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안의 재벌-148화 (148/191)

148화 우려했던 일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수화기 건너편에선 긴 한숨이 전해져왔다.

아마도 유안에 뭔 일이라도 터진 모양이다.

역시나 답답한 송차장.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정리가 안 된 듯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송차장이 왜 천하제일 재무팀의 샌드백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장님! 빨리 말씀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음……. 그게 있잖아……. 빚쟁이가 찾아왔어."

"네? 빚쟁이라뇨? 은행 말이에요?"

"아니. 은행 말고."

"은행이 아니라니요?"

"어……. 그게……. 고리로 사채를 빌려 썼었나 봐."

송차장의 말을 듣는 순간 띵하고 극렬한 현기증이 머리를 때렸다.

이건 장부 밖의 숨은 빚.

바로 부외부채다.

"얼만데요?"

"이자까지 하면 대충 2,000만 위안도 넘는 거 같아."

원화 40억 원 정도로 우리가 출자한 금액을 다 쏟아부어도 모자랄 정도의 큰 금액이다.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큰 금액이, 그것도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알렉스 개X끼.

아무리 설렁설렁했다고 해도, 이 정도 금액이 들락거리는 걸 발견하지 못하다니.

비싸더라도 큰 회계법인을 쓸 걸 하고 후회가 됐다.

"제품 잘 팔리고 사업이 번창하는 데 사채를 쓰다뇨?"

"실상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염가로 후려친 다음에 판촉행사 크게 해서 일시적으로 점유율만 올려놓은 거였나 봐. 마트 직원들한테 뒷돈까지 챙겨주면서 좋은 매대 잡은 거고."

"그 비용들을 사채로 끌어다 쓴 거예요?"

"음성적으로 쓰는 거라 비용처리 못 하니깐 그런 거 같아."

40억 원의 부외부채.

회사의 규모에 비해 상당한 금액이다.

안정성 있고 수익성 높은 재무제표가 결국 빛 좋은 개살구였다니.

제대로 똥 밟았다.

"그건 그렇고 빚쟁이들이 왜 찾아온 거죠?"

"이번에 우리가 출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거 같아. 그 돈 내놓으라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에 투자받았다는 애길 듣고 바로 상환압력 행사하는 건 회사의 미래가 밝지는 않다는 얘긴데.

높은 이율을 계속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일찍 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지금까지 이자랑 원금 먼저라도 빼겠다는 심정일 거다.

"왕동사장은 뭐라고 합니까?"

"적반하장이야. 중국에선 이중장부가 당연한 건데, 그런 것도 이해 못하냐고."

"그래서 어떻게 한대요?"

"천하태평에서 투자한 돈으로 일단 막겠데."

"네? 우리 투자금 전부를요?"

"사채업자들이 왔다는 소문이 나면 금융기관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쉬쉬하면서 그냥 쥐여주고 끝내려나 봐."

"그럼 유통망 확대는요?"

"딜레이지 뭐. 나중에 추가 투자받아서 추진할 수밖에 없지."

살짝 들어갔다가 적당히 남기고 빠지겠다는 애초의 나의 목적은 물론이고 전국 브랜드로 성장할 거라는 성환이의 기대 역시 물 건너갔다.

오히려 원금 회수마저 걱정해야 할 판이다.

허탈한 마음에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태평아."

내 눈치를 보는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뭐든지요."

"동방식품에서 실사했다는 회계법인 사람한테 들은 건데."

"Big 4 회계법인에서 한 거요? 수만이가 별문제 없었다던데요."

"그게 아니었나 봐."

"네? 무슨 소린지?"

"실사하면서 사채가 있다는 걸 발견했데. 우발부채 있다는 소식에 동방 측에서 바로 발 뺐다고 하더라고."

"네? 수만이 말로는 분명 경영권 이슈 때문에 나가리됐다는데요?"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확실한 거 같아."

수만이가 일부러 우리한테 똥 밟으라고 유도했다는 건데.

주니어 때부터 잘 따르고 똑똑하던 후임이 설마.

아닐 거다.

송차장이 아직 앙금이 남아서 소문을 부풀리고 음해하고 있을 거다.

"수만이는 그럴 얘가 아닙니다."

"음……. 혹시 그때 재무실사 맡겼다던 알렉스라고 알아?"

"네. 알죠. 미팅도 했고요."

"그 친구가 이번에 동방식품으로 옮겼데. 수만이 밑으로."

"네? ……원래 알고 지낸 사이니깐 그럴 수 있죠."

"그뿐만 아니라, 알렉스가 예전에 동방 측에서 실사 맡겼던 Big4 회계법인 담당자였나 봐. 로컬회계법인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시 이번에 동방으로 조인한 거지."

더는 통화를 할 수 없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정황상 송차장의 말이 옳다.

갑자기 지난번 공항에서 헤어질 때의 수만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다시 안 볼 사람인 것처럼 이상한 인사말을 건넸고,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주저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했었다.

아무튼 뭔가 이상했었는데, 송차장 얘기를 듣고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까 했지만 참았다.

물어봤자 맞다고 하면 화내는 거밖에 할 게 없고 아니라고 해 봐야 믿지도 못할 테니.

다음 날.

모두들 출근하자마자 송차장과 통화했던 내용을 공유해줬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게 아니어서 수만이 얘기는 쏙 뺐다.

역시 오랫동안 숫자만 봐오던 원모는 분기탱천했지만 성환이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나가리라고 볼 수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질 좋고 잘 나가는 제품 가지고 있으면 어찌 될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

"제품이 좋다기보단 염가로 후려치고 뒷돈까지 찔러주면서 반짝한 거라잖아.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지."

"처음엔 다 그렇게 성장하는 거죠. 한 번 치고 나갈 때 제대로 키워야지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오겠어요? 지금 여유자금도 있고 다음 달이면 수호회사에서 회수할 돈도 있는데 우리가 더 투자하면 안 되나요?"

다음 달에 100억으로 돌려받기로 한 그 대여금을 말한 거다.

암호화폐로 투자해야 할 그 돈.

절대 안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사채까지 얻어다 쓰는 회사에 무슨 가망이 있다는 거야?"

"급할 땐 쓸 수 있죠. 우리 천하제일도 예전에 김선생님 도움 많이 받은 거 아시잖아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

"알았어. 그럼 일단 직접 가서 보자."

* * *

며칠 뒤 상해 공항.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국장을 나오면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번엔 역시 천하태평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성환이도 내심 아쉬웠는지 한마디 했다.

"이젠 차도 안 보내주네요."

"자기들이 아쉬울 때가 아니잖아. 우리가 따지러 오겠다는데 기분이 좋겠어?"

"그래도 그렇지. 우리보고 어떻게 가라고."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렇다고 하수만님도 안 나와요?"

"계속 신세질 순 없잖아. 일부러 얘기 안 했어."

"아니 그래도 자기가 소개해준 회사가 이 꼴 났는데 알려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됐어. 일단은 상황 파악부터 하자."

공항을 빠져나가려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송차장이었다.

"차장님. 뭐 하러 오셨어요? 그냥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조성환님까지 오시는데 그럴 순 없지."

대답하면서 성환이 쪽을 슬쩍 쳐다봤다.

딸랑딸랑이라기보단 천하제일에서의 습관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거다.

"그럼 그냥 직원 보내시지, 뭐 하러 직접 나오셨어요?"

"그래도 내가 와 봐야지."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방금 말이 거짓임을 알려줬다.

아마도 직원 한 명 보내기가 어려웠을 거다.

말만 임원이지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결재라인에서도 배제되어서 업무 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있을 거다.

안 그랬다면 빚쟁이가 쳐들어오기 전에 부외부채의 존재를 알았을 테니.

안 봐도 선하다.

"아이 또 무겁게 이런걸……."

마침 양손에 짐을 들고 있어서 불편했는데 송차장이 도와준다고 손을 뻗었다.

그래도 그나마 끌기 편한 캐리어를 내밀었는데.

오해였다.

송차장이 두 손 가득한 내 짐이 아닌 딸랑 캐리어 하나뿐인 성환이의 짐을 받아들었다.

실세가 누구인지 아직까지 파악을 못하다니.

눈치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역시 샌드백 감이다.

한참을 달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왕동사장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 달 전 방문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었다.

왕동사장은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소파에 누울 듯 기대앉은 채 귀찮은 표정으로 담배를 집어 들었다.

후우~!

불을 붙여 한 모금을 길게 들이마시고는 우리 얼굴 쪽으로 뿜어댔다.

"뭐하러 또 오셨습니까? 파견한 임원 통해서 전달하면 될 걸 가지고?"

말투에 가시를 그대로 드러내듯 쏘아붙였다.

"얘기 들었습니다. 부외부채가 있었다고요?"

"그런데요?"

일말의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너무나 당당한 답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난번 협상했을 때와는 다르잖습니까? 인수할 때 우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요."

"사업하다 보면 급할 때 끌어다 쓸 수도 있지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물론 그럴 순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장부에는 반영했어야죠. 저희한테 알려주시던지요?"

왕동사장은 물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듯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꼬던 다리를 풀어 신경질적으로 밟아 껐다.

"장부에 반영하면 은행들이 가만 안 있을 텐데요? 대출 연장도 안 해주고 상환하라고 하면 어떡하라고요? 회사가 망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 있어? 이게 누구 회산데?"

말하면서 점점 흥분되는지 삿대질까지 섞어가며 쏘아붙였다.

잠시 후 왕동사장이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여긴 중국입니다. 관행이잖습니까?"

한마디로 끝이다.

관행, 즉 관습이고 여기선 법과 같은 효력이 있다 뭐 이 정도의 뉘앙스가 전달됐다.

중국어를 모르는 성환이도 표정을 보고는 대강 분위기 파악을 한 듯했다.

더 말해봐야 싸움만 나고 소득이 없을 듯.

"그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 해결은 가능합니까?"

"당신들이 투자한 자금이 있으니깐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죠."

유통망을 넓히는 데 쓰라고 내준 피 같은 돈을 사채빚 갚는 데 쓰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왕동사장이 자세를 고쳐잡고는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추가출자를 해주실 수 있나요? 50%까지 맞춰 드릴 테니 같이 한번 해 보시는 게 어떨지요?"

미친놈.

밑 빠진 독에 물 부어달라는 애긴데.

성환이 대강 눈치를 챘는지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땐 쐐기를 박아놔야 한다.

"안 됩니다. 저희도 여유자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내 답에 왕동사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투자할 거 아니면 꺼지라는 거다.

별다른 소득 없이 사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송차장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괜찮겠지?"

"괜찮다마다요. 설령 다 날린다고 해도 우리 천하태평이 그 정도 금액으로 무너지진 않습니다."

"아니 천하태평 말고 여기 유안 말이야."

역시 사람은 자기 앞가림이 먼저다.

송차장은 지금 몸담고 있는 유안의 앞날이 걱정된 것이었다.

자기 생계와도 직결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피 같은 총알을 성장하는 데 쓰지 않고 과거에 싸놓은 똥 치우는데 쓸 생각을 하니 한참 동안 엿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성환이 역시 기분이 나빴는지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씩씩거렸다.

"직접 와서 보니깐 어때?"

"더 투자할 건 아니네요. 그래도 급한 불 끈다니깐 제품 믿고 기다려보죠. 뭐."

"그래.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제품경쟁력이 있다고 하면 언젠간 전국브랜드로 클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싹수가 노랗긴 하지만 앞날은 모르는 거니.

닥치기 전까지 지레 겁먹고 호들갑 떨 필요까진 없다.

"저녁은 하수만님하고 해요?"

"그게 실은……. 확실하진 않지만 수만이가 알고 우리한테 넘긴 거 같아."

"네? 그럴 리가……. 수만님이 왜요?"

"나도 그걸 모르겠어."

"확실한 거예요?"

"동방 측에서 실사할 때 부외부채가 있다는 걸 발견했나 봐. 그래서 바로 손 털고 나갔다는 얘기가 있어. 게다가 수만이 소개로 우리가 실사 맡겼던 그 알렉스란 친구가 그때 그 동방 측 회계법인 실사담당자였다고 하더라고."

"아니? 그럼 하수만님이 일부러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 거 같아."

성환이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천하제일에 입사하고 첫 출장 때부터 맺어온 인연이 결국 악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큰 상실감을 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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