들이받을 기세로 그대로 돌진했다.
정말이지 미친놈.
"으허헉!! 잠깐! 미안 내가 미안해……."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멈춰 섰다.
차가 멈춘 걸 느끼고는 고개를 들자 바로 코앞에 전봇대가 있었고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뭐 하는 짓이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농담할 기분 아니라니깐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딴 거 가지고."
"그딴 거 아니라니깐요. 한 번만 누나가 싫어할 만하다 그런 얘기하기만 해봐. 그냥."
눈을 희번덕거리는 데 찌를 수도 없고.
언제 또 미친 짓을 할까 봐 무서워서 그냥 꼬리 한번 내렸다.
"알았어. 대신 이런 미친 짓 다시는 하지 마라."
진 것 같아서 기분이 살짝 그랬지만.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밟을까 봐 무서워서 피하는 거다라며 정신 승리했다.
"왜 싫다는 거죠?"
"너도 알잖아? 난 천하태평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울 목표가 있어. 전적으로 매달려도 부족할 판에 다른 데 정신 팔 여유가 어딨겠어?"
"그럼 나는요? 복귀할 기회를 놓치고만 있으라고요?"
"방법이야 어떻든 결국 천하제일 수장이 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꼭 지금 들어가야겠어?"
"누나가 가만 있겠냐구요. 최동욱은 또 어떻고요? 나보고 뒷짐만 지고 있으라고요?"
이놈한테 천기누설할 수도 없고.
나중에 천하태평이 세계적인 기업이 돼서 천하제일쯤이야 야금야금 주식 좀 모아서 경영권을 가져오면 되는 거지 이놈은 꼭 안에서부터 클 생각만 한다.
역시 어쩔 수 없는 재벌가 집안.
"그건 그렇고 왜 조윤경 얘기에 발끈하고 그래?"
"음…….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