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배후
호텔로 돌아와 짐을 풀자마자 로비로 나왔다.
배는 고프고 딱히 아는 식당은 없어서였는지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지난번 수만이와 갔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계산을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초호화 인테리어면 밥값이 무시 못 할 정도로 나올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끼 식사로는 오버다.
다행히 식당으로 향하는 길은 나름 먹자골목인지 여러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식당은 물론이고 맥도날드까지 있었다.
"우리 저기 가서 먹을까? 너 햄버거 좋아하니까 맥도날드는 어때?"
하지만 성환이 바로 눈치챘다.
"비쌀까 봐 그래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회사 경비로 막 쓰다 보면 원모가 뭐라고 해서 말이지."
"그냥 가시죠. 거기가 정말 음식 하나는 잘하잖아요."
"그 집이 잘하는 게 아니라 그때 수만이가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거만 시켜서 그런 거야."
"내가 냅니다. 내요. 그냥 가시죠."
뭐, 그렇다면 안 말린다.
다시 찾은 고풍스런 중식당.
저녁 먹기에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그리 분주해 보이진 않았다.
우리가 식당 안에 들어서자 매니저가 반갑게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또 오셨네요."
"네.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한 달만의 방문인데도 단번에 알아보다니.
한국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식당이거나 매니저의 기억력이 상당한가 보다.
매니저는 인원이나 예약 여부 등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룸 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 빈방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판을 넘기고 있었다
바로 하수만이었다.
수만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발견하고는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
"어! 대표님. 여긴 어떻게?"
"수만이 네가 여기 왜?"
매니저는 자기가 잘못 안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지난번 수만이와 같이 온 걸 기억하고 이번에도 당연히 일행일 줄 지레짐작하고는 수만이가 예약한 방으로 안내했었나 보다.
마주 보는 수만이 눈빛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듯 흔들렸고 눈 주위는 파르르 떠는 것처럼 보였다.
매우 긴장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내가 자기가 한 짓임을 알아차렸는지 불확실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한 거다.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고 쳐다보기만 했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상황 파악이 됐는지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인사말은커녕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다니.
그 한마디에 모든 게 확실해졌다.
"다 알고 있었어? 일부러 그런 거야?"
수만이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떨구었다.
"왜 그랬어?"
"그게요……. 실은 제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오며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수만이가 무슨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 뒤쪽을 쳐다봤다.
"안종! ……아니 대표님."
원래 만나기로 했던 수만이의 일행이 온 모양이다.
대표란 말에 나와 성환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자 경멸의 표정으로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조윤경의 전남편 안치홍이었다.
안씨 성을 가진 지금 수만이의 보스가 바로 안치홍이었다니.
"어이! 이게 누구야. 우리 그 잘난 처남 아냐? 아니지 이제 작은 처남이라고 불러야 하나? 여기 누추한 상하이까진 웬일로 행차하셨나?"
안치홍은 말과는 다르게 그다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한 목소리였다
그 와중에도 성환이가 둘째 아들이라는 걸 콕 짚어서 얘기해줬다.
역시 조윤경과 아직 왕래가 있다는 얘기다.
성환은 발끈해서는 안치홍을 향해 쏘아붙였다.
"처남이라고 부르지 말지? 어디서 함부로……… 내쳐진 주제에. 우리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나?"
성환이 내뱉은 비아냥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안치홍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죠. 둘째 도련님. 아! 참 우리 하과장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셨나?"
하수만이 울상을 한 채 대신 답했다.
"네. 대표님."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안치홍의 사주로 하수만이 우리를 똥 밭으로 안내한 거다.
수만이가 천하제일 출신이란 걸 알고는 지위를 이용해 위계로 눌러버렸을 거다.
수만이는 아이를 여기 국제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마치게 하려는 계획까지 다 세워놨는데 이를 포기할 순 없었을 거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정 따위는 벗어던질 수도 있을 만큼 매력적인 조건이었을 거다.
안치홍도 그렇지만 도저히 수만이의 얼굴을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
"가자 성환아. 우리가 방 잘못 찾아왔나 보다."
성환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차갑게 답했다.
"아예 다른 집으로 가시죠. 밥맛 뚝 떨어졌는데. 배신자들을 둘씩이나 보니깐."
성환이의 자극에도 안치홍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어차피 작전은 성공했고 곤란한 지경에 빠진 건 우린데 그래 얼마든지 실컷 짖어 봐라, 뭐 이런 심정일 거다.
보란 듯이 침을 퉤 뱉어버렸다.
"그래. 가자."
수만이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지만 배신감 때문인지 도저히 간단한 작별 인사 한마디도 건넬 수 없었다.
성환이 안치홍을 어깨로 밀치고는 걸어 나갔다.
뒤쫓아가는데 성환은 식당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근처 다른 룸으로 들어갔다.
"다른 데 가자면서?"
"무슨 말 하는지는 들어봐야죠."
"듣는다니 누가?"
"전 못 듣는데요?"
이제 막 대놓고 시켜 먹는다.
하긴 꼭 이 자식이 시켜서라기보단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대충 요리 몇 개를 주문하고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하과장. 표정이 왜 그래? 배신자 소리 들으니깐 막 맘이 아파? 쓰라려?"
"아, 아닙니다. 대표님."
"표정 좀 풀지. 좋은 날인데."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발 건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네. 대표님께서 말씀 주신대로 우리 쪽 지역 언론사에 몽땅 뿌렸고 내일 바로 기사 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리고 C사 인수 건은?"
"네. 협상 마무리 단계입니다. 인수가격만 결정되면 바로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음……. 잘했어. 하차장."
"네? 차장……이요?"
"그래 하차장. 왜 놀라고 그래? 다음 달에 인사 발표잖아. 미리 축하하는 게 어때서."
주재원 신분의 유지와 더불어 승진까지.
앞으로 평생 내 얼굴 한번 안 보는 거치고는 꽤 쏠쏠한 보상일 것이다.
물론 나 같았으면 선택 안 했을 거지만 사람마다 각자 성격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니 선택도 다를 수 있는 법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고."
툭툭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저렇게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는 거다.
말로만 하는 것보단 저런 사소한 스킨십 하나가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부하직원으로 하여금 자기가 이제 이 상사의 줄을 제대로 잡았구나라는 안도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방금 저 둘이 나눈 대화는 분명 유안과 관련된 얘기일 텐데.
게다가 다른 회사를 인수하다니.
유안을 대체할 회사를 찾았다는 얘기인가보다.
아무리 산해진미라도 기분이 언짢으니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다.
음식 맛은 메뉴보다도 식사할 때의 기분이 더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다.
다음 날.
우려는 바로 현실이 되었다.
비록 지역 언론이지만 신문은 물론 방송 뉴스에서까지 유안의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그것도 최악의 소식으로.
뉴스 화면에는 유안의 공장이라는 자막과 함께 내부를 몰래 찍은 화면이 흘러나왔다.
공장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육류와 뒤섞이고 대형 조리기 아래에선 까만 벌레가 우글거리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성환이 놀란 듯 물었다.
"어제 그 둘이 얘기했던 고발 건이 이거에요?"
"그런 거 같아. 오늘 터진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저게 유안 공장이라고요? 지난번 방문했을 땐 저렇지 않았잖아요. 다른 회산 거 같은데?"
"아니야. 유안이라고 하잖아."
"완전 딴판인데요?"
성환이 말이 맞았다.
뉴스에선 그림자 공장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감사관에게 보여주기 위한 본사 공장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음성적으로 운영하는 비등록 공장이라는 뜻이다.
비위생적인 제조 관리 행태가 드러나자 댓글로 소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여론의 뭇매를 제대로 맞았다.
물론 속인 놈들의 잘못이긴 하지만 실사하면서 공장 Capa(생산 가능 물량)를 고려해보지 않은 우리의 실수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동방식품 측에서는 단순 재무실사뿐만이 아니라 전문가들을 대동해 제조공정까지 살펴봤을 거다.
전문가들이 살짝만 훑어봐도 본사 공장의 규모로는 생산량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림자 공장의 존재를 바로 눈치챘을 거다.
그리고선 바로 발을 뺐을 거다.
숫자와 재무리스크만 중시하면 정작 이렇게 기본적이고 중요한 데에서 구멍이 난다.
설명했는데도 성환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중국은 사실 법을 제대로 지키는 기업이 손해를 보는 특이한 경쟁사회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림자공장을 돌린다고?"
"이게 다 비용 때문이야. 안전설비 하나 없이 의료보험이나 법정노동시간 등은 완전 사각지대에서 질 떨어지는 원료를 써가면서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거지."
노동환경개선과 가격경쟁력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사실 차이나프라이스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싼 가격의 이점이 나중에 얼마나 커다란 비용을 초래하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소비자들의 건강은 물론 직업병과 환경오염 등으로 우리 삶의 터전이 점점 더 없어질 거라는 걸 그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절대 알지 못한다.
더는 상하이에 남아 있어봤자 뾰족한 대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팀원들에게 상해에서의 일을 공유해줬다.
"천대표도 그렇고. 조성환님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김철수 이사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성환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내가 우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성환이의 사과.
원모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조성환님께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요. 하수만님이 나쁜 거죠."
송차장이 보내준 메일을 열어보니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별 소비자들은 물론이고 주요 거래처인 대형프랜차이즈 업체까지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외부채도 모자라 우발부채까지 터진 거다.
"이사님. 아무래도 괜찮아지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왜?"
"우발부채에요."
"우발부채라니?"
"제법 큰 소송으로 번질 거 같습니다. 예전에 멜라민분유 파동 이후로 식품 안전 문제 하나 제대로 걸리면 아주 아작이 나거든요. 이번에 유안이 그 시범케이스가 될 거 같다네요."
"그럼 투자금 하나도 못 건진단 말이야?"
"네. 그럴 거 같아요. 죄송해요.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투자해서."
더는 아무런 말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한편, 송차장의 메일에는 다른 기사도 같이 링크되어 있었다.
동방식품이 상해지역 2위의 육가공 업체를 인수했다는 뉴스였다.
먹거리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 하락으로 상당 기간 침체기가 지속될 건데 이 시점에 인수라니.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이 분위기에서라면 곧 인수가격을 후려칠 수도 있다는 얘기니깐.
이 지역 1위 업체인 유안을 몰아내고 2등 업체를 싼값에 먹은 후 침체된 분위기에서 전국 유통망으로의 확대.
교활하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전략이다.
잘못은 그림자공장에서 쓰레기 식품을 만든 유안이 한 거고, 제대로 확인 한 번 안 해보고 지분인수한 우리가 그 대가를 받은 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