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고스톱
"깊고 길게 뻗은 눈과 긴 눈썹, 꼬리가 올라간 입술, 반듯한 이마까지……. 별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허허. 선생님께서 이렇게 좋게 얘기한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특히 귀가 좋습니다. 상부가 발달한 걸로 봐서는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습니다. 게다가 뾰족한 게 계산이 빠르고 결단력까지 갖췄고요. 귓불이 크게 내려앉은 걸로 보아 재물운까지 따르는 상입니다."
살면서 부처귀라는 말은 몇 번 들었었는데 역시나 좋은 관상이었나보다.
"그럼 다 좋기만 하다는 말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얼굴이 울퉁불퉁 솟은 게 적어 보여 좋은 복을 다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잘 믿는 상이라 위험에 처할 수도 있어 보이고요. 더군다나 왠지 어디선가 돌아온 듯한…… 아, 아닙니다."
말끝을 흐리니 조회장이 되물었다.
"돌아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이라 말이 헛나왔나 봅니다."
돌아오다니.
예전에 풍수가인 장풍거사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는데.
그런 게 어느 정도는 인상에서 풍기나 보다.
"음……."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심상이 제일 중요한데, 사람 속을 알 길이 없으니 모르는 거지요."
어느 전문가가 하는 것처럼 발 빼기를 시전한 거다.
그나저나 사람을 잘 믿어서 뒤통수를 맞는다니.
마치 회귀 전의 얘기를 듣는 거 같아 마음이 쓰라려 왔다.
"우리 애들은 어떤가요?"
"네,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달라지다니요?"
"관상은 언제든지 변합니다. 얼굴은 얼이 들어간 굴이란 뜻으로서 마음이 밝고 화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얼굴이 피어나죠. 마음먹기에 따라 관상이 달라진다는 얘깁니다."
"어떻게 달라졌단 말씀이신지요?"
"따님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어두워진 느낌입니다."
"옆에서 등골만 뽑아먹는 놈을 떼놓았는데도 아직 그런가요?"
안치홍과의 이혼을 말한 것일 거다.
"네. 아직 마음까지 다 떼놓진 않은 게 아닐지요?"
"음……. 그럼 아들 녀석은요?"
"네. 몇 년 전보다는 밝고 화해진 게 분명히 나아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요."
몇 년 만에 관상이 달라졌는지 알아볼 겸 불렀나 보다.
그렇다면 난 왜 불렀을까?
성환이 곁에서 짐이 되는지 도움이 될 상인지 알아보려고 그런 건가?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은요? 이제 제 일인 걸요."
잠시 후, 관상가를 배웅해준 조회장이 식당 안으로 돌아왔다.
조윤경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아빠 친구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어렸을 때 봐서 잘 모를 거야."
"친군데 밥 먹을 동안 한마디도 안 해요?"
"음. 밥 먹기 전에 얘기 다 했어. 그건 그렇고 이제 시작하지 그래?"
조회장이 우리를 둘러보고는 나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아니, 아빤 도대체 그걸 왜 하자는 거에요? 더군다나 외부인까지 있는데?"
내 쪽으로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내가 껴선 안 될 자리라니.
설마 후계 구도에 대한 논의라도 한단 말인가?
조회장이 무섭게 눈을 뜨고 호통쳤다.
"팔아야 할 거 아냐."
조회장의 짜증 섞인 말에 조윤경이 마지못한 듯 일어섰다.
"네."
성환이 역시 똥 씹은 표정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서다 보니 세 사람이 거실 한가운데로 향했다.
거실 바닥엔 덩그러니 국방색 모포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빨간색 화투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세 사람은 익숙한 듯 모포 주위에 둘러앉았다.
고스톱 대형으로 자리한 거다.
팔아달라는 게 광 팔아 달라는 말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자 조회장이 말을 건넸다.
"성환이 옆으로 원하는 자리에 앉게나."
"제가요?"
"자네 이 게임 잘하지 않나? 지난번엔 나한테 훈수 둔 적도 있었잖나?."
역시 내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무심한 듯 내뱉는 거 같았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네가 어디에 앉는지 보자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건 시험이다.
고스톱에서의 자리 선정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왼쪽에 앉는다면 오른쪽 사람에 기대서 광이나 팔아보겠다는 뜻이니 빌붙어서 뽑아먹겠다는 의미가 있을 거고.
오른쪽에 앉는다면 반대로 왼쪽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말이 될 테니.
성환이 오른쪽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자 조회장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표정만 봐서는 만족한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대기업 회장 일가와의 고스톱이라니.
실력이야 대충 곁눈질로 본 적 있으니 이거 완전 땅 짚고 헤엄치기란 얘긴데.
"점당 얼마로 할까요?"
화투장을 섞으며 묻자 조회장이 답했다.
"백으로 하지."
점당 백만 원이라.
뒷장이 제대로 붙어만 준다면 아파트 한 채 값은 충분히 뽑을 각이다.
조회장이 일어나더니 거실 끝 자개장 서랍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잠시 후 움켜쥔 손에서 나는 소리.
'딸랑딸랑.'
동전 몇 개와 지폐 몇 장을 자기 앞에다 던져놓았다.
합쳐봐야 3만 원도 안 되는 듯 보였다.
점당 백만 원이 아니라 백 원이란 말이었다.
엄마랑 재미 삼아 치는 것도 아니고 점 백짜리 판이라니.
삼광으로 나더라도 양쪽에 300원씩 겨우 600원밖에 못 딴다.
광박에 쓰리고에 하루종일 판 쓸어봐야 아파트 한 채는 고사하고 내 오피스텔 한 달 관리비도 못 건지겠다.
그래.
고스톱이 돈 벌려고 치나 그냥 재미로 치는 거지.
돈 딸 생각을 내려놓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지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패가 쩍쩍 붙었다.
한참을 싹쓸이하고 있으니 도저히 못 참겠는지 성환이 한마디 했다.
"저도 좀 치면 안 될까요?"
고스톱은 네 명이 한 번에 칠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한 명은 죽어야만 한다.
단, 선의 오른쪽 사람부터 죽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모두 안 죽는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선의 왼쪽에 앉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사람은 광을 팔 수 있으며 게임 끝나고 잃은 사람한테 광이나 쌍피를 묶어서 장당 백 원씩을 받는다.
내가 거의 모든 판을 선 잡고 있으니 자기도 치게 해달라고 투정 부린 거다.
"어떡하지? 선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가 없네? 다른 분들께 말씀해봐."
조회장이나 조윤경이 죽으면 판에 낄 수 있다고 얘기해준 거다.
"이번 판은 누나가 죽지 그래? 나 좀 쳐보자고."
조윤경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죽으려면 너나 죽어. 그냥 광이나 팔든지."
성환이 마지못한 듯 조회장 쪽을 바라봤다.
"회장님은 안 죽으십니까?"
조회장이 화투장을 집어 들어 패를 확인하고는 외쳤다.
"난 못 먹어도 고다."
둘 다 죽지 않겠다는 거다.
성환은 할 수 없이 들고 있던 패를 바닥에 던져놓았다.
"내가 죽겠습니다. 광도 없네요."
아침 막장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을법한 대화가 오고 갔다.
고스톱이 주는 묘미랄까.
직계존속 간에 죽고 죽이는 살벌한 말들이 오고 갔다.
몇 판을 더 돌았지만, 일방적인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한참 뒤 조회장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화투패를 던졌다.
"이제 그만 하지."
처음 꺼낸 돈 3만 원을 다 잃게 되자 바로 일어난 것이다.
본전 생각을 하지 않고 처음에 정해놓은 손실에 다다랐을 때 멈출 수 있는 결단력.
그거 하나는 높이 쳐 줄만 하다.
하지만 자식들은 본받지 않은 듯 조윤경이 씩씩댔다.
"아빠. 이렇게 끝내는 거 어딨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졌다는 사실이 용납이 안 되었을 거다.
"그만해. 해도 안되는 게 있는 거야. 그럴 땐 멈출 줄도 알아야 해."
제법 단호한 조회장의 말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는지 화투패를 앞으로 던져버렸다.
"쳇. 알았어요."
성환이도 조용히 화투패를 던졌다.
화투장을 정리하는 와중 조회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 고스톱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본론이다.
돈 좀 따보겠다고 혹은 재미 삼아 해보잔 게 아니라 고스톱은 핑계였을 뿐.
어쩐지 자기 패를 보면서 다음에 낼 걸 생각한다기보다는 조성환 남매,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는 것 같더라니.
됨됨이를 살펴보려고 한 거였다.
"선택과 집중입니다."
"무슨 말인가?"
"패를 처음에 받아들었을 때 어떻게 칠지 계획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깔린 패부터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광이면 광, 피면 피, 고도리면 고도리 미리 정해놓고 철저하게 집중공략을 해야 합니다."
조회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
고스톱은 지고 있는 사람한테 선택권이 없는 게임이다.
포커 같은 게임은 중간에 포기하고 던질 수 있지만, 고스톱은 그럴 수도 없다.
선이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게임이다. 공격도 중요하지만, 방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최악을 피하는 겁니다."
"피하다니 어떻게 말인가?"
"고스톱은 지고 있을 때 덜 잃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한판을 크게 잃는다면 화투장을 내려놓아야 하겠지만, 적게 잃는다면 다음 판을 기약해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회장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고스톱도 회사 경영이랑 똑같다는 말이군."
"네, 회사 경영뿐만이 아니라 인생하고도 비슷한 거죠."
조회장은 뭔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네 혹시 천하제일로 복귀할 생각이 있나?"
"네? 천하제일로요?"
"그렇네. 천하제일로 돌아오게나."
조회장의 말에 조윤경이 발끈하고는 쏘아붙였다.
"아니, 아빠. 이자를 뭘 믿고?"
면전에서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역시나 안하무인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조회장이 핀잔하듯 다그쳤다.
"넌 조용히 있어."
"아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자가 어떤 놈인지 알고?"
이자? 어떤 놈?
무시하는 발언에 발끈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참았다.
"넌 조용히 좀 있으래도!"
조회장이 버럭 큰 소리를 내며 윽박지르자 그제야 조윤경이 마지못한 듯 입을 다물었다.
성환도 궁금했는지 끼어들었다.
"회장님. 그럼 저는요?"
역시 이놈은 자기 처지가 먼저다.
조회장이 흘기듯 노려보자 성환이 역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수그렸다.
"어떤가 자네? 지금 답하기 곤란하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가?"
천하제일로의 복귀라?
사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신경은 온통 천하태평이 그려갈 찬란한 미래에만 꽂혀있었을 뿐 남의 회사 따위에 어떤 희망이나 기대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굳은 표정을 한 채 답했다.
"아닙니다. 바로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시게."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조회장이 매우 놀랐다.
"아직 직급이나 직책도 말하지 않았는데 말인가?"
"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지주사 재무팀장 자리라고 해도?"
재무팀장!
회귀 전의 바로 그 자리라니.
예전 조윤경의 계략에 넘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동작교에서 뛰어내리던 장면이 오버랩됐다.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물론 권한 있고 책임 있는 막강한 자리였지만, 그날 이후로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결국 누구 밑에서 복종하는 자리일 뿐.
앞길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선택을 반복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죄송합니다. 설령 대표이사라도 하더라도 사양하겠습니다."
성환이 매우 놀랐는지 쏘아붙였다.
"아니, 도대체 왜요? 임원 자린데?"
내가 간다고 하면 당연히 자기도 복귀할 거라는 생각에 내 답이 못마땅한 거다.
조회장이 내 의지를 느꼈는지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자네 뜻은 충분히 알겠네. 하지만 거절하는 이유 정도는 알려줄 수 있나?"
"네. 전 제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회장님처럼 말이죠."
차마 면전에서 '당신을 뛰어넘을 거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회장은 행간을 읽었는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