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귀인의 상
안치홍에게 뒤통수를 맞은 충격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물론 지난 시절 안치홍을 엉터리 신발회사 투자 건에 끌어들여서 손실을 입힌 것과 우전무와 함께 비자금 빼돌린 걸 밝혀서 날려버린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당장 30억 원이라는 손실이 천하태평의 존립을 흔들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이제 곧 암호화폐거래소가 생겨 그 돈을 투자한다면 몇 년 뒤 수백, 수천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조회장한테 큰소리 뻥뻥 친 성환이 놈 때문이다.
이 중요한 시점에 겨우 자기 능력 한번 보여주겠다고 이런 막대한 손실을 끼치다니.
"이런 씨댕!"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듯해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성환은 찔리는 게 있었는지 옆에서 움찔거렸다.
고개를 휙 돌아보며.
"뭐지?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은데?"
"왜? 찔리긴 하나 보지?"
"참나. 엄청 오래 가시네. 겨우 30억 가지고……. 아주 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겨우 30억이라니. 몇천억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어…… 한 번만 그 말 꺼내면 확 그냥 우리 합의 없었던 걸로 합니다."
암호화폐 투자 건에 동의했던 걸 말한 거다.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삿대질을 섞어가며 내지르자 김철수이사가 말리듯 끼어들었다.
"천대표 이제 그만해. 다 지나간 일이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잖아요. 손실이 한두 푼이어야 말이죠."
"조성환님 말씀대로 그 정도 금액에 천하태평이 흔들리진 않잖아? 거기다 조금만 있으면 수호개발에서 들어올 돈도 있는데."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네. 할 수 없죠, 뭐."
김철수 이사가 나와 성환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조성환님께서 말씀하신 합의란 게 무슨 말이야?"
암호화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김이사한테는 사실대로 얘기하면 안 된다.
시작도 전에 초칠 게 뻔하다.
"네. 그게 말이죠……."
고자질하려는 성환이를 막아 세웠다.
"에이, 별거 아니에요. 앞으로 우리 회식비 이놈이 전부 낸다고 했어요. 회사에 손실 끼쳤으니깐 그 정돈해야죠."
"아니. 내가 언제. 그게 아니라……."
"닥쳐. 네가 사 그냥. 말 나온 김에 오늘 회식이나 하자."
매섭게 노려보자 성환이 놈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입을 닫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원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대표님 회식 장소 예약할까요?"
"왜? 오늘은 달력에 하트 없디?"
"네. 이번 달엔 마감했습니다."
왠지 표정이 매우 밝아 보이는 게 살짝 안쓰러워졌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장어나 먹으러 갈까? 논현역 그 집으로?"
"네? 대표님……. 다른 거 먹으면 안 될까요?"
"아니 왜? 너 비싼 거 좋아하잖아."
원모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지난달 내내 와이프가 장어만 해줘서요."
불쌍한 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자세히 보니 오늘따라 피골이 상접한 게 볼이 쏙 들어가고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 알았어.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어라."
잠시 후.
띠리리링!
성환이 휴대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자 성환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탕비실 쪽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조회장 전화다.
호칭이나 말투만 들어서는 절대 부자지간의 통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건조했다.
"……."
"네? 당장 오늘이요?"
"……."
"네. 물어보겠습니다만 분명 괜찮을 겁니다."
"……."
"네? 누나도 같이요? 왜요?"
"……."
"……네. 알겠습니다."
성환이 조회장과의 전화를 끊고는 바로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보나마나 조윤경에게 했을 거다.
"나야."
"……."
"됐고, 우리가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니잖아. 회장님이 오늘 천대표랑 왜 같이 보자고 한 건지 알아?"
방금 조회장이 내 얘기를 했나 보다.
"……."
"뭐라고? 그걸 팔아달라고? 헐……. 알았어."
다짜고짜 나한테 팔아달라니 도무지 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
"그건 그렇고. 너 혹시 전 남편이 어디서 뭐 하는지나 알고 있는 거야?"
이젠 누나라고도 안 부른다.
같은 집에 사는데도 한 번도 마주 치치 않는지 몇 주도 지난 안치홍 얘기를 이제야 꺼내 들었다.
"그자가 중국에 있는 것도 모르냐고? 그것도 떡 하니 경쟁사에 말이지."
"……."
"그래. 잘하는 짓이다."
"……."
도무지 남매사이의 대화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갔다.
아무래도 조회장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것이다.
전화를 끊은 성환이 씩씩거리며 탕비실을 나왔다.
짐짓 모른 척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지만, 살짝 늦었다.
"다 들은 거 알거든요? 하여간 회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티 나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됐고. 도대체 내가 뭘 팔아달라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가면 알아요."
"야 이 자식아. 그건 그렇고 먼저 시간 되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설마 약속 같은 게 있으려고요?"
"오늘 회식한다고 했잖아. 지금 원모가 열심히 찾고 있는 거 안 보여?"
원모가 자기 얘기가 나오자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성환이 할 수 없다는 듯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원모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오늘 대표님하고 가볼 데가 있어서."
원모는 웃으며 카드를 흔들어댔다.
"죄송하긴요. 괜찮습니다. 이 친구만 가면 되죠, 뭐."
예산 제한도 없는 데다 잔소리 들을 필요도 없으니 좋아 죽는 거다.
"그런데 나도 조건이 하나 있어."
내 말에 성환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요?"
"우선 아무리 맛있어도 개밥그릇에 김밥 따위는 안 먹을 거다."
"된장찌개는 괜찮아요?"
"공깃밥 시키면 딸려 나오는 거나 먹으려고 거기까지 갈 생각 없거든?"
"그럼 뭐 드시고 싶은데요?"
막상 딱히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진 않았다.
"몰라. 그냥 비싼 거 아무거나."
* * *
퇴근 후.
성환이의 차를 타고 오랜만에 성북동 안가를 방문했다.
집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은 온통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뒤덮여있어 마음마저 촉촉하게, 붉게 물들이는 듯했다.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게 정말 만 가지 경치를 품고 사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둑어둑해지면서 조명이 켜진 성벽을 바라다보니 옛 유럽의 고성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풍수는 물론이고 경치가 너무 좋아 성북동에선 웬만해선 매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성환이 한마디 했다
"뭐하십니까? 안 들어가고."
두 팔을 벌려 온몸으로 산의 정기를 가득 담았다.
"너무 좋잖아. 넌 안 좋냐?"
"뭐가 좋다는 거지?"
손을 들어 산자락을 가리켰다.
"넌 저걸 보고도 뻥 뚫린 느낌이 없어?"
"뭐래? 답답해 죽겠구만. 난 강남 오피스텔이 훨씬 좋거든요? 경치도 훨씬 좋고?"
이 자식은 잠시 쫓겨났을 때 빼고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여기에만 살아와서 별다른 감흥이 없는 거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그냥 들어가시죠. 회장님 기다리실 텐데."
"됐다. 말을 말자."
집안에 들어서자 현관문 앞엔 뾰족한 빨간 구두와 함께 검정 고무신 한 켤레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줄곧 봐오던 조회장의 낡은 구두는 아닌데.
다른 손님 한 분이 더 와있나 보다.
성환이 안내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탁에는 역시 처음 보는 듯한 노신사 한 분이 앉아있었다.
역시나 조윤경은 뻔히 내가 들어선 걸 알면서도 인사는커녕 시선 한 번도 주질 않았다.
나 역시 눈 안 마주쳐도 되고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회장이 날 보더니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서 앉게나. 오랜만이군."
"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처음 본 노신사를 쳐다보자 조회장이 소개시켜 줬다.
"아, 손님 한 분 더 모셨네. 내 친구라네."
"네. 안녕하십니까. 천태평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노신사 역시 인사를 건넸지만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가만있었다.
분명 만나본 기억은 없었지만, 왠지 낯이 익은 사람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봐왔던 사람인가보다.
우리가 식탁에 자리하자 조회장이 한마디 건넸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드시게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 차린 게 별로 없었을뿐더러 초록초록한 풀때기만 놓여있는 게 혹시 내가 잔디밭에 앉아있나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젓가락을 들고 도대체 뭘 집을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메인 메뉴를 들고 오셨다.
'보글보글…… 김이 모락모락'
김밥이랑 된장찌개만 아니면 된다고 했는데.
조성환 이놈…….
아주머니가 들고 온 건 역시나 된장찌개였다.
순간 뾰족한 눈으로 성환이를 노려봤다.
"이거 그냥 된장찌개 아니거든요?"
된장찌개에 종류라도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성환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된장찌개가 아니라 엄청 비싼 거거든요? 최상급 송이로 특별히 만든 거니깐 많이 드십쇼. 비싼 거 좋아하신다면서요."
조회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걸 좋아하신다고?"
된장찌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는데.
성환이를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 숟가락을 들어 찌개 맛을 봤다.
물론 맛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고향의 맛 다시다를 훌쩍 뛰어넘는 송이의 감칠맛이 입안을 휘감아 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된장찌개는 역시 된장찌개일 뿐.
자연산 송이를 넣든 샤또브리앙을 넣든지 간에 물에 된장을 풀은 이상 절대 다른 음식이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조윤경과 한 식탁에 둘러 앉아있으니 있던 밥맛도 다 사라져버려 힘없이 먹는 시늉만 했다.
나도 그렇지만 조회장의 친구라는 분 역시 풀때기나 뜯을 생각은 없으신지 몇 숟가락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는 생각에 손으로 몇 번 털어봤지만 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당한 마음에 노려보자 눈치를 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조윤경과 성환이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빤히 쳐다봤다.
눈치도 없는 남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가족끼리는커녕 손님하고도 한마디의 대화를 나누질 않았다.
말 그대로 밥 한 그릇 얻어먹으러 온 식객인가.
차 한잔도 채 마시기 전에 조회장의 친구라는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전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손님 모셔놓고 이렇게 말 한마디 안 걸고 있으면 나 같아도 바로 일어나겠다.
마침 조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아이고 벌써 일어나시게요?"
왠지 나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지만 조회장이 만류했다.
"자네는 좀 이따 같이 할 일이 있네."
할 말도 아니고 할 일이 있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손님 모시고 오겠네."
조회장이 손님을 밖으로 안내했다.
인사를 건네고 문밖을 나서는데 정원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는 소리가 났다.
안 들리는 데서 살짝 대화를 나누려고 같이 나간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귀를 쫑긋 기울였다.
"어떻습니까? 귀인의 상인가요?"
"아 네. 관상은 아주 좋습니다."
어쩐지 밥 먹는 데는 관심 하나 없이 뚫어지게 얼굴만 쳐다보더라니.
역시 관상가였나보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더라니.
갑자기 회귀하기 몇 년 전 임원승진을 앞두고 면담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말이 면담이지 사실은 신입사원들처럼 고위급 임원들로부터 면접을 봤던 거였다.
대부분 아는 얼굴이던 계열사 대표급들 사이로 유독 처음 본 사람이 한 명 앉아있었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서 한마디 질문을 던지기는커녕 그저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임원승진 시 관상을 중시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맞는 말이었다.
방금 이 손님이 그때 면접관 석에 앉아있던 그 관상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