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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안의 재벌-147화 (147/191)

147화 불안함

중국요리엔 역시 백주다.

50도에 육박하는 독주임에도 거부감없이 목구멍을 술술 타고 넘어갔다.

몇 잔 술에 취기가 오른 수만이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는지 해맑은 웃음을 되찾았다.

"참! 대표님. 그쪽에 이사 한 명 파견하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새 유안 쪽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나 보다.

비스듬히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했던 제안을 날렸다.

"그래서 말인데. 수만아. 우리가 여기 지분 인수하면 네가 CFO로 가면 안 되냐? 너 정도는 돼야 믿을 수 있어서 말이야."

수만이는 곤란한 듯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야 물론 가고 싶지만요. 아이 학교 때문에요."

교육비 지원이라는 허들을 넘기엔 나의 인간적인 매력으론 살짝 부족했나 보다.

"그렇겠지? 거기서 학비 보조해줄 것도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조건이 안 맞는 것뿐인데."

수만이가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혹시…… 송차장님은 어떠세요?"

"송차장?"

"네. 청도 J사로 파견 오셨던 송지환차장님요."

예전 천하제일 재무팀에서 같이 근무했었던 임상무의 샌드백.

주간업무보고 때마다 흠씬 두들겨 까이던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자의 반 타의 반 파견 나갔었던 그 송차장을 말한 거다.

"송차장님이 왜?"

"얼마 전에 천하제일 본사로 복귀했다던데요. 바로 지방으로 발령받으셨다고 들었어요."

복귀하자마자 지방 전출이라.

그렇다면 퇴사 수순이란 얘긴데.

송차장한텐 안 됐지만, 우리에겐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그래? 잘됐다. 한번 만나봐야겠네."

"잘됐다뇨?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농담이에요. 하여간 송차장님 지금 죽을 맛일 겁니다. 가족들 때문에 확 때려치지는 못하겠고, 마지못해 출근하실 거예요. 한국 들어가시면 한번 만나보시죠."

송지환 차장.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나한테 밀려서 주무 역할도 한번 못 맡아보고 쫓기듯이 중국으로 파견 나갔었다.

곱창집에서의 회식 날, 파견 나가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본인의 운명을 직감한 듯 미처 말 꺼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했었다.

다음 날.

전날 백주로만 달린 덕인지 숙취 기운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일어났다.

오전에 바로 유안에서 보내준 차에 타고 다시 방문했다.

어제 성환이와 얘기 끝내놓은 덕분에 유안 정동사장과 간단한 담소를 나눈 후 신주인수계약서에 사인했다.

아무리 동방 측에서 사업성이 좋다고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쉽게 사인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은 있었다.

천하태평 초창기엔 몇천만 원짜리 투자 한 건만 하려 해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는데, 이젠 30억 정도는 별다른 고민 없이 내던진다는 꼴이랄까.

그만큼 천하태평이 성장한 덕분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불안감은 약간 수그러들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상해 공항에 도착하니 수만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뭐 하러 나왔어? 회사는 어떡하고?"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일 있다고 오후 반차 냈어요. 대표님하고 조성환님까지 오셨는데 제가 마중 나와드려야죠."

반차까지 낸 걸 보니 어제 상관과 통화한 건은 잘 해결됐나 보다.

"그래. 고맙다."

"그건 그렇고 오늘 일 마무리 잘하셨습니까?"

"그럭저럭."

"오늘 계약서에 사인까지 하신 거예요?"

성환이가 대신 답했다.

"네. 하수만님 덕분에요. 뭐 오래 끌 필요 있나요?"

"그렇죠. 다행입니다. 다 잘될 겁니다."

수만이는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기뻐했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고는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건강하십시오. 항상 몸 잘 챙기십시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다신 안 볼 사람처럼."

"그냥요. 또 몇 년 뒤에 뵐지 모르잖습니까?"

"아니야.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네.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잘 있어."

수만이는 우리가 탑승동으로 들어가서 안 보일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정 많은 놈이다.

* * *

며칠 후.

강남의 한 고깃집.

약속 시간은 한참 남았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먼저 도착해서 앉아있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머리는 반쯤 벗겨진 게 변발한 황비홍처럼 생긴 중년의 아저씨 한 명이 들어섰다.

오른손을 휘저으며 방을 잘못 찾아왔다고 넌지시 알려줬다.

그러나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반갑게 웃어 보였다.

"태평이?"

헐!

자세히 보니 송지환 차장이었다.

내가 놀라는 모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채고는 머쓱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야. 나. 좀 많이 변했지?"

"네. 많이 변하셨네요."

오히려 더 예의가 아닌 듯해서 차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생 많으셨나 봐요."

"고생은 뭘?"

하지만 힘없이 웃음 짓는 얼굴에선 그간의 마음고생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에 산성비가 많다더니."

송차장이 욱하며 정색하듯 노려봤다.

"뭐라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농담이."

"아냐. 한결같아서 오히려 좋아. 차라리 그렇게 직접 얘기해주는 게 나아."

"네. 좀 휑한 게 흠인가요?"

"그렇지?"

놀라서 그런 거지 정말 놀린 게 아니었는데.

송차장이 오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J사에서 왜 돌아오신 거예요? 가시기 전엔 CFO 역할 제대로 해보겠다고 각오가 상당했었잖아요."

"다 내가 부족해서지. 중간 역할을 제대로 못 해서 말야."

안 봐도 뻔하다.

천하제일에선 50%나 투자했는데 뒷방에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으니 조직을 휘어잡으라고 계속 송차장을 쪼아댔을 거다.

하지만 정동사장 역시 자기가 엄연히 CEO인데다 회사를 이렇게까지 키우고, 앞으로도 더 키울 사람 역시 자긴데 쓸데없이 한국 측에서 방해만 한다고 꽤 견제했을 테고.

송차장만 중간에서 입장이 매우 난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엎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을 사람도 아니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 아웃되었을 거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참 괜찮은 사람인데.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우유부단한 성격은 직장생활에 적합하지 않다.

아랫사람은 자기를 잘 끌어 올려줄 윗사람이 필요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자기를 대신해서 부하직원들을 알아서 쪼고 갈구는 등 번거로운 일을 해주길 바라는데 송차장 같은 사람은 이도 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위아래로부터 치이니 자리를 뺄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회사엔 이상한 꼰대들만 남게 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조직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다.

"바로 지방으로 발령 나셨다면서요? 어디로 출근하세요?"

"공주 공장으로 발령 났어."

"네? 거기서 뭐 하시는데요?"

"응. 시설팀에 있어."

"시설팀이요?"

송차장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집에서 아주 먼 곳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서 평생 숫자만 보던 사람한테 완전 생뚱맞은 일을 주다니.

사실상 유배다.

사표 내라고 대놓고 요구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주말부부 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뭐."

가족들만 아니면 사표 벌써 던지고도 남았겠지만 오라는 곳도 없고 찾아주는 사람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다니는 거다.

"차장님. 중국으로 다시 가주실 수 있어요?"

"중국?"

"네.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좋아."

어딘지도 묻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다는 건가.

"어딘지도 안 물어보세요?"

"말했잖아. 중국이라며?"

중국을 어디 지방 소도시쯤으로 여기는지.

"오호. 대륙스타일 다 되셨네요?"

"농담이야. 어딘데?"

"상해예요. 그런데……, 현지 채용이라 대기업 주재원 대우는 안 될 겁니다."

"괜찮아. 어차피 얘가 벌써 고등학생이라 특례로 한국에서 대학 가면 돼."

"그럼 혼자 가시려고요?"

"혼자면 어때? 지금도 그런데."

조건이 어떤지도 안 물어보고.

천하제일에서 언제 나가나 대놓고 눈치라도 주는지 어지간히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육가공회사 CFO인데 현지 경험도 있으시니깐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이것저것 쪼지도 않을 거고요."

"뭐든 할게."

"네. 견제 역할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이슈 있을 때마다 바로 알려주시고요."

"그래. 고마워 태평아."

송차장이 내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댔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송차장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능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신뢰를 하진 않지만 그럴만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리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게다가 인간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니 최소한 상대측과 짬짜미해서 우릴 속여먹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제안해준 거야?"

"수만이가 얘기해줬는데요?"

"뭐? 수만이가?"

전혀 뜻밖이었는지 놀란 듯 쳐다봤다.

"왜요? 수만이가 못 할 말을 한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수만이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말이야."

송차장은 그간 J사에서 지내왔던 일을 얘기해줬다.

한국 측 입장을 대변하는 송차장과는 달리 수만이는 비록 한국 사람이지만 정동사장이 직접 채용한 현지 직원이라 그런지 철저히 중국 측 입장만 대변해서 사사건건 대립해왔다는 것이었다.

좋지 않게 헤어졌는데 수만이가 일자리를 추천해줬다는 게 의아하다는 거였다.

"수만이 착한 얘잖아요. 그땐 자기 역할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죠. 설마 차장님한테 악감정이 있으려고요."

"그렇겠지?"

"네. 수만이도 상해에 있으니깐 앞으로 자주 만나세요. 이참에 화해도 하시고요."

"그래 이제 화해해야지. 허허."

송차장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무슨 마음인지 알 거 같았다.

사실 젊었을 때야 대판 싸우더라도 저녁에 술 한잔 같이 마시면서 훌훌 털어버리기 쉽지만 나이 들어서는 점점 그러기가 힘들어진다.

그때그때 풀지 못하고 속으로 쌓아놓고만 있다가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갈 때 서운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지게 된다.

게다가 말로 베인 상처는 잘 아물지를 않아 큰 생채기를 남기게 되므로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까진 화해하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 * *

한 달 뒤 사무실.

오늘따라 왠지 알코올이 당겼지만, 역시 누구 하나 소주 한잔 같이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점점 퇴근 시간은 다가오고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싸늘한 오피스텔에서의 혼술은 영 당기질 않아 번개나 때리자는 생각에 사무실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눈치 줬으면 척하면 척.

원모가 '한잔 하시지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일어났을 텐데 이놈 결혼하고 나더니 완전히 달라졌다.

고개를 돌린 채 딴 데 보는 시늉을 했다.

"뭐야? 어디 보는 거야?"

원모는 못 들었다는 듯 계속 딴청 피우는 척했다.

탁!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원모가 화들짝 놀라며 움찔대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안 되지 말입니다."

역시 이 자식 내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다.

"뭐가?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 그런가요? 하여간 오늘은 안 됩니다."

"왜 안 돼? 나를 납득시켜 봐."

원모는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출근할 때 보니깐 달력에 하트가 그려져 있더라고요."

"하트라니? 뭔 개소리야."

원모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게 있습니다. 부부끼리 뭐 그런 거요. 잘 모르시겠지만."

"뭐야? 부부끼리 사인이야? 날짜를 미리 정해 놓는 거야?"

"네. 오늘이 똑똑한 2세 만들기에 딱 좋은 날이라고 해서요."

"닥치지 못해? 내가 그런 거까지 알아야 하냐?"

"대표님께서 납득시키라고 하셨잖습니까."

"알았어. 납득했어. 넌 열외. 네 2세가 나갈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냥 지금 가라."

"넵."

원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었나보다.

하지만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성환이 쪽을 바라봤다.

역시나 눈치챘는지 한마디 했다.

"저도 안 됩니다."

"넌 뭔데? 결혼도 안 한 놈이."

"결혼 안 했으니깐 가야죠. 원모님은 의무방어전이지만 전 타이틀전인데요."

성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뒷자리 김철수이사를 보려는데 역시 발 빠르게 선수 쳤다.

"나도 오늘 방어전 있어."

"네. 고생하십시오. 이사님."

어쩔 수 없이 썰렁한 오피스텔에서의 혼술 각이다.

책상을 정리하려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국가번호 81.

중국이다.

금요일 저녁 중국으로부터의 전화.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에서 역시 송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평아. 난데. 큰일 났어."

떨리는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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